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겐남의 긍정적 자아개념
요즘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게 있는데, 과거의 나는 스스로를 너무 초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잊을만하면 책에 자꾸 나타나는 이놈의 자아개념. 결국 스스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건데, 이 녀석이 학업 성취와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긍정적 자아개념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나를 세뇌한다. 그러면서도 다이어트 전후 효과를 명시해 놓듯 긍정적, 부정적 자아개념을 가진 사람의 특징을 비교해 놓는다. 그런데 부정적 자아개념 특징에 더 눈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에도 확신이 없어 "이건 ~인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거나,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칭찬을 의심하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데 거의 내 자아소개서를 보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가장 암울했던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유전이라도 터진 듯 미끈거리는 기름기와 함께, 생전 나지도 않던 여드름이 갑자기 내 얼굴을 뒤덮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이들은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붉은 옷을 입고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화산, 딸기 등 붉은 것만 골라서 따라붙던 내 별명은 여드름 전성기였음을 방증했고, 수많은 여드름 자국은 내 얼굴과 함께 자신감도 뒤덮어버렸다. 이 탓에 우정을 남기는 사진을 찍을 때도 나는 우정보다 내 치부가 남을까 두려워 늘 카메라 렌즈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심성이 고왔던 일부 친구들은 머릿결이 좋다거나 목소리가 좋다는 등 나를 북돋게 할 칭찬을 건네줬지만 이런 말은 찰나의 행복일 뿐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칭찬은 그저 어린아이 하나 달래려는 작은 사탕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분명 이렇게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보면 감정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 같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나를 한순간에 집어삼켜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게 할 뻔했으니.
이런 이유로 고등학생 신분을 벗은 뒤 내 첫 번째 목표는 피부 관리였다. 마침 이 시기부터 남성을 위한 메이크업 제품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비비크림부터 파운데이션까지 사용해 보며 마침내 내 치부를 감추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유튜브에 검색만 해도 화장법을 쉽게 알 수 있지만(다슈 모델 故 김종석 님의 영상도 큰 도움이 됐다), '남성 화장법'이라 검색해도 블로그 글 하나 찾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퍼프도 없이 비비크림을 손에 가득 짜서 세수하듯 로션처럼 바르던 당시 내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지어진다.
이 탓에 얼굴이 하얗게 떠 달걀귀신같다는 말도 들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화장법을 알려줄 여자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웬 말라깽이 남자 한 명이 무작정 팔을 걷고 시작한 도전이었으니. 그래도 갈색 물감 같던 비비크림을 내 얼굴에 덧칠해 붉은 자국이 사라질 때면, 마음을 감싸던 암막 커튼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피부도 어쩌면 심리 변화에 영향을 받는 것일까. 이제 얼굴을 가득 채웠던 붉은 여드름 자국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습관이 됐는지 여전히 기초적인 메이크업은 하고 있다. 불모지 같던 남성 메이크업 시장도 올리브영에 자리를 꿰찰 정도로 커진 덕에 내 피부 톤에 맞는 호수도 찾아 자연스럽게 메이크업하고 있다. 뭐 선택지도 많아 봤자 1~3호가 전부지만.
일부 친구들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남자답지 않다거나, 분내가 난다거나, 게이 같다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예전 같았으면 제대로 긁혀(?) 씩씩댔겠지만 지금은 피부 좋아졌다는 말이 긍정적 자아개념을 만들어줬기에 웃어넘긴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에겐남(에스트로겐+남성)이라는 단어도 있으니.
사실 처음 메이크업에 도전할 때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치부를 감추고 싶다는 강인한 의지는 두려움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승기를 펄럭였다. 수없이 나를 갉아먹은 치부를 메이크업이라는 가면으로 감춰 잠시나마 당당해질 수 있다면, "남자가 그게 뭐냐"는 비아냥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옳은 선택이었기에 이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끝없이 언급될 것 같다. 스스로 부정적 자아와 맞서 써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메이크업이 내 핵심 승리 전략이었던 것처럼 승기를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찾아주고 싶다. 또한 지친 마음속 숨어있던, 비로소 자신 있는 나를 발견할 때의 느낌도 가감 없이 말해주며 어깨를 도닥여주고 싶다.
정말 멋있는 당신을 담기엔 여기는 너무 비좁으니 얼른 나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