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뚜라 06화

2.3 축의 시대_1

2.3.1 베다와 구약

by 이성룡

2.3 축의 시대


지금까지 우리는 약 137억 년에 달하는 우주의 장대한 역사 중 어느 한 점에, 인류가 행운처럼 탄생하여 척박한 지구 환경에서도 파란만장한 진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만물의 영장이 되기까지의 ‘생각의 변화’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의 핵심은 우리 인류가 출현 초기에는 같이 일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 평등사회를 누리다가 어느 순간 사유재산이 생기면서부터 권력의 차이가 생기고 이로 인한 계급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계급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무위도식(無爲徒食)할 수 있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향한 경쟁이 더욱 심화되고, 심지어는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노예제도로까지 더욱 악화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기시대로의 산업 대전환은 소인과 군자 간의 계급 구도에 근본적인 균열을 가져와, 지배계급 중에 명실상부(名實相符)가 아니라 명실상치(名實相馳)의 상태가 되어버린 지배계급이 속출하게 되어, 심지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계급 역전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고 죽이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때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요, 서양은 고대 그리스 시대이다. 이렇게 인류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는 궁극의 어둠에서 방황하는 바로 이 시대에 깊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인류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는 성현 들이 나타났다. BC 500년 경 인도에서는 붓다가,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등장한 것이다. 카를 야스퍼스가 이야기한 축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 무자비한 전쟁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갇힌 인류에게 ‘축의 시대’의 성현들이 인류 초기에 가졌던 상부상조의 생각을 소환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야 될 규범인 ‘덕(德)’을 설파하기에 이른다. 노자와 공자는 덕(德)’을 붓다는 ‘자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를 그리고 예수는 ‘사랑’을 제시하였다. 춘추전국시대 보다 2,000여년이나 더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시기에 쓰여 진 ‘길가메시’를 통해 고대 인류의 삶이나, 철기시대의 삶이나, 화성을 여행할 정도로 발전한 현대의 우리의 삶이나 희망과 용기, 좌절과 두려움, 욕망과 자만 등의 인간 존재의 보편성은 시대를 불문하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기후 위기, 빈부 격차, 전쟁 등의 꼬일 대로 꼬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난제들에 대한 해답을 “축의 시대‘의 성현들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도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이고, 나를 둘러싼 이 세계는 또 무엇이며, 이 세계와 나 즉 자아는 어떤 관계인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축의 시대‘의 성현들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2.3.1. 구약과 베다

오늘날 우리 인류 대부분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문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서양의 ‘구약’과 동양의 ‘베다’이다.[참고 2.5] 우주의 시간으로 살펴보자면 그림 2.1에 보인 BC1500년의 ‘구약과 베다’의 시기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엘리야가 BC900년경에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구약도 아마 베다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 추측된다. 여기서 ‘구약’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일 뿐 아니라 서양을 중심으로 한 우리 인류의 50%이상의 세계관을 형성해왔다. 그리고 ‘베다’는 힌두교와 불교의 뿌리가 되었고, 동양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동양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절반이상의 세계관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한국사람 중에서 ‘구약’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나머지 인류 절반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베다’의 세계관은 매우 낯설다. 이는 우리나라가 근대 이후에 미국식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받아 서양식 세계관에 편중된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식 세계관에 의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국력의 차이가 가져온 자연스러운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당초 비슷한 문화로 4대 문명을 이루고 살던 인류가 어떻게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중심으로 한 서양이 황하문명과 인더스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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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 창세기관련 이미지(출처: google)


먼저 ‘구약’의 시작이자, 세상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는 창세기를 살펴보자.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 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창세기 1장 3절), 또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장 27, 28절),

‘구약’의 창세기를 살펴보면 전지전능하고 무결점, 무오류의 완벽한 창조주가 있고, 자기를 닮은 사람을 만들었으며, 사람을 위해 세상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들의 세계관은 세계와 나를 각각 독립적인 실체로 파악하는 이원론이다. 이러한 서양 사상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헤브라이즘은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에서 예수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기원이 되었고,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의 사유 즉,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져 서양 철학의 기원이 되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은 언뜻 보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 철학과 신에 순종을 강요하는 신본주의적 종교로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이원론으로 세계관을 공유한다. 이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이원화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인간을 위하여 탐구하고, 개발하고, 변형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서양은 자연의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빠른 성장의 역사를 건설하였다.[참고 2.5] 하지만 이러한 서양의 이원론은 인류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태계 교란과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를 초래했고, 인류가 만든 자연의 고통이 인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 왔으며, 학문적으로도 세계를 나와 독립된 개체로 탐구하는 실재론은 근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와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서양의 세계관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한계와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지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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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6. 베다의 순환적 세계관


자 이제 BC1500년의 인도로 여행을 떠나 보자. 그곳 사람들에게는 ‘베다’라는 경전이 있었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 지혜, 앎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식 세계관으로 교육을 받아 ‘베다’가 매우 낯설다. 이글을 쓰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베다’에서부터 힌두교까지 고대 인도인들의 세계관은 참고자료 [참고 2.5]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여기서는 축의 시대 성현들에게로 이어지는 고대 인도인들의 세계관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인도인들은 세계에 대하여 그림 2.6과 같은 거대한 순환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참고 2.5] 먼저 ‘베다’에 투영된 고대 인도인들의 신에 대한 생각이 ‘구약’의 창조주로서의 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구약’의 창조주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유일신론이라면, ‘베다’의 신은 우주의 본질, 질서, 궁극의 진리인 범신론이다. 이 둘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엄청난 관점의 차이를 보인다. 유일신론은 신과 인간을 분절의 관계로 파악하는 반면에 범신론은 신과 인간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한다. ‘구약’의 하느님은 유일무이한 창조주이고, 인간은 그 창조주의 피조물일 뿐이다. 즉 신과 인간은 완전히 달라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베다’의 범신, 즉 브라흐만은 우주의 본질 그 자체인 동시에 개별적인 인간의 참된 자아와 동일시된다. 즉 자아의 참된 본질이 우주의 본질이고, 범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림 2.6의 순환적 세계관으로 돌아가서 고대 인도인들은 우주의 본질, 질서인 범신이 홍수, 가뭄, 질병, 전쟁 등 자연의 질서를 관장한다고 생각하였고, 풍요로운 삶을 원하는 인간은 자연의 질서가 절실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범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제사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 제사는 그 예식이 까다롭고, 전문적이어서 사제인 브라만을 통해서만 범신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 인간들은 브라만에게 제사를 올려달라고 공물을 바치며 부탁할 수밖에 없었고, 사제 그룹인 브라만은 당연하게도 다른 인간들에 비하여 지위가 높아졌다. 이렇게 고대 인도인들은 신이 자연을 움직이고, 신은 브라만이, 브라만은 인간이, 인간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우주 안에서의 모든 존재가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 할 때 우주의 질서가 유지되고, 우주와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환적 세계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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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7. 범아일여 사상


이러한 세계관은 ‘베다’의 한 부속경전으로 BC500년경부터 쓰여 지기 시작한 ‘우파니샤드’에서 철학적으로 체계화된다. ‘구약’의 세계관이 하느님과 피조물로서의 나의 관계가 하느님에 순종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역할과 의무를 고민하는 것이라면, ‘우파니샤드’의 세계관은 궁극의 진리인 우주의 본질과 내 자아의 본질이 어떻게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림 2.7을 보면서 우주와 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 세상 전체로서의 우주, 즉 세계를 고대 인도인들은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이는 나를 기준으로 보면 나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 즉 우주의 질서와 시공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서부터 초월적 능력을 가진 다양한 신까지를 아우른 우주의 본질을 말한다. 이제 나의 외부가 아닌 내부의 세계, 즉 자아 내면의 세계를 ‘아트만’이라 한다. 이는 나의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 즉 ‘브라흐만’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의식’을 말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이 ‘아트만’은 내 신체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이며, 누군가에 의해 생겨나거나 죽는 것이 아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트만’은 감각하거나 인식하는 모든 정신활동인 지능, 기억 등을 말하는 단순한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능이 어느 순간 달라진다고, 옛 기억이 사라졌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나 ‘자신’은 나 ‘자신’ 그대로인 것 이다. 나의 정신 너머에서 내가 세계를 인식 하고, 관조하도록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아트만’이다. 예를 들어 ‘아트만’이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의 등불이라면 이 ‘아트만’에 인식되는 세계는 그 등불이 밝혀주는 그저 그 만큼의 범위이다. ‘아트만’이라는 고정된 등불의 범위 안에 세계가 흘러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트만’의 등불이 어두우면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으로, 우주의 진리를 제대로 모른 채로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한편 등불이 태양처럼 밝으면 우주의 본질 전체를 관조할 수 있게 되어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이 되고,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 이며, 아트만이 바로 브라흐만 이다”라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참고 2.5] 이것이 바로 그림 2.7에 보인 고대 인도인들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그러니 세계를 제대로 관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마음부터 탐색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구약’은 신과 그리고 세계가 나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이 우주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사유하는 신의 세계와 나를 분절한 이원론으로, 이를 토대로 한 서양의 세계관은 세계를 나와 독립된 개체로 탐구하는 실재론이다. 이에 반하여 고대 인도인들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자아가 세계이고 세계가 자아인 일원론이고,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고, 내면이 탄생하는 동시에 세계가 나의 내면세계에 드러난다는 관념론적 세계관이다. ‘베다’에 나타난 고대 인도인들의 순환적 세계관은 ‘우파니샤드’에서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담론으로 체계화되어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으로 이어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사유체계들을 집대성하여 대중화한 것이 힌두교이다.

힌두교는 그림 2.6과 같은 ‘베다’의 순환론적 세계관속에서 우주의 본질, 질서를 깨달아 그림 2.7과 같이 ‘범아일여’가 되도록 노력하는 ‘우파니샤드’의 사유체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체계는 일반 대중이 따르기에 너무 어려워 우주의 본질을 깨닫고자 노력하기 보다는 입에 풀칠하기 바쁜 현실세계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신(브라흐만)에게 의지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에 따라 순환론적 세계관(그림 2.6)의 한 축인 사제 계급인 브라만의 역할과 권한이 중요해졌다. 우주의 본질을 깨닫고자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만, 신에게 기도하는 의식과 절차도 매우 까다로워 브라만에게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초 의도와 달리 브라만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브라만이 타락하여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브라만의 도움을 받아 의식과 제사를 중시하는 전통의 브라흐마나(바라문)에 반발하여 내면의 탐구를 통한 개인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슈라마나(사문)가 지지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깨달음을 위해 명상과 수행에만 전념하고자 현실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되자, 노동력 등의 부족으로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전개된다. ‘우파니샤드’의 ‘슈라마나’가 가진 종교적 사상체계로 인하여 직면한 사회화 문제를 고민한 것이 ‘바가바드기타’라는 경전으로 나타난다. 이 경전은 우리 인간이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선정과 요가, 사회 의무, 그리고 박애를 보상과 영광을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함으로써 개인의 깨달음에 대한 지향과 국가사회에서의 의무를 조화롭게 승화시켰다. 힌두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이 바가바드기타를 집대성하여 깨달음을 위한 탈속과 세속이라는 모순된 가치를 조화롭게 받아들인 종교적 사상체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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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8. 힌두교의 윤회사상


이제 ‘베다’의 순환론적 세계관과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은 힌두교에서 그림 2.8의 윤회사상으로 구체화되고 체계화된다.[참고 2.5] 이 윤회 사상은 그림 2.7의 우주의 본질, 진리(브라흐만)가 바위처럼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2.8에 보인 것처럼 우주의 질서인 다르마(법 法)에 의해 생성, 유지, 소멸의 순환을 영원하게 반복하는 윤회를 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영원히 윤회하는 우주와 ‘범아일여’인 자아(아트만)도 우주의 다르마 안에서 아트만의 카르마(업 業)에 따라 탄생, 삶, 죽음의 순환으로 영원하게 윤회한다. 즉 우주의 본질, 진리(브라흐만)의 윤회를 관장하는 우주의 질서가 다르마(법 法)이고 이에 따라 자아(아트만)의 윤회를 결정하는 것이 카르마(업 業)이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담론이 매우 추상적이어서 오늘날 철학과 과학의 기본 교육을 받은 우리에게도 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옛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고난의 현실에 짓눌린 고대 인도인들에게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힌두교는 일반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를 의인화해서 설명한다. 우주의 본질, 진리라는 추상적인 브라흐만을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격신으로 의인화하여 생성의 신을 브라흐마, 이 세상을 유지하고 구원하는 신을 비슈누, 때가 되면 파괴하고 소멸 시키는 신을 시바로 설명한다. 이 생성, 유지, 소멸의 신은 속세의 고통에 시달리는 고대 인도인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으로 비슈누의 9번째 화신이 붓다이고, 코끼리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시바의 아들 가네샤가 있다. 가네샤의 모습을 한 조각상은 우리도 한번쯤은 봤을 정도로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모시는 인기 있는 신이다. 가네샤가 지혜의 신이자,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는 신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들은 종교적 사상체계의 본질 보다는 속세의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좀 씁쓸하다. 어쨌든 힌두교에는 수많은 신이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신을 선택해서 믿지만 생성(브라흐마), 유지(비슈누), 소멸(시바)의 세 명의 신으로 정리되고,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이 우주의 질서인 다르마에 따라 윤회하는 과정속에서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도 다르마에 따라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이 아트만의 윤회의 과정에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의 모습과 과정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카르마(업)이다. 아트만이 현생을 살아가면서 쌓은 카르마에 따라 업보를 쌓게 되고, 이에 따라 짐승, 인간, 천신의 삶을 반복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트만의 카르마가 우주 궁극의 본질, 질서인 다르마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순환 또는 악순환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자아의 삶의 업보가 우주의 질서에 부합할 때,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합일, 카르마와 다르마의 합일이 일어나는 범아일여가 되어, 이에 따라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 안에서 카르마를 쌓음으로써 비로소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범아일여 사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로 이어져 계승 발전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우리는 ‘축의 시대’ 성현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성현들이 나타나기 바로 전의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구약’과 ‘베다’[그림 2.1 참고]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부터는 서양의 ‘구약’과 동양의 ‘베다’가 각각 ‘축의 시대’ 성현들에게 이어져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고 붓다와 노자, 공자의 생각으로 꽃을 피우고 오늘날의 우리의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 그럼 지금부터 ‘축의 시대’ 성현들을 한분씩 만나러 가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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