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함께 사는 사람 이야기
1969년 미국은 세계 최초로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켰다. 그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고 아폴로 우주선을 마구(?) 쏘아대다가 마침내 성공한 것 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은 동족상잔의 아픈 흔적을 덮고 이제 막 개발을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한적한 시골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고,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껑충껑충 뛰어 다닌다는 놀라운 소식을 TV(?)도 아닌 라디오로 전해 들었다. 지금도 깜깜한 밤에 친구들과 학교 정문 앞에 모여 놀다가 미국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는 소식에 ‘세상에 이런 일이’를 외치며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 미국은 이런 놀라운 업적을 쌓으며 사람의 능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대한민국의 공기는 맑고 물은 깨끗했으며 자연은 아름다웠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친구들과 마을 하천(동진강 상류)으로 달려가 해떨어질 때까지 물장구치고, 물고기 잡으며 노는 것이 주 일과였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하루 종일 산으로 들로 하천으로 몰려다니느라 온몸이 새까매졌다. 그러다 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열심히 풀을 베어야 했다. 방학 숙제로 퇴비용 풀을 한 묶음씩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1970년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전주로 옮겨 학교를 다녔다. 전주천도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여름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어 물놀이 하느라 시끌벅적하였다. 그 사이 정부는 국민소득 일 천불 시대를 약속하고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산업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불과 몇 년 사이에 전주천은 더 이상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주천은 오폐수로 가득한 오염의 하천이 되었다.
전주천이 그렇게 버려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매일 무심코 지나던 전주천에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전주천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 맑은 물을 믿을 수 없어서 인지, 아니면 더 좋은 물놀이 시설(수영장이나 워터파크 등)이 만들어져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엔 특별하게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국민소득이 일 만불이 넘으면서 부모들이 시설도 좋고 안전한 워터파크로 그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2000년대 초반 나는 호주의 서부 퍼스에서 2년 동안 파견 근무한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사람의 능력을 뽐내는 대열에 합류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퍼스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엔 그저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 가끔 소나타가 눈에 띄는 정도였지만, 불과 2년이 지나 돌아 올 때쯤엔 국산 자동차가 마치 물반 고기 반처럼 거리를 활보하였고, 가전제품 매장의 중앙에는 우리 한국 제품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전시되고 있었으며, 철광석을 수출하는 그들의 최대 고객이 포항제철이 된 것이다. 또 하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뒷마당의 수영장에서 발견한 사람이 만들어낸 화학공학의 놀라운 힘이었다. 퍼스는 아파트가 별로 없다. 주로 앞마당은 잔디, 뒷마당은 수영장이 있는 주택이다. 호주의 여름은 태양은 뜨겁고 건조해서 한나절이 지나면 수영장의 물이 증발해서 수cm 이상씩 줄어든다. 이 물을 보충하려면 우리가 목욕탕 욕조에 물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4~5 시간이상 수도꼭지를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이런 수영장이 사용하지 않는 긴 겨울동안에 덮개를 덮어 놓아도 빈틈사이로 낙엽이 들어가 쌓이게 된다. 초여름이 되면 덮개를 열고 쌓인 낙엽을 치우는데 이 과정에 수영장 물은 온통 흙탕물로 변한다. 나는 처음엔 물을 다 버리고 청소한 다음 깨끗한 물로 채우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상당한 양의 화학약품과 소금을 쏟아 넣고 여과기(Filter)의 펌프를 돌리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여전히 흙탕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아? 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할 즈음 흙탕물의 색깔이 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니 원래의 맑은 물이 되었다. 요술방망이이자 사람이 만든 화학공학의 승리였다. 그런데 첫해 여름에 그렇게 즐겨 애용했던 이 수영장을 흙탕물이 맑은 물이 되는 화학공학의 요술을 지켜본 두 번째 여름에는 별로 즐기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약인 것인가?
나는 전기에너지를 우리 실생활에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변화하고 제어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공학도이다. 한마디로 태양광, 풍력 등의 전력변환제어 시스템, 전력효율 및 품질개선, 그리고 전기에너지절약 기술 등을 연구하고 개발해왔다. 다시 호주 이야기로 돌아가서 처음 도착한 해 여름 퍼스는 무척 뜨거웠다. 그리고 한낮 최고 온도가 40도C를 육박한 어느 날 정전 사태가 있었다. 에어컨 과다 사용 등으로 전력소비량이 너무 많아 셧 다운된 것이다. 그 다음날 뉴스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모든 언론이 전력회사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었다. 전력 소비량을 미리 예측해서 사전에 발전소의 전력 발전량을 준비하지 못한 무능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에너지 절약을 하지 않는다고 현명하지 못하게 과소비하고 있다고 국민을 훈계하는 우리나라 언론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도 점점 더 풍요로워졌고, 이에 따라 전력사용량 또한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급기야 2011년 1월 담당 장관이 전력공급예비율이 5.7%에 불과하여 셧 다운의 위험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하여 2012년에는 국무총리가 나서서 전기사용자제를 당부하는 대국민담화를 할 정도로 위기가 있었고 사실 지금도 그런 상황이 그렇게 호전되진 않은 채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고, 호주는 전력회사를 나무라고 있다.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민이 원하는 만큼 미리 예측해서 전력을 공급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살펴보아야할 핵심은 우리나라와 호주 또는 다른 나라가 문화적 차이로 어떤 정책을 펼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풍요를 누리면 누릴수록 에너지 사용량은 그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 세계는 이에 맞는 전력공급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으며 그 대가로 따라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급증은 기후위기의 주요인이 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의 대가로 기후위기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위기가 6차 대멸종을 불러와 우리를 사라지게할 거라는 위협이 우리 목을 조르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이제야 세계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인 IPCC 총회를 열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소화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계는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충분하게 공급하고 생산하되,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하지 않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고 개발하는데 온갖 궁리를 다하고 있다. 물론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니 언젠가는 당연히 좋은 방법을 찾아내 해결할 것이다. 그런데 기후위기가 그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편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소비를 줄이는 방안에 대해 우리 모두 진지하게 검토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정책당국자들이나 연구자, 심지어 환경운동가들 조차도 이 소비 절감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풍족하고 얼마나 편리해야 만족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에너지 공급확대 보다는 소비 절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나의 막내 아들은 대학입시의 전선에 뛰어든 고등학교 학생일 때인 십 수 년 전 일이다. 어느 날 거실을 향해 나오는 아들에게 “방에서 나올 때는 전등을 끄고 나오는 것이 어떻겠니?”하였더니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아빠. 그깟 전기요금 얼마나 한다고 그러세요?”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전기요금이 휴대전화 요금 보다 싸니까 말이다. 어려서부터 전등, TV, 냉장고 등이 생활 속에 당연하게 함께 했고, 1인당 GNP가 삼만 불을 넘어 사만 불을 향해가는 풍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에너지 절약이란 그저 ‘찌질 한(?) 구두쇠’의 잔소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1인당 GNP가 사만 불을 넘어 오만 불, 육만 불, 아니 그 넘어 끝을 알 수 없는 풍요만을 향해 달리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약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사람의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하여 주관적인 행복을 계속 조종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는 자신의 풍요를 담보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자신의 세계관과 자아상이 신자유주의의 규율권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살아간다면 기후위기로 대멸종의 참사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 시민들의 투표로 선택되는 국가 지도자들의 정책이나 일반 시민들의 소비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업, 그리고 이들에 종속된 연구 개발자들만으로는 정책 추진 방향이나 기술개발 속도 어느 면에서도 효과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일반 시민인 우리 모두가 현재 누리는 풍요와 편의를 조금 희생해서라도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감소하자고 생각을 바꾸고 이의 실천을 행동으로 옮길 때 가능한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풍요를 위해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세상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의 풍요를 위하여 만들어낸 모든 창조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에게 풍요와 편의를 안겨주었지만, 그 대가로 그의 상응하는 부작용도 안겨주었다. 자동차가 우리에게 시공간의 제약을 풀어 편리함을 가져다 준 대신에 교통사고 등과 같은 각종 문제를 야기하고, 온실가스 배출로 지금 우리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기후위기의 한 요인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는 약 600만 년 전 이 세상에 출현한 이후 생존기간의 99% 이상 동안을 수렵과 채집에 맞추어 살아왔고, 이 훌륭한 유전자를 현대의 우리에게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불과 1%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 했고, 우리의 문화를 만들었으며, 우리의 문명으로 꽃 피워 오늘을 살고 있다. 마침내 우리를 만든 신의 능력을 갖겠다고 바벨탑을 쌓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 로봇과 기후위기라는 바벨탑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도대체 우리가 그동안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 왔기에 이런 시련을 겪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 인간의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을 무분별하게 개발하고 바꾸어도 상관없다는 생각, 바로 인본주의의 세계관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교만한 생각으로 장미 빛 미래의 환상에 빠져 이것이 주목착각의 감정예측 오류에 의한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부정적 미래를 애써 간과해버리는 비합리적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런 희망의 감정예측 오류는 우리가 이렇게 풍요를 누리도록 하는 긍정적 요인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 콩깍지가 쓰여 우리 스스로를 수많은 위기에 빠뜨렸고, 시련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과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생각, 그리고 비합리적인 착각의 오류를 최소화한 이성적・합리적 생각으로 말이다. 이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길을 살펴보고, 성현들의 지혜를 통하여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보편화한 다음 자아상을 재정립하여 스스로 존엄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이 거대하고 위대한 세상 속에서 나도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너도 존엄하고 심지어 우리의 동료 생명체들도 존엄하게 함께 살아가야 이 세상이 비로소 지속가능하고 우리의 미래가 ‘공동선의 좋은 삶’이라는 장미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발 이 세상을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그대로 나뚜라. 참고로 ‘나뚜라(Natura)’는 문화(Culture)의 라틴어 어원이 ‘Cultura’인 것처럼 자연(Nature)의 라틴어 어원이다.
나는 다시 말하지만 전기에너지를 다루는 공학도이고, 우리 모두 전기에너지를 절약해야 한다고, 아니 함께 실천해보자고 이 글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기에너지 절약이든 환경운동이든 결국 우리의 생각이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주제넘게도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가능하면 나 같이 인문학을 잘 모르는 일반 사람들도 SNS의 지식백과처럼 가능한 쉽게 읽고 이해해서 각자 스스로 존엄한 사람이 되어 보자고 이 글 쓰고 있다. 함께 우리의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고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를 ‘공동선의 좋은 삶’으로 만드는데 함께 동참하여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해보자. 마지막으로 내가 쓴 시 ‘나뚜라(Natura)’를 소개하며 ‘세상과 함께 사는 사람 이야기’를 갈무리 한다.
나뚜라
이 성 룡
무위도식(無爲徒食) 갈망하며
문화를 만들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주입하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차별을 만들었지.
마블링 강요하며
빙하가 녹아내리고
북극곰이 굶어 죽어도
상관없어 나만 아니면 되지.
기생충조차도 숙주와
공생을 모색하는데
아이로봇의 창조주는
화성 찾아갈 궁리만하지.
유위도식(有爲徒食) 실천하며
자연과 공생하는
생자공존(生者共存)의 문명전환
나뚜라 (Natu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