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역설
기억도 리셋이 된다면? 그리고 수많은 기억 중에 사랑한 연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면 어떨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서약>에는 사고로 남편(채닝 테이텀)의 존재를 잊어버린 아내(레이첼 맥아담스)가 등장합니다. 영화는 그녀가 다시 남편을 사랑하게 되는 낭만적인 엔딩으로 끝나죠. 하지만 사랑에 대한 모든 기억이 낭만적이지 만은 않을 겁니다. 잊고 싶은 연인에 대한 기억도 있기 마련이죠. 이번 글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잊고 싶은 연인에 대한 기억. 사랑과 기억에 대한 독특한 로맨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10년 만에 재개봉한다고 합니다.
조엘(짐 캐리)의 기억 지우기 여행에 동참하기 전에 <이터널 선샤인>의 만듦새를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이 영화는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의 미셀 공드리입니다. 참신한 연출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그의 인장을 새겨 넣었습니다. 뇌 속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둔 것이죠. 미셸 공드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공간, 형체 없는 얼굴, 어른모습을 한 아이, 붕괴하는 집 등의 이미지들을 통해 뇌의 복잡한 회로들을 흥미롭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서정적인 영상과 음악을 더해 로맨틱한 이미지를 함께 버무려 내죠. 그래서 <이터널 선샤인>은 독특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미셸 공드리의 작품 중 예술성과 대중성이 가장 조화로웠던 영화인 것 같네요.
<맨 인 블랙> 시리즈에는 ‘뉴럴라이저’라는 기억제거기가 등장합니다. 요원들은 그 장치를 이용해 외계인을 본 시민들의 기억을 지우죠. 이는 요원들의 정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시민들이 외계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게 합니다. 외계인을 보고 놀라고, 혼란스러웠던 시민들은 뉴럴라이저 덕분에 외계인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죠. 망각이 세계 평화를 유지해주는 엄청난 것으로 쓰인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에 등장하는 기억제거 회사 '라쿠나'는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지워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상처를 받죠.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거나,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 한 구석이 저린 사람, 사건이 있지 않나요? 혹은 죄의식을 느끼는 순간은 없나요? 라쿠나는 그 불쾌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망각이 만능치료제는 아닙니다. 기억에서 지운다고 과거의 사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고, 어떤 결과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는 효과가 있죠. ‘나만 모르면 그만이지.’ 어떻게 보면 라쿠나는 인간의 이기적, 비도덕적 욕구를 이뤄주고, 그들의 불편한 진실들을 보관하는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겠네요.
조엘은 사랑했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운 것을 깨닫고 괴로워합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남자가 된 조엘. 이별의 고통만으로도 아픈데,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느낌에 분노까지 하게 되죠. 그래서 자신도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그녀를 떠올리며 느낄 슬픔과 분노에서 빨리 해방되고 싶었던 거죠. 이는 역으로 그들의 이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실수로 그녀에게 상처를 줬는지를 생각하기 싫다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라쿠나는 조엘을 클레멘타인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조엘은 행복해졌을까요?
무엇인가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마주하고서야 그것의 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멸의 순간을 앞둔 영화관, 식당, 카페 등의 공간엔 사람들의 많은 흔적이 묻어있죠. 평소엔 꺼내지 않다가,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서야 소중함을 되새기는 바보 같은 순간. 조엘도 그랬습니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여정에 오르고서야, 그녀와 쌓아온 순간들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이 기억만을 남겨달라’는 조엘의 외침은 어리석은 인간의 비명이며, 보석 같은 순간을 눈뜨고 도둑맞을 불쌍한 인간의 절규입니다. 지금 내게 고통을 주는 여자이지만, 그녀 덕에 찬란히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는 진실. 고통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아이러니.
조엘은 그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클레멘타인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 조각의 행복한 기억을 위해 클레멘타인이라는 존재 전부를 망각할 수 없는 불편한 사실. 이처럼 기억은 한 조각으로 파편화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연결된 무수히 많은 조각의 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삭제하기 위한 선택은 행복한 순간을 파괴하는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행복한 순간을 지키기 위한 조엘의 이탈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무너져내리는 기억의 삭제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는 조엘은, 남은 기억을 음미하며 즐기는 선택을 하죠. ‘있을 때 잘할걸’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기억 지우기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있던 순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엘은 자신이 과거에 실수했던 것, 그녀를 두고 집을 떠나갔던 것을 후회하죠. 이 실수와 후회의 감정까지 삭제되면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완전히 지우게 되고, 과거의 과오로부터도 해방됩니다. 그 후에야 조엘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죠.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전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걸까요. 그렇다면 실수마저 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실수했던 과거의 사건, 치욕, 죄의식, 상처에서 벗어나 더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터널 선샤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과거를 잊는다면, 그 과거를 되풀이 할 뿐이다.’ 기억에서 서로를 지운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운명처럼 재회합니다. 그리고 다시 사랑에 빠지죠.
예전엔 이 장면이 굉장히 로맨틱하게 느껴졌습니다. 망각을 초월해서 결국 다시 만나고야 마는 인연, 운명, 그리고 사랑의 힘. 또다시 서로에게 끌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들은 참 많이 사랑했었으며, 기억이 아닌 오감이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했었죠. 하지만 이는 기억을 지운 인간이, 과거와 똑같은 순간과 만나면 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무서운 장면이었죠.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 초안에는 늙은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우러 오는 장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생 기억을 여러 차례 지운 것으로 설정되었다고 하죠. 초안대로 완성되었다면 이 영화는 과거의 실수, 상처가 계속 반복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거네요.
대신 이번엔 다른 부분에서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기억 지우기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서 두 사람의 처음 만났던 기억 속에서 조엘이 후회했던 장면이 있었다고 했죠. 그 기억이 무너지면 클레멘타인을 모두 잊게 되는 그 순간, 조엘은 다음엔 당신을 혼자 두지 않고 잡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그의 치명적인 실수를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죠. 그리고 실제로 조엘은 이 약속을 지킵니다.
다시 만나 서로에게 이끌렸던 두 사람은 라쿠나 회사의 직원이 폭로한 사실을 통해 그들이 과거에 헤어졌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떠나는 선택을 하죠. 조엘도 그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다가 갑자기 클레멘타인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죠. ‘왠지 잡아야만 할 것 같아.’ 과거의 행복한 순간은 잊었지만, 조엘은 그의 실수는 기억했기 때문에 클레멘타인과의 다른 미래를 만들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극본 초안이 망각과 실수의 반복이라는 비극이었다면, 완성된 <이터널 선샤인>은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엘이 실수를 기억해낸 것뿐만 아니라, 두사람은 라쿠나사 직원의 폭로 덕분에 과거의 상처와 실수를 알게 되었죠. 이 흔적들이 더 나은 관계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이터널 선샤인>의 이러한 결말은 기억이 참으로 역설적인 녀석이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는 것보다 아프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결국엔 우리를 더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픈 진실. 어쩌면 역사도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아픈 과거, 지우고 싶은 역사 속에서 인류의 진보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죠.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노덕 감독의 <연애의 온도>라는 영화인데요. 거기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많은 연인들 중 82%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대. 그중에 계속 만나게 될 확률은 3%래. 나머지 97%는 다시 헤어진대. 같은 이유로.” 어쩌면 이 영화가 <이터널 선샤인>의 낭만성을 산산이 부숴놓는 영화가 될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