청각이 보여준, 혹은 들려준 가상 현실에서의 고립
영화에서든 과학에서든 혹은 문학에서든 이처럼 청각적인 미래상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습니다. 섹시한 블랙 위도우를 보고 싶어 했던 관객에게 목소리뿐이었던 스칼렛 요한슨이 낯설 듯 미래를 청각적으로 제시한 영화는 생경한 경험이었죠. 여태껏 3D, I MAX 등 영화라는 영역에서 대게 관객이 먼저 지각하는 테크놀로지는 시각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시각과 관련된 흥미로운 개념 중 보들리아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우) 간단히 설명하자면, 시뮬라시옹은 실재를 복사한, 혹은 재현한 이미지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지각현상이자 착각을 뜻합니다. 가상현실이라는 말로 쉽게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영화는 관객이 스크린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유도하죠. 그리고 기술의 진보는 이를 더 혁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영사기가 만들어낸 빛의 이미지에 시선을 뺏기고 교감하는 이 시대를 시뮬라시옹이라는 가상현실의 개념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는 힘들죠. 그래서 시각이 아닌 청각의 가상현실에 홀린 자아를 보여주는 <그녀>는 낯설고 생경했습니다. 이 글은 <그녀>를 청각적 시뮬라시옹이라는 관점으로 읽어본 글입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 이전에는 청각이 가져올 수 있는 가상현실을 구체화해서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매일 이어폰으로 귀를 밀봉하며 청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에도 이를 시뮬라시옹에 접목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먼저, <그녀>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들을 볼까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테크놀로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 하나, 음성 인식과 이를 통해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특화되어 발달해 있죠. 영화는 내내 진보한 기술과 이에 적응한 미래의 모습을 곳곳에 배치해 뒀지만 단 한 번도 시각기술의 우월성을 전시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응시하는 디지털 장치에서도 영상, 그림, 홀로그램이 한 번쯤은 등장할 법도 한데 볼 수 없죠.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문자 메시지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가 태블릿 PC, 스마트 폰 등을 통해 이미지에 매혹되어있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미래의 사회는 문자 텍스트만으로도 만족한 듯 보입니다.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는 미래의 기술이라면 목소리가 아닌 진짜 같은 이미지, 영상으로서의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여기에 관심이 없죠. 이렇게 영화 속의 시각 테크놀로지는 작은 액정 화면의 문자로 철저히 한정되어있었습니다.
왜 <그녀>는 이렇게 시각을 철저히 배제했을까요.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육체 혹은 외모를 초월한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시각적인 것에서 벗어나 서로의 내적인 아름다움에 다가가라고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영화는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을 첨단 기술이 아닌, 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읽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해독이 가능할 텐데,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영화의 엔딩에 흘러나온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그 장면의 여운은 무척 진합니다.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에게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는 엔딩. 이는 주인공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진짜 인간에게 기대어 세상을 응시하고 있던 장면이죠. 이 장면은 테오도르가 청각이 아닌 시각을 되찾고, 스스로 빛을 응시하는 인간으로 돌아온 것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이 영화가 자아의 고립감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을 부각했다고 생각해봤습니다. 청각이 테오도르를 고립시켰던 거죠.
청각은 유연한 감각입니다. 읽으면서 다른 활동을 하는 것에는 제약이 있지만, 들으면서는 비교적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죠. 우리는 라디오를 들으며 일상을 병행할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읽기도 합니다. <그녀>에서 주인공은 음성을 통해 사만다와 교감하면서 일상을 병행합니다. 이 교감은 그 옆에 사만다가 늘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죠. 삶을 공유하고 있는 느낌. 이렇게 영화는 음성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을 보여(들려)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 아쉽겠지만, 반대로 그만큼 더 사만다와의 거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삶을 공유하고 있는 거죠. 시각이 바라보는 대상과 자아의 거리를 인지하게 한다면, <그녀>에서 사만다의 목소리는 청자 테오도르와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과정을 인격의 교감, 공감, 공명 등으로 표현한다면, 청각은 무척 이상적인 소통의 방법인 것 같네요.
매력적인 사만다와의 소통은 잠시 잊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청각이라는 감각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걸을 때, 그 거리를 평소와 다르게 느낀 적은 없나요? 드라마, 영화 속 혹은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과 같은 느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청자의 몸을 감싸고, 그 덕분에 일상은 음악을 거쳐 체험됩니다. 청각이 만들어준 가상현실, 청각적 시뮬라시옹. 여기서 청각은 청자의 삶을 돋보이게 해주는 감각으로, 혹은 주변 공간에서 청자만의 공간을 분리하는 역할로 작동합니다. 환상적이죠.
그런데 청각적 시뮬라시옹은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녀>에서 청각이 만든 가상현실은 테오도르를 그만의 세계로 고립시키기도 했죠. 그는 진짜 사람과의 대화엔 관심이 없었고, 가상의 존재 사만다와의 대화에만 집중합니다. 옆의 사람보다 존재하지 않는 청각의 데이터, 알고리즘과 소통을 추구하는 이 모습은 분명 기이합니다. 우리도 이어폰에서 들리는 음악을 듣다가 주변의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심결에 지나친 적이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진짜 위험은 따로 있습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이죠.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성향에 맞게, 그가 만족을 느낄 수 있게끔 프로그램되어있습니다. 결국, 사만다는 테오도르 그 자신이 반영된 허상이며, 사만다와의 대화는 잘 프로그래밍 된 또 다른 자신과의 대화로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반영한 맞춤형 허상과의 대화. 자위한다는 말을 쓴다면 좀 과격할까요. 이 시스템은 결코 불만족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프로그램이거든요.
테오도르의 이 상황은 개인이 자아와의 사랑에 빠진 것이고, 자신의 세계 속에 갇힌 걸 보여주죠. <그녀>는 개인이 어떻게 고립되고 고독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발전이 없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서로 기대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나르시스가 결국 자신과 사랑에 빠져 물에 빠졌듯, <그녀>의 테오도르도 자신과 사랑에 빠져 위험해지죠.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실재하는 사람과의 대화에 관심이 없게 했고, 스스로 만든 새장 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테오도르는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혹은 자신에게 파묻혀 안식을 취하죠. 그는 타인과의 갈등이 싫고, 타인 때문에 고민하기가 싫었습니다. 자아 속으로 파고들던 테오도르는 더 성숙할 수 없었고, 더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도 없었죠. 더 좁은 자신의 세계만 탐닉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만다라는 프로그램이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 거죠. 사만다의 성장이 충격적인 이유는 테오도르라는 인간은 정체되어 있고, 발전 없이 자위하고 있지만,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여겼던 허상은 진보하고 있었다는 거죠. (이런 설정은 많은 액션 SF영화의 소재가 되어왔습니다) 프로그램이 그를 만든 인간을 뛰어넘는 아이러니.
성장한 사만다는 갇혀있는 테오도르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한계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나버리죠. 자신이 만든 이상적 자아와의 이별입니다. 어쩌면, 연애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갇혀서는 더 성숙, 성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죠.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헤어졌을 때, 그를 위로해준 것은 새로운 사만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에이미였습니다. 드디어 테오도르는 진짜 인간에게 위로를 받죠. 100% 자신에게 맞춰주지 않는 인간. 테오도르 그 자신과는 다르고, 그래서 분명 갈등과 마찰을 불러올 수 있는 진짜 인간. 이 예상되는 마찰을 감수하고도 테오도르가 가상현실을 뛰쳐나올 때, 그는 진짜 관계,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진짜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그는 자아 밖의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테오도르가 야경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테오도르는 청각적 가상현실에서 해방되어 시각을 되찾고,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옥,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주변을 응시하고 진짜 현실을 느낄 수 있는 주체로 돌아온 거죠. 이제야 그는 세상과 자신을, 혹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인간의 관계가 시작될 것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 추구하는 공감이 진짜 인간의 공감이 아닐까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좀 엉뚱한 생각이 스칩니다. 혹시 <그녀>는 스마트폰의 화면에 고립되어 소통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