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 시작된 건가요?

by 신비로운별

한국식 나이 29세, 만 나이로는 28세(최후의 발악이다)가 된 새해를 벌써 한 달이나 보낸 어느 날, 다리를 절뚝이며 정형외과를 찾았다. 몇 주 전부터 걷기 시작하면 오른발 바깥쪽이 인대가 늘어난 듯 아파오는 게 아닌가.


평소 걷는 걸 좋아해서 출퇴근 할 때마다 편도로 40분 정도 소요되는 길을 걸어 다녔는데, 발을 부딪힌 적도 없고 접질린 적도 없는 발이 그냥 갑자기 아파왔다. 병원이라면 죽기 직전이나 죽을 만큼 아플 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일하지 않는 날 쉬면 다시 괜찮아져서 한 주 정도 지나면 자연 치유될 거라는 믿음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늘 엄마가 내게 하는 말처럼 미련한 짓이었을까.


남자가 빨리 죽는 이유, 병원은 필요 없다.


예상외로 자연 치유되지 않았던 발은 2주 동안 일하러 갈 때마다 아팠는데, 이 정도면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판단해서 결국 병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병원에 가기 전날에도 오기가 생긴 건지, 자연 치유에 실패한 몸에 대한 벌이었던 건지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린 1시간 동안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으로 향했었다.


어느덧 몇 년이 흘러 다시 찾은 동네 정형외과. 지난번 무릎이 아팠을 때 하체 운동 부족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셨던 의사 선생님께서 이번에도 내 진료를 봐주셨다. 늘 느끼지만 이 선생님은 눈빛부터 신뢰가 생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을 것 같은 눈에서 약간 과할 정도로 호기심이 느껴지는데, "나는 지금 네 상태가 궁금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만약 의학계에 없던 케이스의 환자가 방문한다면 당장 학술 연구회를 소집해 방대한 양의 논문을 작성하실 것 같은 의욕을 가진 그런 눈빛이다.


이번에도 저 눈빛에 홀려 내 오른발을 내어줬는데, 관우가 독화살을 맞은 팔을 마취 없이 갈라야 하는데도 화타에게 선뜻 내어준 건 이런 느낌이었을까. 의사 선생님은 어느새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발을 눌러보고 계셨다.


엑스레이로 이상 소견이 없었다는 의사 선생님은 보통 이럴 때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라고 하셨다. 발의 힘줄 쪽에 생긴 단순 염증이거나, 통풍이거나. 하지만 아직 통풍이 발현되기에는 젊은 나이기 때문에 아마 염증일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덕분에 긴장과 걱정이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고, 혹시나 통풍 확인차 해본 혈액 검사도 대수롭지 않게 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나를 부르신 의사 선생님의 텐션이 아까와는 다르게 낮아졌다. 아무래도 '나 이 병 알아'라며 눈에 호기심이 사라진 듯했는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결국 진단은 염증이 아닌 통풍이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혈액 검사를 통해 요산 수치를 측정했는데, 통풍 진단을 받을 정도의 수치였다는 것. 정상 수치는 3~4 정도(?)고 통풍의 기준은 7 이상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7.2로 측정됐다. 청천벽력이었다. 흔히 통풍이라면 회식 잦은 아저씨들의 병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아저씨가 됐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차분해서 더 무서운 의사 선생님께서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많이 걸린다고 나를 안심시키며 향후 주의사항을 일러주셨다. 원래는 스님 같은 식단을 유지하는 게 제일 좋지만 그렇게 살면 인생이 재미없다며, 요즘은 먹을 때는 먹으면서도 요산 수치 관리에 힘을 쏟는 추세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꼭 피해야 하는 3가지 음식을 꼽아주셨는데, 그중 첫 번째는 등 푸른 생선이었고, 두 번째는 맥주와 발효주, 세 번째는 내장 음식이었다.


등 푸른 생선은 충격이었다. 몸에 좋아보이는 것이 나한테는 안 좋다니. 그래도 나는 고등어보다 갈치고, 애초에 생선을 잘 안 먹기도 해서 괜찮겠다 싶었다.


이어 요산 수치에 최악이라는 맥주는 작년 통틀어 한 번 마셨나? 여기서 안심했지만 발효주가 발목을 잡았다. 막걸리와 과실주를 좋아해서 혹시 과실주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이 녀석도 안 좋은 것 같더라. 마침 요즘 보해 복분자가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이 미숫가루 막걸리가 진짜 맛있는데....


마지막 내장 음식은 뭐 곱창이나 선지 같은 걸 생각했지만 의외로 내장 위치에 가까운 부위의 육류도 피해야 한다고. 먹지 말라니까 갑자기 양갈비에 쯔란 듬뿍 찍어서 먹고 싶다.


갑작스레 삶에 제약이 생기니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도 자제해야 하는데 완치보다 평생 재발 방지에 힘써야 하는 병이라니.


작년은 특히 건강 관리에 매진했던 해라 더 억울한 것도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저체중이어서 방아깨비, 젓가락, 자벌레 이런 별명만 가득했던 내가 프로틴 보충제를 곁들인 운동으로 겨우 10kg을 증량해 정상 체중을 만들어놨는데... 평소 달리지도 않다가 3km 달리기도 섞으며 유산소도 챙겼는데...


게다가 술은 애초에 선천성 심장병 때문에 잘 마시지도 못하고 작년에는 나름 고시생 신분이라 마신 적이 손에 꼽는다. 평생 담배를 입에 대본 적도 없고 술도 잘 안 마시고, 편의점을 가도 음료수가 아니라 물만 사 마시는 내가 통풍이라니.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는데 점점 병이 늘어가는 걸 보면 차라리 몸에 안 좋다는 것들을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며 억울함이 밀려온다.


사실 아빠도 예전에 통풍에 걸렸던 지라 아들 된 도리로 통풍에 좋은 영양제를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이젠 내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도 검색해보고 있다. 그리고 "늘 채소는 안 먹고 고기랑 음료수만 찾는다"며 아빠에게 향했던 엄마의 잔소리도 이제는 내 맞춤 잔소리로 변형돼서 돌아오고 있다.



도대체 연말에 얼마나 잘 되려고 연초부터 이런 액땜을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게 아홉수가 찾아온 것일까 싶기도 했다. 한국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아홉수'의 기준이 한국식 나이인지, 만 나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준 두 개 중 하나는 충족했으니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억울해도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추운 공기에 그만뒀던 달리기도, 내년 합격을 위한 달리기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 여러분은 모두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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