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유전자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 인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렇게 살아오는 과정에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하여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전반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럼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살펴보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에 대한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things-in-itself)처럼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생각, 의지, 인성 등은 본질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세월에 따라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완전무결한 진리의 정답은 규정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작정 손 놓고 앉아서 아무대책 없이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기후 위기가 되었든, 신자유주의의 극단화로 인한 핵전쟁이 되었든, 무엇이든 인류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에 의한 6차 대멸종이 도래할 것이고, 최상위 포식자인 우리 인류가 멸종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 또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우리의 좋은 삶을 공존할 수 있는 해답을 찾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할 때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그동안 이룩해놓은 풍요와 번영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2022년 11월 20일,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가 기후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지구평균 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1.5도 이하로 묶어 둔다는 목표를 재확인하면서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말잔치만 무성하였지 이 당면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뚜렷한 대책 하나 제대로 합의하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6차 대멸종으로 우리 인류가 멸종될지도 모르는 이 거대한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마치 가스레인지 불판 위에 놓인 냄비 안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는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룩했고, 앞으로도 더욱 번창시킬 풍요와 번영을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다. 아니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해법을 알면서도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UN 회원국 각국의 리더들은 그렇다하더라도 각국의 시민인 우리는 어떤가? 정부가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미적거리기만 한다고 폼 나게 비판하고, 1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예쁜 텀블러 하나 들고 다니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담론을 안주삼아 수다만 떠들어대면 충분한가? 물론 이러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고 의미 있는 노력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핵심, 즉 지속적이고 한계가 없는 우리의 욕망 때문에 부족하지 않게 지니고서도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 “풍요와 번영”에 대한 생각을 일정부분 내려놓고, 이를 정책으로 반영할 리더를 찾아 지지・선택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랄트 휘터의 말처럼 “우리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뜬금없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어릴 때 뒷동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다가 밤이 되면 풀밭에 누어서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사실 이 북두칠성은 다른 별빛에 비하여 밝고 뚜렷해서 우리 인류는 이를 항해의 길잡이로 이용하였으며, 시간을 측정하여 농사에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한국의 민간 신앙에서는 칠성은 비, 수명, 인간의 운명 등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 칠성단을 쌓고 북두칠성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참고 2.12] 이렇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생각하고, 신으로 받들어 모시며, 우주를 떠 올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스스로 분석하는 생명체는 단 하나 우리 인간밖에 없다. 우리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 혈통, 구조 등이 하나로 이어지지만 별빛에 이야기를 담고 우주의 미스터리에 답을 추구하는 존재는 오직 우리 인간뿐이다. 우리 인류에게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옛날부터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인류의 기원이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라는 이야기도,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 이야기도, 고조선의 단군 할아버지 이야기도 있었다.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과 가치를 보여 주었고, 우리 인류를 다른 생명체와 분명하게 차별화시켜주었다. 하지만 나는 성인이 다 되어서야 내가 바라보는 북두칠성의 빛이 이미 400년 이상 지난 빛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먼 우주 저편에서 400년 전에 발생한 빛을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바라보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 앞의 세상이 우리의 이야기대로 우리에게 해석된 세상이란 걸 보여준다. 마치 우리가 다른 생명체는 하지 않는 행동 중의 하나, 즉 형형색색의 옷감으로 다양하게 디자인한 옷으로 자신의 원래 몸을 포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이야기는 우연히 마주친 타인의 미소와 그와의 악수가 포장되어 꾸며진 것은 아닌지를 걱정해야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버렸다. 옷을 걸치는 것이 처음엔 거친 환경과 추위로 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에서 출발했을 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능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우리 앞의 이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 난개발해서 우리의 풍요로운 놀이터로 만들고 마음껏 놀 수 있게 세상을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풍요를 누리면 누릴수록 마음은 피폐해져 정신병원의 수도 같이 늘어나고, 세상의 질서는 파괴되어 기후위기를 자초해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생각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멈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미를 따르고 실천해서 세상과 조화롭게 공동선의 좋은 삶을 살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 주는 걸 어떡하라고? 지난 600만년 동안 적자생존의 경쟁과 무위도식의 욕망으로 이렇게 진화 해버렸는데 이제 와서 어쩌자고? 하며 볼멘소리가 나올만하다. 이것이 가능했으면 예수의 ‘사랑’, 붓다의 ‘자비’, 공자의 ‘인’을 그 옛날에 실천해서 노예제도도 없었을 것이고, 춘추전국시대도 없었을 것이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아수라장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은 최근의 진화학자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면 더욱 암울해진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선천적이냐? 아니면 후천적이냐?’에 대한 분석에서 ‘선천성’에 손을 들어 주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런 의지가 없었는데, 내 유전자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요.’라고 해버린 것이다. 윌리엄 해밀턴은 적자생존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진화가 어떻게 개미나 벌과 같이 집단의 생존에 헌신하는 사회적 곤충의 탄생을 이끌어 냈는지에 대하여 혈연선택(kin selection) 이론으로 설명한다. 해밀턴은 이 이론을 간단한 규칙으로 정리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참고 2.3]
B × r > C
여기서 B는 수혜자의 이득, r은 혈연관계, 그리고 C는 행위자의 비용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해밀턴의 혈연선택 이론은 어떤 개체의 행위자가 가족이나 동료(수혜자)를 위해 투입해야하는 에너지와 비용, 즉 행위자의 비용(C) 보다 이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의 이득(B)에 두 개체사이의 혈연관계(r)를 곱한 값이 더 크다면 행위자가 기꺼이 이타적 행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행동이 진화의 자연선택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사회성 곤충인 벌과 개미는 혈연관계(r)가 0.75(유전자 75% 공유)인데 반하여, 인간을 포함한 척추동물은 부모 자식의 혈연관계(r)가 겨우 0.5(유전자 50% 공유)이고, 사촌일 경우 0.125로 급격하게 감소한다. 이 혈연선택 이론에 의해 우리는 개미나 일벌들이 집단을 위해 이타적 행동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설명할 수 있으며, 우리 인간이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을 제외(그래도 혈연관계가 0.5는 되니까)하고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통한 사회의 효율성을 희생하는 대신 개인의 자유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당초 우리 인류는 이 세상에 출현한 600만 여 년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모계 부족사회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상부상조하면서 평등한 세상을 살았다. 물론 이는 케네스 밀러의 말처럼 그 당시 개인 혼자의 힘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척박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생존(사냥과 채집)과 번식(출산과 육아)에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집단화로 생존에 성공하였고, 이렇게 훌륭한 유전자를 오늘날의 인류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불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어 풍요로워지면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유재산이 생기고 이로 인한 권력의 차이는 계급사회로 변모하면서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에 대한 욕망은 자연스럽게 사회집단이 아닌 개인 자신의 존재의 근거와 지속을 ‘혈연’에서 찾았고 이는 후에 종법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해밀턴의 혈연선택이론은 이러한 우리 이야기의 근거 중의 하나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이러한 부와 권력의 차이는 풍요로워질수록 더욱 커져 혈연 중심의 계급사회를 고착화 시켜버렸고, 이후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 이르기 까지 우리 인류 생존기간의 불과 1%도 안 되는 동안에 이타심기반의 소속감을 통한 사회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진화의 키워드 ‘생존과 번식’에서 ‘생존’을 위해 우리는 경제적 풍요와 차별화를 추구하고, ‘번식’을 위해 질투심이 유발된다고 설명한다.[참고 2.3] 여기서 질투심의 유발 요인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데, 남성의 경우 자신의 혈통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 여성의 성적인 부정행동에서 질투심이 유발되고, 여성의 경우 출산 후 양육에 남성의 지원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 남성이 성적인 부정행동을 하는가 보다는 또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는가가 질투심 유발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의 숭고하고 낭만적인 사랑이 ‘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지시이고, 이에 따른 질투심마저도 남성과 여성의 처해진 상황에 따라 이기적인 유전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낸 사랑(思郞)이라는 단어조차도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心)이 돈(田)을 떠받들고 있는 이기적인 생각(思)인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어? 참 당혹스럽고 서글프다. 그런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우리의 이런 심정에 대못을 박아 버린다. 너희들 이성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우쭐대는데, 사실 너네 그렇게 사는 것이 다 이기적 유전자가 시킨 것이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도덕적 가치관은 집단 속에서 살기 위한 선택에 의해 다듬어진 본능적인 행동 패턴일 뿐 이라는 것이다. 즉 예술은 짝을 유혹하기 위해, 이타주의는 이기적인 이유로 실천되는 것이며, 진리는 알 수 없는 실재와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이에 따라 리처드 도킨스는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자.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제안하기에 이른다.[참고 2.3]
도킨스의 이 말이 중요한 것이 우리는 진화심리학자들 말대로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유전자의 지시대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여 그저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고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들도 이어지고 있다. 마크 하우저는 그의 저서 ‘도덕적 마음(Moral Minds)’에서 진화심리학이 인간 도덕성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Daly와 Wilson은 인간의 영아 살해에 대한 통계학 연구에서 미취학 아동이 계부에 맞아 죽을 확률이 친부에게 맞아 죽을 확률 보다 120배나 높은 것으로 발표하였다.[참고 2.3] 이것은 데이비드 버스가 발표한 ‘번식’ 전략에 있어서 남성의 질투에 부합하는 결론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계부에 의한 영아 살해 발생 비율은 0.04% 미만으로 나타나, 실제 현실 생활에서 데이비드 버스와 Daly의 발표와 달리 진화압이 극도로 낮은 이유를 진화심리학이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인류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여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의 신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종교적 사회집단화를 통한 우정과 사랑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행복한 삶의 모습, 즉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관계, 연대)’와 ‘맛있는 음식(풍요)’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풍요)’에만 우리가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공동선의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의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자.”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고 있는 유일하고 능력 있는 생명체일 뿐 아니라 우리의 뇌는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이 있음을 인식하고, 우리의 생각을 스스로 변화시켜 존엄성을 회복하고 노자의 상선약수, 사르트르의 연대를 기반으로 마이클 샌델의 ‘공동선의 좋은 삶’을 구축하도록 함께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