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가치있는 삶
3.2.4. 가치 있는 삶
우리의 행복을 향상시키고 삶의 만족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으로 영국의 한 일간지가 10가지 행동 지침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참고 3.11] 1. 베푼다. 2. 사람 관계를 중시한다, 3. 운동한다. 4. 감사한다. 5. 도전한다. 6. 목표를 설정한다. 7. 회복력을 가진다. 8.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9. 자신을 받아들인다. 10.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의미를 찾는다. 사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내용이고, 우리도 평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문제는 윌딩거의 말대로 우리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을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행복이 어떻고 불행이 어떻고 삶의 만족도가 어떻고 하면서 불만투성이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일이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까지 행복한 삶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내용을 검토하였지만, 10.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부터는 행복한 삶에 대하여 ‘풍요’만이 아닌 ‘가치’가 가지는 의미를 진지하게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스티브 잡스가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남긴 말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애플의 창업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스티브 잡스는 본인 스스로도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고 자부할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 신화를 쓴 사람이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기업 애플과 막대한 재물을 남겨두고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가 좋아하는 사업에만 매진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일은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진정한 만족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둘러보아라. 포기하면 안 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정말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좋아했던 것 같다. 이렇게 일을 사랑하고 일 밖에 모르던 잡스가 자기 일을 성공적으로 성취하고 세상을 그의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운명의 여신이 그를 찾아왔다. 잡스는 성공한 인생의 정점에서 세계적인 기업의 총수라는 권력과 기술,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력으로도 병마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차분하게 병상에 누워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에게 남겼다. “지금 병든 상태로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이 많다는 건 결국 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죽음을 앞둔 이제야 저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얻은 재산을 나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저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중략... 가족, 친구,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세요.” 잡스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가치’와 ‘사랑’을 이야기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임종을 앞두고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거나 진실 된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잡스는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 앞에서 얻은 결론이 행복하고 좋은 삶에 풍요(재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풍요(재산)는 생을 유지할 정도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가치 있는 일’과 ‘좋은 관계(사랑)’로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잡스는 ‘내가 있고, 그 앞에 세상이 있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실재론으로 그의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았고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었으며, 막대한 재산도 벌어들였다. 그리고 잡스는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잡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을 때 불행하게도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 엄청난 충격 속에서 평범하지만 모두 잊고 사는 진리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일군 기업도, 재력도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도 아무것도 죽은 이후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잡스는 아마도 ‘내가 이 세상이고, 세상이 바로 나’라는 범아일여의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내가 세상을 내 생각대로 만들어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진리와 질서에 따라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가치 있는 일이란 최소한 잡스가 생각했던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면 당연히 만족감(행복)을 가질 수 는 있을 것이나, 이것이 항상 세상의 진리와 질서에 따른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지금부터 함께 이 부분을 고민해 보도록 하자.
가치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생각하다가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유투브 등 sns에 떠돌아다니는 할아버지와 소년의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어느 날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삶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대답대신 돌 하나를 소년에게 주면서 시장에 가서 팔아보라고 한다. 이때 “누가 값을 물어 보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손가락 2개를 펴 보여라.”라고 하였다. 소년이 시장에 가니 한 여성이 “이 돌 정원에 두면 좋겠다. 얼마니?”하고 물었다. 소년이 말없이 손가락 2개를 들어 보이자 그 여성이 “2달러라고? 좋아.”하면서 돌을 사갔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할아버지가 또 돌을 주면서 이제는 박물관으로 가서 같은 방법으로 팔아 보라 하였다. 이번엔 박물관 학예사가 “연구가치가 있어 보인다. 얼마니?”하고 물었다. 소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손가락 2개를 들어 보였고, 학예사는 200달러를 주었다. 소년이 깜짝 놀라 집에 달려가자 할아버지는 마지막 돌을 주면서 이제는 보석 원석매장으로 가서 같은 방법으로 팔아 보라 하였다. 원석매장 주인은 “굉장히 귀한 돌이구나. 얼마 주면 팔거니?”하고 물었고, 소년은 똑같이 손가락 2개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주인은 20만 달러를 소년에게 주었고, 소년은 어리둥절하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이제 너의 삶의 가치를 알겠니? 네가 어디 출신인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자신을 어느 위치에 두는가와 네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단다.” 이 할아버지의 삶의 가치 이야기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기에서도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돈(풍요)과 가문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불 섶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풍요를 갈망할까?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대부분 직관적으로 돌의 20만 달러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돌이 2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의 본질에 집착하게 되고 본질을 우선시하여 제대로 된 존재의 가치를 평가 받아야 되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2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보석을 제대로 알아보는 능력을 갈고 닦아서 보석을 평범한 돌로 치부해 행복(풍요)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우리가 떠올려야하는 것은 바로 축의 시대 성현인 노자의 가치론인 것이다. 바로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를 떠 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 돌의 본질이 20만 달러짜리 보석인데 이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돌이 세상과의 상대적 관계성에 의하여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풍요에 직관적으로 반응하고 풍요만을 갈망하는 것은 세상이 자본주의로 프레이밍 되어, 쉴러의 말처럼 인간의 주관적인 행복을 자본주의가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잡스의 마지막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노자의 가치론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바로 이것이 이제부터 우리의 삶에 스키델스키의 7가지 기본재를 보장하고 쉴러와 카너먼의 행동경제학을 반영하여 풍요만이 아닌 가치를 생각하며 센델의 ‘공동선의 좋은 삶’을 추구해야만 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자기 자신을 세상과 어떠한 관계로 형성하는가?’라는 가치의 문제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있다. 결국 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하찮은 위치에 둘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조화를 이루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가치 있는 위치에 둘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고, 가치 있는 위치가 어디이고, 도대체 ‘가치’가 무엇이냐는 것은 존재의 본질에 따른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 따른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잡스가 말하는 ‘가치 있는 일’은 삶의 한 가지 해답은 될 수 있어도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치’의 사전적 의미는 [철학] 인간이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지니게 되는 중요성, [기본 의미] 사물이 지니고 있는 값이나 쓸모라고 되어 있다. 결국 ‘가치’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사회적 관계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척도이고, 가치관(價値觀)은 이러한 가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한편 ‘자아’는 인간의 사유, 감정, 의지, 경험, 행동 등의 모든 작용을 주관하며 제어하는 주체이고, ‘자아상’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역할이나 존재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말한다. 따라서 가치관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상과 그를 둘러싼 사회사상과의 관계에 의하여 형성되며, 이 가치관이 바로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이요, 행복과 불행이라는 삶의 질을 판단하는 척도인 것이다. 이에 따라 가치관이 바로 매슬로가 이야기하는 우리 욕망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 즉 우리 인간 행복의 최고 단계인 자아실현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 즉 각자 자기 자신만의 행복, 더 나아가 자신만의 풍요라는 측면에서만 가치관을 설정하고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한다면 사회적 관계에서 공동선의 조화를 잃어 버려 우리를 행복이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에 빠뜨려 만족을 모르고 불나방처럼 풍요의 행복만을 쫓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자아상과 가치관의 의미에서, 장기홍의 세계 각 나라 중산층의 잘사는 삶의 기준을 비교한 자료(조선일보 기사 인용)[참고 3.22]는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각 나라의 중산층을 기준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삶의 기준을 그림 3.13에 보였다. 그림 3.13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 프랑스, 영국 세 나라의 각 나라별 중산층이 생각하는 ‘잘사는 삶의 기준’이 서로 확연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중산층은 ‘자기계발 및 사회봉사’를, 영국은 ‘공익과 신념’을 잘 사는 삶의 기준이라 생각하는 반면에 한국은 30평대 아파트에 월 500만 원 이상의 급여 등 풍요로운 삶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프랑스와 영국의 중산층이 사회봉사와 공익을 삶의 가치로 내세우고, 한국은 돈을 가치로 내세웠다고 해서 그들이 훨씬 품격 있고 우리 한국은 돈만 아는 수전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한국은 지난 5~60년의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이런 재무적 치우침 현상이 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처럼 풍요를 최우선시하는 삶의 기준 때문에 세계 6대 경제 부국의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우리 스스로 헬조선이라 폄하하고, 실제로 그렇게 불행이라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욕망의 마지막 단계, 즉 우리 인간 행복의 최고 단계인 자아실현의 기초가 되는 가치관이 풍요만이 아닌 풍요와 더불어 자기 계발, 사회봉사, 그리고 공동선의 신념 등으로 삶의 가치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3.13. 각 나라 중산층의 잘사는 삶의 기준 비교 [참고 3.22]
이상과 같이 ‘삶의 가치’ 확장을 통한 자아실현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매슬로의 욕망 5단계[그림 3.3 참고]에서 욕망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을 세분화한 매슬로의 욕망 8단계를 그림 3.14에 보였다.
그림 3.14. 매슬로의 욕망 8단계 [참고 3.22]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슬로의 욕망 8단계는 기본 욕망인 결핍욕구와 자아실현인 성장욕구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여기서 결핍욕구는 매슬로의 욕망 5단계 중 1~4단계인 생리, 안전, 사회, 그리고 존중 욕구를 말하고, 성장욕구는 매슬로의 욕망 5단계 중 5단계인 자아실현을 그림과 같이 5~8단계로 세분화하여 구분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풍요를 포함한 결핍욕구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느 일정 수준 이상의 기본욕구가 채워지면 삶의 만족도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다음부터 우리 삶의 만족도를 향상시키는 것은 풍요와 같은 ‘결핍의 충족’의 단계를 넘어 성장욕구, 즉 배움, 취미 활동 등과 같은 자기계발, 그리고 공동선의 신념 등의 자아실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살펴봐야 할 것은 풍요 등과 같은 기본 욕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율적으로 노력하여 성취하면 되는 것이지만,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욕구들은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자기 초월적 이타심이 필요하다. 즉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욕구들은 ‘좋은 관계’를 통한 공동선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자율성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어려서부터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육성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부류의 욕구 문제는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하여 에릭 시노웨이는 그의 저서 “하워드의 선물”에서 “삶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무엇을 비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참고 3.23]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는 풍요 등과 같은 기본 욕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율적으로 노력하여 성취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삶의 과정에서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자신의 목표에 대한 성과(Outcome)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고,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욕구(특히 우리 욕망의 가장 최고 단계인 매슬로의 욕망 8단계)들은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자기 초월적 이타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비우느냐에 따라 그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이야기 하며, 자신의 자아상과 삶의 가치관에 따라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삶이고, 이 채움과 비움의 조화와 균형을 지혜롭게 이루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함께 정리한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지면 관계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축의 시대 성현인 노자의 사회론(social theory)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노자는 도덕경 3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부위도)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是以聖人之治, (시이성인지치)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常使民無智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爲無爲,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현자라 칭하는 자들을 숭상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지니.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지니.
욕심 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할지니.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약하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 도덕경 상편 제3장 - [참고 2.32]
노자는 현자라 칭하는 소위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일반 국민들이 숭상하여 따르지 않도록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잘 이끌라고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욕심날 만한 것들을 아예 보여주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니 훌륭한 사람을 따르지 말고 재물을 하찮게 여기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말이다. 그런데 노자가 도덕경 2장에서 이야기한 가치론(axiology) 즉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를 되새겨 보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 추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보편성에 의하여 ‘아름다움’의 기준이 설정될 수밖에 없고 미셀 푸코가 말한 것처럼 이는 폭력이 되어 이 기준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절세미녀로 알려져 있는 당나라 시대의 양귀비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비만 체질로 패션모델도 되기 어렵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혀를 절개하여 접시모양의 장식을 하는 것이 미인이고, 동남아시아의 카렌족은 목이 길어야 미인이어서 어려서부터 목에 링을 끼우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링의 개수도 늘려 끼우고 다닌다. 우리가 볼 때는 기이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본질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적 상황과 문화에 따라 기준이 변하여 왔다. 우리의 패션에 대한 유행이 돌고 돌듯이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자라 칭하는 소위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도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일반 국민들이 숭상하고 따르게 되면 서로 다투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재에 매우 밝아 주식투자를 잘하여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축구를 잘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많은 걸 누리고 산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다 이들과 같이 될 수 는 없는 것이다. 이들의 풍요로운 결과는 그들이 천부적으로 갖고 태어난 재능에 적당한 노력이 더해지고 여기에 시대적 상황과 문화가 맞아 떨어지는 행운까지 어우러져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재능과 능력이 다른데 모든 사람의 삶의 가치가 이들과 같다면, 일부는 비슷하게 이루거나 그들을 능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의 늪에 빠져 불행한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잘나가는 사람이나 귀한 재물만을 쫓아다니지 말고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의지와 고집을 약하게 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의 도를 따르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게랄트 휘터가 그의 저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의 생각에 맞게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스스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참고 2.10] 바로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最高善(최고선)’인 “上善若水(상선약수)인 것이다. 흐르는 강물은 이를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하는 실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준다. 물은 바닥이 기울면 자기의 의지에 따라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렇게 흐르다 길이 막히게 되면, 세상과 다투지 않고 만약 그 모양이 원형이면 원형으로, 사각형이면 사각형으로 머물며 때를 기다린다. 물은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실현하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그저 세상의 질서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흐르는데 결과적으로는 만물에게 이로움을 선사하는 공을 세우고도 그 공을 내세우기 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조용히 머무르는 것이다. 바로 물의 이 모습이 노자가 말하는 道無水有(도무수유), 道(도)의 모습인 것이다. 노자는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약하게 하여 흐르는 강물의 모습처럼 살라고 말한다.
이렇게 흐르는 강물처럼 살게 되면,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으며, 그리고 나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교만한 생각, 즉 나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항상 선두이어야 하고 이로 인해 무위도식의 특권을 누려야 하며, 이를 위해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무분별하게 난개발을 해도 된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공자의 가르침인 진정한 知好樂(지호락)의 삶인 것이다. 공자는 활쏘기의 목적은 과녁에 명중시키는데 있지 않고, 학문은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출세하는데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저마다 가진 힘이 다르고 재능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출세하기 위하여, 적자생존의 경쟁 우위를 위하여, 그로인해 남이야 어떻든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무위도식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높은 목표를 세우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공자는 말하는 것이다. 공자도 노자가 말한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약하게 하여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흐르다 보니 어느새 바다에 이르게 되는 강물처럼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며,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는 진정한 知好樂(지호락)의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요, 동양철학의 핵심인 ‘범아일여’의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