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차린 생신상, 외면받았습니다

엄마 생신 대작전

by 신비로운별

잠시 걷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7월, 평소였다면 라면을 끓일 때나 향했을 주방에 냄비를 잡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 이유는 매년 딱 한 번 찾아오는 엄마의 생신이었기 때문이다. 늘 말씀하시는 바에 따르면 엄마의 출생신고가 약 1년이나 늦었고, 이에 따라 실제 출생 연도는 1970년 7월이 아닌 1969년 5월이라는 것도 매년 듣는 레퍼토리지만 늘 그래왔듯 공적 문서에 등록된 1970년 7월로 생신을 기념해드리고 있다.


이번 생신은 오랜만에 내가 온전히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에 챙겨드릴 수 있게 됐다. 학교 생활로, 직장 생활로 늦은 저녁에나 겨우 챙겨드릴 수 있었던 엄마의 생신이지만 사직이라는 불효 덕에(?) 아침부터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올해 끓여드리는 미역국은 평소보다 깊은 맛을 내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런 계획이라면 며칠 동안 불조절을 거듭하며 사골이라도 고았을 것 같지만, 라면 하나 끓여 먹는 실력으로 집을 송두리째 불태울 수 없었기에 팩으로 대체했다. 나름 내로라하는 연구원분들이 시중에 내놓는 상품이니 당연히 맛은 의심할 바 없으리라.


여기에 한우 암소 국거리, 미역까지 아침부터 무더위 속 재료 공수를 마친 나는 마침내 사골 소고기 미역국을 위해 냄비를 잡았다.


8인분 미역을 모두 물에 불리고, 양손 평균 60kg 정도 되는 악력으로 물기를 짜냈는데 왠지 미역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걸레 짜듯 물기를 없애는 게 맞나 싶었지만, 모두 냄비에 넣고 들기름, 국간장, 다진 마늘, 소고기와 함께 볶았다. 고기를 굽는 거라 맛있는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국거리라 그런가 고기 냄새는 내 후각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 구워진 고기의 생김새만큼은 꽤 자극적이었다. 나를 위한 미역국이었다면 소고기 하나를 빼먹었겠지만 간신히 참고 사골육수 팩을 넣었다.



열심히 볶은 재료들과 뿌연 사골육수가 만나니 이때부터 맛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골육수를 넣어 미역국을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보니 깊은 맛에 대한 기대 하나로 간을 봤다. 그런데 사골육수 맛도 안 나고 그냥 밍밍한 미역탕(?) 맛이 나더라. 계량 없이 시작한 요리지만 짠맛이 부족한 것 같아 국간장을 몇 바퀴 돌리고 소금도 몇 번 털어 넣는 후보정 작업을 거쳤다. 사골육수에 국간장, 들기름이 들어가니 색은 요상해도 점점 맛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수없이 간을 본 결과 가스레인지의 불을 끌 수 있었다.


마침내 평가의 시간이 찾아왔다. 점심 식사로 미역국을 대접하리라 마음먹었기에 정오에 요리를 끝냈다. 게다가 이번에는 사골육수로 '깊은 맛'을 추가했기에 반응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방에서 미역국 냄새를 맡으셨는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엄마는 미역국을 보더니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은 사로잡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게 돌아온 엄마의 말은 반전이었다.


"여름인데 나가서 추어탕 한 그릇이나 먹을까?"... 든든한 보양식에 패배 선언을 듣고 나니, 내 열정은 가스레인지 불을 끈 뒤 천천히 식고 있는 미역국과도 같았다. 결국 조리를 마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근처 추어탕 맛집에서 초복을 앞두고 보양을 하고 왔다.


보양을 마친 뒤 야속하게도 내 미역국에 대한 무관심은 저녁까지 이어졌고, 결국 미역국의 첫 주인공은 내가 됐다. 속상한 마음에 나라도 얼른 먹어 치우자는 마음으로 데우지도 않고 밥에 말아먹었는데, 내 요리치고 맛있어서 의외였다. 최소한 객관적인 방향으로 평가해 보자면 어디에 팔 맛은 아니지만 먹어줄 만한 정도였다.


그렇게 홀로 미역국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뒤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주방에서 미역국을 담은 냄비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여동생이 마침내 내 미역국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이미 식어버린 마음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을 마시는 척 반응을 살피러 식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의외라는 표정으로 미역국이 맛있었다는 엄마의 식사평이 돌아왔고, 한 주에 몇 마디 섞을까 말까 한 여동생도 맛있다고 해주는 게 아닌가. 엄마는 부모의 마음으로 맛있다고 해줬을지 몰라도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해 놓은 여동생의 저 반응이라면 내 요리가 다행히 괜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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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엄마 생신 대작전은 오묘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는 내 버킷리스트를 위한 한 보의 전진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기부할 수 있는 사람 되기, 결혼식장 신랑 측 좌석에 10명 이상 채울 수 있는 괜찮은 사람 되기 등으로 채워진 내 버킷리스트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해 주기'도 포함돼 있다.


유튜브 같은 곳에서 아내가 먹고 싶다는 음식의 레시피를 공부한 뒤 정성스럽게 요리해 주는 따뜻한 남편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식탁에 사랑하는 사람을 앉혀놓고 따뜻한 밥을 대접했을 때, 잘 먹는 모습과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돌아온다면 요리가 아무리 힘들고 며칠이 소요된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런 꿈은 어릴 적 지켜본 아빠의 영향이 클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의 기억 중 미세하게 남아있는 행복한 면을 들여다볼 때, 아빠는 휴일에 직접 요리에 나섰다.


조리사로 일하시며 수없이 향했던 주방이지만, 휴일에도 가족을 위해 직접 조리 기구를 잡았다. 비록 아빠와 엄마가 먹고 싶은 음식을 두고 의견이 자주 갈렸다고는 하지만, 분명 이런 모습은 내게 좋은 영향을 줬다.


이에 더해 나는 어렸을 때 라면을 정말 좋아했다고 하는데,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엄청 늦은 밤이어도 엄마의 핀잔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라면을 끓여줬다고 한다. 야밤에 또다시 화구 앞에 서서 라면을 끓였을 아빠는 "아빠 최고!"라고 외치며 맛있게 라면을 먹는 내 모습을 바랐던 걸까. 미역국이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서러움이 녹아내린 내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의 아빠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직업적이 아니더라도 요리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주방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며 공부나 하라던 지난날이었기에 나는 제약 없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됐고, 소박한 꿈에 서툴지만 천천히 다가가고 있다. 5년 후, 아니 어쩌면 10년 후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에 나서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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