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관계 그리고 소속감
3.2.3. 관계 그리고 소속감
최근 20년 동안 현대 진화 심리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근본적으로 전환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이제까지 우리가 신봉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행복은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다.”라는 진화적 관점으로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렸다.[참고 2.8] 이제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라는 것은 거창한 철학적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적 관점에서 모든 생명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마지막 키워드인 “생존과 번식”을 충족하여 자연선택을 받아 살아 남기위한 도구일 뿐 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종족을 번식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음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태생적으로 먹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먹는 쾌감(행복)을 느끼도록 진화되어 왔다. 바로 이 먹는 즐거움과 욕망, 즉 행복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진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고,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에 나아가 목숨을 건 사냥을 기꺼이 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농사도, 사냥도, 육아도 혼자 감당하기에는 주변 환경이 너무 혹독하고 살벌해서 생존하기 위하여 당연히 서로 돕고 의지하는 부족사회를 선택하였고, 아주 오랜 세월동안 ‘공동생산 공동분배’ 하는 상부상조의 ‘덕’을 뼛속 깊이 새겨 현대의 우리에게 까지 훌륭한 유전자를 계승해 주는데 긍정적으로 작용 하였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 되었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행복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면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것이다.[참고 2.8] 따라서 아주 직설적으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행복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인데, ‘먹는 것’에 방점이 찍혀서 언제부터인가 부터 ‘누군가와 함께’를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케네스 밀러는 현대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종합하여 발표한 ‘인간의 본능’에서 “‘인간 사회생물학'이라는 어휘 안에서는 사회적 행동이 만들어질 수 있는 원천이 딱 두 가지다. 그리고 둘 다 자연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미적인 것이든 종교적, 정치적, 성적인 것이든 우리의 선택은 환경에 대한 성공적인 적응의 직접적인 결과이거나 과거 환경에 대한 적응으로 인해 비롯된 간접적인 결과이다. 모든 것은 적응이며, 진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회제도, 관습, 문화 등 가장 은밀하고, 복잡한 것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설명해 줄 것이다.”라고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인용하면서 까지 인간의 사회성이 진화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밀러는 “신화, 의식, 상징을 중심으로 응집할 수 있었던 사회집단은 종교가 없는 집단에 비해 식량을 구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자식을 나아 기르는데 더 효율적이었고, 따라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적 재능을 오늘날의 인류에게 전승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중략.... 이기심과 개인주의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종교적 충동과 충돌하기 때문에 순응과 집단 정체성을 고양하는 유전자가 등장하면서 감소했다.”[참고 2.3]라고 하면서 우리 인류가 공동체 속에서 소속감을 바탕으로 생존에 성공한 사회적 동물임을 주장하였다. 자 이제 개개인만이 아닌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소속감까지를 포함하는 관점으로 우리의 ‘행복’의 지평을 넓혀 보자.
우리 인간의 사회적 관계, 즉 ‘좋은 사람과 함께’에 대해서는 하버드대학교 ‘성인발달연구’의 연구책임자 로버트 윌딩거의 TED 강연을 ‘Change Ground’가 정리한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참고 3.20] 여기서 윌딩거는 설문조사 하나를 보여주면서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들까?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묻는다.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논의해왔던 주제이다. 매우 반갑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일지 매우 궁금하다. 이 설문조사는 미국 밀레니엄 세대를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들 중 80%가 넘는 대부분의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마치 “나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 거야.”라고 꿈에 가득 찬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이렇게 풍요(부자, 돈)가 인생의 최고 목표가 되는 이야기는 미국에만 있지 않다. 배연국이 소개한 한국의 어느 중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도 살펴보도록 하자.[참고 3.21] 교사가 학생들에게 메모지 5장씩을 나누어 주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5가지를 써보라”라고 하였더니, 대부분의 학생이 나, 부모님, 친구, 돈, 건강, 사랑하는 사람 등을 적었고 생각의 편차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 다음 교사가 “그중에서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를 버려라”라고 하자 학생들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메모지들을 고르고 골라 1장을 버렸다. 계속해서 이렇게 4번을 지시하자 결국 학생들의 손에는 각자 메모지 1장씩만 남게 되었다. 교사가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갖고 있는 메모지의 내용을 살펴보니 ‘나’와 ‘돈’이 가장 많았고, 이 둘의 비중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실험이 끝난 후 교사가 학생들에게 “왜 돈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돈이 있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되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대학생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약 절반가량이 ‘나’를 버리고 ‘돈’을 택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돈(풍요)이 중요한 것은 명확하지만 자신의 목숨보다 앞설 수는 없지 않은가? 이를 어린 사람들의 치기어린 생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앞선 미국의 사례나 한국의 사례나 젊은이 들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금전만능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우리 어른들이 살아온 행태가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우리 생각의 역사, 성현들의 지혜, 그리고 센델의 공동선과 행동경제학의 제안들을 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좀 가라앉히고 다시 윌딩거의 TED 강연으로 되돌아가 보자.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들까?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의 대답을 찾기 위하여 하버드대는 ‘성인발달연구’를 1938년부터 무려 75년 동안 진행하고 있으며, 아주 오랜 기간의 연구이기 때문에 그동안에 연구책임자가 4번이나 바뀌었고, 윌딩거가 바로 4번째 연구책임자라는 소개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어떻게 한 가지 주제를 75년이 넘도록 연구할 생각을 하고 또 이렇게 황당하고 지루한 연구에 연구비를 지원할 수 있지? 미국의 이런 연구 환경은 참 부럽고 놀랍다. 어쨌든 그들은 1938년부터 724명을 하버드대 2년 학생의 그룹과 보스톤 빈민가의 자녀 그룹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그들의 인생을 75년이 넘도록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윌딩거에 의하면 그들은 미국 대통령, 회사원, 알코올 중독자 등 다양하게 성장하였으며, 현재 724명 중에 60명이 생존해 있다고 한다. 윌딩거와 연구진은 해마다 이들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의료 기록을 받고, 피를 뽑고, 뇌를 촬영하고, 그들의 자녀와 대화를 하며 배우자와 고민을 나누는 모습을 촬영하고 연구한다고 한다.
무려 75년의 추적 연구 결과, 이들이 연구에서 얻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는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라는 것이다. 윌딩거는 이 연구를 통해 ‘좋은 관계’에 대한 3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참고 3.20] 첫째, 사회적 연결은 매우 유익한 반면 고독은 해롭다. 연구 결과 가족, 친구, 공동체와 친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행복하고 중년기 이후에는 빠른 속도로 건강이 악화되며 뇌 기능도 저하되더라는 것이다. 둘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질이지, 관계의 양, 즉 친구의 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갈등과 싸움이 잦다면 건강에 오히려 해롭고, 한명의 친구만으로도 관계가 친밀하고 만족스럽다면 그걸로 충분하더라는 것이다. 셋째, ‘좋은 관계’는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뇌도 보호한다. 연구진은 애착관계가 긴밀하게 형성된 80대는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더 높은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라는 연구 결과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우리 일반인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좋은 관계가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고마움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것처럼 이 중요한 깨달음을 항상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윌딩거는 이를 지적하면서 마크 트웨인의 말로 강연을 마무리 한다. “인생은 짧다. 서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하고 해명할 시간이 없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이며 그것도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라는 이 중요한 깨달음을 항상 잊어버리고 살고 있을까? 그림 3.10은 우리가 ‘좋은 관계’는커녕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3.10 (a)는 현대인의 총체적으로 가장 큰 사망원인이 사회적 고립이라는 뉴욕타임즈의 특집 기사의 사진이고, 그림 3.10 (b)는 Jeff라는 한 청년이 너무 외로워서 자신에게 전화 좀 해달라는 전단지의 모습이다. 놀라운 것은 언뜻 보면 조금은 장난스러워 보이는(본인은 매우 심각했겠지만) 이 청년의 전단지를 본 사람들 중에 무려 7만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도 외롭다면서 청년의 외로움에 공감하고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다.[참고 2.8] 고령화 사회라서 노인층의 사회적 고립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도 문제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성으로 사회적 고립 문제는 노인층 뿐 아니라 젊은 층 까지 총체적인 사회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림 3.10. 사회적 고립 [참고 2.8]
윌딩거는 자 지금부터 스마트 폰이나 노트북 대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라고, 좋은 관계가 좋은 삶을 만든다고,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를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하라고 진지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윌딩거의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진화심리학자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좋은 관계’가 ‘좋은 삶’을 만든다고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를 다 알면서 실천을 못하고, 그림 3.10과 같은 사회적 고립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의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의 뇌가 마치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모든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 때리는 순간에도 에너지의 20%를 소비할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에너지 최소화’전략으로 진화해 왔으며,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시스템 1의 직관적 결정과 문제회피 전략을 선호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에 따라 기본적으로 간단하고 빠른 해결책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선호하도록 진화해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인간관계라는 것은 뇌의 ‘에너지 최소화’전략을 선호하는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전략을 선호하는 둘 이상의 개인 상호간의 복잡하고 변수가 많아 골치가 아픈 고차방정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과 친구를 열심히 챙기는 것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일도 아니고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도 않으며 사업상의 업무처럼 합리적인 보상이 따르지도 않기 때문에 이에 나태하고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드대의 75년간의 연구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은 가족과 친구, 공동체가 있는 사람’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림 3.11. 사회적 관계 [참고 3.18]
자 이제 현대를 사는 우리의 세상이 우리 앞에 아무리 복잡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우리의 행복한 삶이 중요하다면 ‘좋은 관계’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내 옆의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의 ‘좋은 관계’ 말이다. 이는 감나무 밑에 누워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무작정 기다린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며 돈으로 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우리의 시스템 2가 부지런 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시스템 2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이 우리에게 매력적인 일도 아니고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도 않으며 사업상의 업무처럼 합리적인 보상이 따르지도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내 옆의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뉴스넥의 “삶에 지쳤을 때 멈춰서 생각해 볼만한 일러스트 26” 중에서 2개를 골라 그림 3.11에 보였다.[참고 3.18] 그림 3.11 (a)는 노부부가 부부싸움 후 서로 화가 난 상태에서도 상대를 위해 우산을 펼쳐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 “사랑은 화가 잔뜩 나있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떠한가? 그림 3.11 (b)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보호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서로를 위하여 상대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관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우리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내가 가족과 친구를 열심히 챙기고 배려하는 것 보다는 가족과 친구가 나를 열심히 챙기고 배려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가족과 친구도 원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샤를르 드 푸코는 그의 시 “나는 배웠다.”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일 뿐임을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 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 생략 ----- - 샤를르 드 푸코 -
푸코의 시는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품어야할 마음의 자세이다. 이쯤 되면 공자의 가르침, 바람직한 인(仁)의 실천 규범인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 논어 위령공 -)을 소환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욕심이 생기고, 하고 싶은 일은 이를 이루어 가지려고 노력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어떻게든 회피하고 그 일을 남에게 떠넘기려 하는 성향이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 인간은 무위도식하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특혜를 누리기 위해 수천 년 동안 계급사회를 만들고 적자생존의 경쟁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 모두가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는 규범을 주고, 이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도(道), 즉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인‘의 실천 규범을 잘 따라 도덕적 완성을 이룬 사람의 바람직한 전형으로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부인자 기욕립이립인 기욕달이달인 : 인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할 때 남부터 세워 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할 때 남부터 이루게 한다. - 논어 옹야 -)”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인간은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른 사람들도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인‘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연히 남을 먼저 하게 해주는 ‘덕’이 있는 군자의 모습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군자의 모습이 바로 ’좋은 관계‘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림 3.12. 평등과 형평 [참고 3.18]
자 이제 개인과 개인 차원의 ‘좋은 관계’를 사회 공동체안의 소속감 차원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여 보자.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사회 공동체의 전형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센델의 ‘공동선의 좋은 삶’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센델의 생각과 이러한 공동선을 효과적으로 추구하고 실천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우리는 스키델스키의 자본의 탐욕에 맞선 7가지 기본재, 쉴러의 피싱 규제, 카너먼의 공동선 프레이밍 그리고 착각의 오류와 편향의 보정 및 합리적 의사 결정을 위한 시스템 2의 활성화 등을 앞에서 다양한 사례와 함께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우리의 마음 자세 또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관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그림 3.12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TV토론회에서 한 후보자가 선별 복지에 대하여 의견을 발표하면서 제시하였던 그림이다. 물론 이 그림은 뉴스넥의 “삶에 지쳤을 때 멈춰서 생각해 볼만한 일러스트 26” 중의 하나이다.[참고 3.18] 그 당시 그는 이 그림을 보이면서 그림 왼쪽의 평등(Equality)처럼 모두에게 똑 같이 지급하는 평등 복지가 아니라 오른쪽 그림의 형평(Equity)처럼 사정에 따라 형평에 맞게 지급하는 선별 복지의 논리를 주장했다. 그러자 상대 후보는 복지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소외된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게 담장을 없애버리는 마인드로 펼쳐야 되는 것 아니냐 라는 논리를 펼친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의견에 어떤 젊은이는 입장료를 안낸 사람에게 경기를 관람하게 해주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다 일리 있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나의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의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공동선의 좋은 삶’을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 자세의 첫 번째는 인간의 존엄성 확보이다. 이는 1948년의 세계 인권 선언 뿐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사회 공동체가 올바르고 정의로운 공동체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스키델스키의 자본의 탐욕 맞선 7가지 기본재, 즉 기본적인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정도는 사회가 보장해 주어야 인간의 기본 인권은 물론이고 우리가 무분별한 탐욕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유도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초석이 될 수 있다. 그림 3.12에서 설명하자면 누구나 스포츠 경기 정도는 관람이 가능한 정도의 기초 생활은 보장해줌으로서 최소한의 여가는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 경기를 직접 관람하고 안하고는 각 개인의 자유이다.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우리 마음 자세의 두 번째는 누구에게나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평등(Equality) 보다는 각자의 처한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형평(Equity)의 자세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가족과 친구, 공동체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노력은 그림 3.4(a)에 보인 WOOP에 의한 욕망 제어에서 ‘공동선의 좋은 삶’, 즉 모두의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 성과(Outcome)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자칫 방해 요소(Obstacle)로 작용할 수 도 있는 사회적 관계의 걸림돌을 제거함으로서 화이부동(和而不同)한 ‘좋은 관계’가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여 ‘행복한 삶’의 성과(Outcome)를 상승 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