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넷플릭스의 최대 흥행작 중의 하나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한 '오징어 게임'이 2023년 11월 현재 ‘오징어 게임 더 첼린지'로 다시 돌아왔다.
이 드라마는 사회・경제적으로 막바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큰 상금이 걸려 있는 게임에 초대한다. 초대된 참가자들은 456명에 이르고, 이들이 총 6개의 어린이 게임을 하게 되며, 게임의 총 상금이 456억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게임이 게임에서 져 탈락하는 순간 바로 사망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것과 게임에 참가한 사람 1명당의 목숨 값이 1억 원으로 책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통과하여 최후의 승자 1인이 되면 총 상금 456억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이 죽음의 게임에 도전한다. 결과적으로 게임에서 탈락한 455명은 게임 중 죽거나 탈락 후 사살 당하고, 최후의 승자인 생존자 1인은 456억을 챙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드라마이다.
이 무지막지한 드라마가 2021년 10월 한국사회 전체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빅 이슈에 함몰된 상황 속에서도 장안의 화제가 되는 것을 넘어 세계적인 화제가 되어 버렸다. 10월 2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월 17일부터 방영된 '오징어 게임'이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넷플릭스의 최대 흥행작으로 떠오르면서 이제 세계적 현상(global phenomenon)이 됐다"고 보도했다. 또 미 경제지 포춘(FORTUNE)은 '오징어 게임'을 지난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방송과 케이블쇼 40개의 시청자 수(18~49세 연령대)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인 전 세계 8200만 명이 시청할 것으로 추산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만든 '오징어 게임'에 무엇이 있기에 전 세계 젊은이 들을 매료시키고 있을까?
10월 1일 자 BBC는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현실사회에 지친 젊은이들의 분노가 비록 세상에서 소외를 받았어도 게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메시지가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게임이 쉬워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는 점과 ‘달고나’ 등 게임이 한국인에게는 향수를, 외국인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점 등의 부가적인 요소도 있긴 하지만, 국내외 여러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핵심 메시지는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가 반영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고 절차가 공정하기만 하면 세상은 정의롭고 건강한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두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 남을 이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게임의 절차가 공정하면 게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은 정의롭지 않아도 무방한가? 왜 모든 국내외의 미디어가 '오징어 게임' 현상을 분석하면서 아무도 이 부분을 다루지 않는 것일까?
이는 마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사회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 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마저도 자본주의 하의 계급사회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현 시스템을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통제 장치가 가동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마치 이미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1899년에 발표한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의 내용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베블런은 이 책에서 비정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쟁취한 자본권력을 가진 유한계급(Leisure Class)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약탈적·금전적인 사회적·문화적 권한을 누리며 노동 없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의 특권을 누리면서, 과시적 소비(가치와 상관없이 값이 비싼 것 선호)와 과시적 여가의 이용을 통해 그들의 약탈능력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문화적·사회적 통제와 정서적·이념적 통제를 하게 되는데, 전자는 애국심·민족주의·군국주의·제국주의 등이고, 후자는 경쟁적 소비주의가 바로 자본주의를 지키는 통제 장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재산의 규모가 사회적 권력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가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경쟁적 소비를 하게 되며 일단 경쟁적 소비의 악순환에 빠지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수입에 상관없이 만성적 불만에 빠지고 금전적 문화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한계급이 무위도식의 특권을 위해 발생하는 각종 정치·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오징어 게임’에서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시 성공한 넷플릭스 드라마로 돌아와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오징어 게임'의 ‘비록 세상에서 소외받은 사람들도 게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현상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상은 자본가의 정서적·이념적 통제에 경고를 하고, 무한경쟁의 적자생존 프레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로 치부해서 인간이 원래 악하다는 부정적인 믿음이 이기적인 사회 구성원을 양산하는 ‘노시보’(nocebo) 효과를 일으키는 현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실제 현실은 코로나19로 다시 조명을 받은 블리츠(Blitz) 현상[세계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에 56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융단폭격을 자행했을 때, 영국국민들이 극도의 공포 상황에서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주의 보다는 오히려 이타주의, 동정심, 관대함 등 인간의 선함이 상승한 현상]에 의해 인간 존엄성 회복의 가능성에 도전해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세상이 아닐까? 우리 다 함께 이러한 정치・사회・경제 전반의 ‘정의’에 대하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위 글은
브런치북 “나뚜라”[https://brunch.co.kr/brunchbook/hyunso2]
[14화] 3.1 가야할 길 : 행복_3
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전문은 [14화]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