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뚜라 22화

4.1 뇌의 가소성

뇌의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

by 이성룡

4.1 뇌의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선천성’에 손을 들어준 윌리엄 헤밀턴, 리처드 도킨스 등의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잠시 의기소침하긴 하였지만, 이는 우리 개개인의 선천적 성격, 성향, 개성 등을 진화학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지 이 우주에서 우리만이 갖고 있는 칸트의 ‘이성’, 니체의 ‘자유 의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아님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마침내 사르트르의 현대철학은 이 두 가지 ‘선천성’과 ‘후천성’을 비롯하여 니체의 ‘우연과 필연’까지 모두를 아울러서 “인간이라면 처할 수밖에 없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인간이라면 삶을 살면서 첫째, 결정론 즉, 선천적이든 살아가는 도중에든 우연히 나에게 주어졌으나 내 마음대로 바꾸기 힘든 나의 상황과 둘째, 비결정론 즉, 첫째의 결정론적인 상황 속에서 나의 선택으로, 나의 자유의지로 나의 삶을 만드는 상황의 이중성에 처해서 매순간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연하게 주어졌지만 한번 사는 삶을 결정론적인 상황대로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한번 사는 삶을 최선을 다해서 나의 자유의지로 나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의 인생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해야하는가는 이미 우린 알고 있다.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라 하였다. 즉 인간은 매순간 닥치는 상황에 따라 ‘자유의지’로 선택과 행동을 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과 행동에 대한 본질이 없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준이 없을 뿐 아니라 매순간 자신의 ‘자유의지’말고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근거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안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참고 3.27] 한마디로 우리가 매순간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선택과 행동에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는데, 이런 선택과 행동에 대한 정답이 없기 때문에 매순간의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우리의 삶을 ‘자유라는 형벌’의 늪에 빠뜨릴 수도 있고, 가치 있고 존엄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자유의지’가 매순간 노자의 도(道), 즉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모습을 따르는 ‘범아일여’의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선의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같은 범인이 달성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마이클 샌델의 ‘공동선의 좋은 삶’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다이엘 카너먼의 시스템2가 활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자유의지’는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기소침하고 있을 때, ‘뇌의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을 찾아냈다. 한마디로 우리의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뉴런들이 이미 연결되어 회로패턴을 형성한 상황에서도 인상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회로패턴을 형성하는 가변적 유연 프로그램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행동결정론(Behavioral Determinism)의 사슬에서 벗어나 우리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가치 있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개과천선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게랄트 휘터의 저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참고 2.10]과 케네스 밀러의 저서 “인간의 본능”2.3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뇌의 가소성을 통한 우리의 생각, 우리의 ‘자유의지’, 즉 ‘자아상’을 정립하고 또 살아나가면서 이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그림 4.1에 내 나름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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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 뇌의 행동 패턴 플로우챠트


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는 “모든 뇌는 출생 이후 특정한 환경과 그 안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신경망을 형성해 간다. 이를 통해 본래 종이 지닌 특유의 행동양식을 생존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적응시킬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뇌의 학습능력은 끊임없이 변화해서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동물들의 진화과정에서 다양하게 발달하였고, 그 중에서도 인간은 뇌의 학습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나게 진화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그 학습능력을 유지하는 최고의 영장류이다. 이러한 학습능력을 가진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뇌의 행동 패턴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도식화한 것이 그림 4.1이다. 게랄트 휘터에 의하면 우리가 태어나서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인간의 뇌는 일반 동물들과 구조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대체로 동물들은 각자 특성에 맞게 유전학적으로 정해진 특정한 뇌신경의 연결 패턴, 즉 자동화 프로그램을 갖고 태어나 이 프로그램에 의해 행동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은 태어나서 특별하게 학습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각자의 자동화 프로그램에 의해 고등어는 고등어로, 사슴은 사슴으로, 참새는 참새로 자신에 맞게 살아간다. 물론 일부 포유동물의 경우 태어나서부터 어떤 특정기간 동안은 자신의 고유 행동패턴이 유연하고 가변적이어서 이 시기에 어미의 양육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사항들을 학습하고, 이에 맞게 뉴런이 연결되고 회로패턴을 형성한다. 이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예시가 멧돼지 실험이다. 야생의 멧돼지 새끼를 집돼지 우리에 넣고 집돼지의 젖을 먹이고, 집돼지 새끼들과 같이 자라게 하면 이 멧돼지는 야생 멧돼지가 아니라 집돼지로 학습을 받았기 때문에 집돼지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더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려서 읽었던 동화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말이다. 이상과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동화 프로그램, 또는 일부 멧돼지처럼 이러한 자동화 프로그램에 더하여 최소한의 생존전략을 학습하는 정도에 의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하게 본능에 충실해서 살아가는 일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최소한의 자동화 프로그램만을 가지고 태어난다. 생존에 필수적인 밥 달라고 우는 정도의 자동화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뇌의 회로패턴이 가변적이고, 유연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성장기 뇌의 발달단계에서 뿐 아니라 평생에 걸쳐 새로운 경험과 학습을 토대로 뉴런이 연결되고 회로패턴이 형성되면서 발달하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지속적인 학습을 통하여 새로운 회로패턴이 계속 형성되어 엄청난 정보처리 능력을 갖지만, 이를 위해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멍 때리는 상황에도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20% 정도를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참고 2.10]

따라서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원하는 정보처리 능력을 유지하면서도 가능한 한 뇌의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게랄트 휘터는 이를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한다. 우주에서는 외부의 어떤 조작 없이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 얼음을 상온 상태에 두면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고체에서 액체로 그리고 결국에는 기화되어 기체로 산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물질은 고체 보다는 액체, 액체 보다는 기체가 분자 배열의 무질서 정도가 더 크다. 따라서 우주의 변화는 언제나 무질서도(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이때 발생되는 에너지는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이다. 이처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세상의 현상들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항상 평형상태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분배되는데, 이러한 분배는 언제나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비가역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이다. 예를 들면 미끄럼틀위의 아이가 가만히 있어도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게 되는데, 이 현상은 미끄럼틀의 높이에 의한 위치에너지가 아이를 자동으로 내려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실제로 활용한 에너지인 운동에너지와 우리가 활용할 수 없는 마찰에 의한 소리에너지, 열에너지 등으로 변환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된다. 또 우리가 유용하게 이용하는 자동차는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운동에너지를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엔진에서 발생하는 열, 소음 등의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 즉 엔트로피를 증가 시킨다. 엔트로피의 총량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할수록, 그리고 그 과정이 복잡할수록 많아질 뿐 아니라, 역으로 엔트로피를 감소시켜 다시 화석연료를 만들어 낼 수 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풍요롭게 살면 살수록 기후위기라는 부작용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지구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대재앙이 우리 인류 앞에 들이닥칠 것이 뻔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물질적인 풍요 대신에 정신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엔트로피를 적게 발생시키는 생활을 모색해야 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어마어마한 정보처리를 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뇌 또한 엔트로피를 감소시켜야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받고, 한정된 에너지로 효율적인 정보처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혈액을 통해 뇌에 공급되는 포도당과 산소 형태의 한정된 에너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가 뇌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최소화를 위하여 그림 4.1에 보인 것처럼 ‘단순화’와 ‘일관성’의 생존전략으로 진화 해왔다. 먼저, ‘단순화’는 크게 ‘자동화’와 ‘문제회피 전략’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자동화’는 한마디로 단순 반복과 같은 단일행동, 예를 들면 걸음을 걷는 것과 같은 행동은 뇌에서 특별한 정보처리 없이 즉 에너지 소비 없이 자동화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적으로 수행하도록 상위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다음 ‘문제회피 전략’은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새로운 학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에너지 소비량은 급격하게 증가하기 때문에 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감정의 억압, 기분 전환, 심지어 상황을 회피하고 부정하기까지 하는 전략을 말한다. 누군가에게 쫓기던 닭이 극단의 궁지에 몰리면 갑자기 머리를 땅에 묻고 멈춰버리는 상황회피 행동을 한다든가, 누군가의 선동(demagogue) 또는 피싱(pishing)에 쉽게 넘어가는 것, 그리고 TV시청, 쇼핑, 스포츠 관람 등이 뇌의 에너지 최소화를 위한 ‘문제회피 전략’의 예시들이다. 이러한 상황 회피 전략은 뇌의 에너지 최소화와 생존에 매우 유용한 전략이지만, 카너먼이 이야기하는 시스템2의 작동을 게을리 하게 만들어 우리를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과 착각의 오류에 빠지게 하는 부작용도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뇌의 두 번째 생존전략인 ‘일관성’이다. 우리의 뇌는 수없이 많고 다양한 단일 생각과 행동들을 조정하고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소위 사고방식과 태도라 일컫는 상위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한다. 이러한 행동패턴들은 이들보다 상위의 행동패턴에 의해 조정되고, 이러한 행동패턴들의 최상위 행동패턴이 ‘자아상’이다. 바로 이 ‘자아상’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지표가 되고, 나침판이 되어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에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수많은 행동패턴들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매번 그 상황에 맞는 최적의 대응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 보다 ‘자아상’에 따라 일관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의 에너지 소비를 훨씬 작게 하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아상’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사고방식과 태도를 결정하고 조정하는 나침판이요 표상이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우리를 존엄하게도, 그렇지 않게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아상’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게랄트 휘터는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주로 부모)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 얻는 경험으로 소속감을 갖게 되고, 생후 2년 정도가 되면 이를 기반으로 하는 ‘자아상’을 형성하게 되며, 이 소속감에 대한 긍정적 경험이 이타심, 사랑으로 발전하여 이를 자신의 ‘자아상’에 소중하게 새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계속해서 뇌 형성 초기 단계 까지 자아상 형태의 경험에 추가되어 업그레이드되는데, ‘소속감’ 뿐 아니라 이 소속감을 기반으로 개인이 성장하는 경험을 통해 ‘자율성’도 함께 ‘자아상’을 형성하며 한 인간의 인격, 즉 존엄성으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이다.

다시 그림 4.1로 돌아가서 우리의 뇌가 에너지 최소화의 생존전략으로 취하게 된 ‘단순화’와 ‘일관성’의 전략 중에서 자동화와 문제 회피 같은 ‘단순화’ 전략은 특별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림 4.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삶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자동화와 문제 회피 전략을 구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일관성’은 우리에게 처해진 상황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고 자신에게 형성된 ‘자아상’에 따라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일관되게 처리하도록 조정함으로서 에너지를 최소화 하는 전략이다. 정리하자면 우리의 뇌는 살면서 매순간 ‘단순화’로 처리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는 상황들은 ‘자아상’에 의해 조정되어 일관성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불행하게도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개개인의 목적과 의지를 각자 실현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전쟁터 같은 세상이어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한정된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는 ‘적자생존의 경쟁’과 둘째,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 받아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경험’이다. 이는 아서 쾨슬러가 “진화의 그릇된 방향”이라고 한탄할 만큼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하는 경험이자, 처참하게 고통스러운 대상화의 경험이다. 우리가 이런 대상화의 경험을 하게 되면, ‘자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더구나 아직 ‘자아상’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청소년 아이들이라면 영향이 너무 커서 그림 4.1에서 보인바와 같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반사’하거나 ‘스스로 자기비하’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먼저 ‘반사’는 상대가 나에게 했던 그대로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을 똑같이 수단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향한 기본 욕구를 억제하고 주체성과 자유 욕구를 스스로 통제하면서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자생존의 대열에 합류하여 목표 달성을 위해 결국은 타인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한편, ‘스스로 자기비하’는 현재의 상황이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내 탓이고 나는 사랑 받을 자격도 없으며, 모든 것이 내가 못나고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스스로 자기비하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스스로 타인의 평가대상으로 만들어 버려 자율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우리가 이런 고통스러운 대상화의 경험을 하게 되면, 그동안 잘 가꾸어온 ‘자아상’은 송두리째 흔들려 누군가는 애정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주체성과 자유의 욕구를 통제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전자의 경우,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의지와 노력을 경주하고, 반면 후자의 경우, 자신이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대상화의 경험이 초기에 상부상조하며 평등하게 살아가던 우리 인류를 서로 다른 사회 속에서 형성된 자아상과 세계관이 서로 만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기반으로 느낀 연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타심(사랑) 보다는 풍요로워 질수록 오히려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대한 욕망에 편승해서 자율성이라는 본능이 강력하게 표출된 이기심으로 중무장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무자비한 폭력과 전쟁을 반복해왔고 현대에 이를수록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를 6차 대멸종으로 이끌 수도 있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첫째 개인적으로는 우리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시키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우리의 윤리와 도덕적 가치를 재건하고, 사회적으로는 마이클 센델의 “공동선의 좋은 삶”의 시스템으로 프레이밍을 구축하고 ‘자아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자아상’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도록 사회가 기다려주고, 이에 상응하는 교육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아상’이 이미 형성되었거나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대상화의 경험에 부딪치게 되고 이때마다 ‘반사’를 통한 이기심을 극대화하거나, ‘스스로 자기비하’를 함으로서 자율성을 상실하여 누군가의 예스맨(Yes man)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삶의 과정 중에 그림 4.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자신이 가진 신념, 자아상, 세계관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계기를 맞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실패’와 ‘만남’이다. 게랄트 휘터는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공동체를 조직하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인지하는 한 가지에 주의력을 집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 인간은 수직적・수평적인 학습을 통하여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을 학습하고, 여기에 개개인의 직접 체험을 통한 경험을 더하여 각자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신념, 즉 ‘자아상’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개개인이 형성하는 자아상과 신념은 반드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형성한 자아상과 신념에 의해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아상과 신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스스로 인지하고 깨닫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의 과정 중에 ‘실패’를 경험하거나 더 훌륭하고 완벽한 지식 또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인식하게 되고 이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실패’를 통한 신념의 한계 극복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을 추진하다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실패의 쓴 맛을 보면 자신의 신념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쓰라린 실패를 교훈 삼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생산적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실패는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고통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보통은 이런 실패의 상황을 애써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우리 뇌의 에너지 최소화 전략의 하나인 ‘문제 회피 전략’이 작동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어떤 신자가 사회도덕과 맞닥뜨려 자신의 왜곡된 신념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빠져나오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믿음이 약해서라고 자책하며 오히려 사이비 종교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 상황을 회피하고 지금까지처럼 그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지금의 신념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념을 지속적으로 강화 하려고 노력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만남’을 통한 신념의 한계 극복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 보다 훨씬 훌륭하고 완전한 타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상과 세계관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확장하게 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들이 각자의 삶을 살다가 예수를 만나 새로운 자아상과 세계관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만남’이 ‘실패’ 보다 신념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는 도덕적・사상적으로 훌륭한 지혜를 가진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각자 자신들의 개별화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된 신념이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믿기 시작할 때,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기이하고 때로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실패’의 고통,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과 다른 신념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신념과 선택에 물음표를 던지고 그림 4.1의 행동패턴처럼 자신의 자아상에 반영해 나가는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요 철학적 근간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신념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바라봄으로서, 지난 세기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하나의 신념을 밀어 붙이려는 전체주의적 통치는 마침내 힘을 잃게 되었고, 전쟁과 억압을 통해 전체주의적 세계관과 자아상을 주입시키려는 끔찍한 시도들은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고 우리는 UN에 모여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가치 있고 공동선의 좋은 삶을 함께 누리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이런 ‘실패’와 ‘만남’의 신념한계 극복 과정을 통해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아상’을 계속 수정・보완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우리가 이미 ‘자아상’을 견고하게 형성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뇌는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을 갖고 있어서 ‘실패’와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면 우리의 ‘자아상’을 얼마든지 수정・보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상’을 수정・보완하여 ‘존엄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적자생존’의 굴레에서 계속 허덕일 것인지는 한마디로 ‘실패’와 ‘만남’의 임팩트, 그리고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은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의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자유로운 능력이 아니라 생물학적 유전에 좌우되는 능력이다.”라는 주장과 ‘이기적 유전자’의 리차드 도킨스와 같은 진화심리학자들의 행동결정론(Behavioral Determination)으로는 우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로부터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아이러니하게도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의 힉스 메커니즘(Higgs Mechanism)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시작되었다.[참고 2.3] 앤더슨은 이 공로로 1977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모든 과학은 물질과 에너지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행동결정론의 개념이 물질 안으로 들어가 소립자의 양자 수준에서는 전혀 맞지 않고 오히려 비 결정론적 본질을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립자의 비 결정론적 본질에 대한 영감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신경과학자 피터 올릭 체의 “자유의지의 신경기반”에서 우리의 뇌가 가소성을 갖고 있음을 밝히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의 자유 의지를 설명하기에 이른다. 피터 올릭 체는 우리의 뇌는 시냅스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뉴런들의 회로 연결패턴은 각 신경세포들의 흥분 패턴 보다는 시냅스들의 상태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뇌의 신경활동 그 자체에 의해서 두 신경 세포사이의 연결과 양쪽 시냅스의 강도와 감도가 급속하게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경활동에 의해 우리의 뇌는 ‘하드웨어’를 수정할 수 있는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을 갖게 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자신의 뇌의 행동방식을 실제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피터 올릭 체는 이러한 뇌의 가소성으로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단계 신경 세포 모형(three-stage neuronal model)’을 제안 하였다.[참고 2.3]


1단계 : ‘실패’나 ‘만남’과 같이 일상적이지 않고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이에 대응하는 정신적 처리과정에 반응한 시냅스에 의해 신경 네트워크의 급속한 재설정(resetting).

2단계 : 재설정된 네트워크의 기준에 따라 뇌의 신경활동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입력들을 처리.

3단계 : 재설정된 네트워크가 안정화 되어 더 이상 이 기준에 따라 흥분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


피터 올릭 체는 이상과 같은 ‘3단계 신경 세포 모형’에서 처음 1, 2단계에서는 무작위성이 발생하여 새로운 패턴의 신경 흥분을 생성하는데 역할을 하지만, 3단계에 이르면 1, 2단계에서 형성된 새로운 신경세포 회로패턴이 안정화 되어 행동결정론 적인 반응에 의하여 신경 네트워크를 지배하게 된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기준인과작용(criterial causation)이라 하였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대한 뇌의 행동 패턴을 잘 설명해줄 뿐 아니라 삶의 과정 중에 맞닥뜨리는 ‘실패’와 ‘만남’의 이례적이고 임팩트 있는 경험에 따라 우리의 ‘자아상’을 수정・보완하고 더 나아가서 재설정을 통해 스스로 개과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뒷받침 해준다.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역사와 축의 시대 성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적어도 정답은 아닐지라도 해답은 알고 있다. 우리의 소중한 삶의 가치와 함께 어울려 사는 이 세상 속에서 마이클 센델의 ‘공동선의 좋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각자 ‘존엄성’을 회복한 ‘자아상’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림 4.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뇌 형성 초기 단계인 유아, 청소년기에 좋은 보육 환경과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이미 적자생존의 경쟁과 남에게 이용당하는 대상화의 쓰라린 경험 등을 통해 피폐해진 ‘자아상’을 좋은 ‘만남’을 통해 존엄성을 가진 ‘자아상’으로 수정・보완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장려하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혼자의 힘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구성원 개개인이 이를 지향하며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절에서 같이 의논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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