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사람의 욕망 그리고 제어
존엄성_1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 풍요로운 삶이라는 생각, 그리고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이성적 존재라서 자율적으로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제된 상태에서 평등, 자유, 도덕, 그리고 가치를 논의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하게 표현하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수 천 년 동안을 우리 대부분이 예수, 붓다, 그리고 노자와 공자를 섬기고 존경하고 따르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사회에는 교도소에 죄수가 갈수록 넘쳐나고 있으며, 냉철하게 살펴보면 우리 자신 모두는 여전히 속죄가 필요한 죄인이고,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모자라서 우리를 예수와 붓다에게 인도해야 할 성직자들마저 욕망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심심치 않게 우리의 뉴스를 오르내리고 있다. 칸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거나 선택할 능력이 있다.” 또한 “감성은 본능 또는 욕구를 가리키는데 이는 이성에 의하여 억제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다 부질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만 보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그리고 칸트가 이야기한 ‘이성’이 완벽하게 훌륭하여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의지의 나약함’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거나, 칸트의 의무동기와 정언명령을 따르지 못하여 인간다운 행동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설명할 수 도 있겠고, 아니면 우리의 ‘이성’이 완벽하지 못하여 ‘욕망’을 억제하기는커녕, ‘욕망’에 이끌려 다닌 결과라 설명할 수 도 있겠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되었든, 우리가 이미 “생각의 역사”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 인류가 생각의 발달로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면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이성’이 ‘욕망’을 제어하기 보다는 이성’이 ‘욕망’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결국, 우리 인류가 현대 문명을 이룩하기까지 생각의 변화와 함께 사회적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체제유지와 욕망, 이 두 가지에 기반 하여 발달하고 변화해 온 것이다. 첫째, 체제유지 측면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구축한 종법제도, 봉건제도 심지어는 민주주의까지 기득권을 가진 지배그룹이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생각의 구체적인 구현이었다. 이는 공자가 이야기한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논어 〈자로〉”에서 구체화 된다. 따라서 사회가 발달할수록 권력의 무게중심이 중심(소수)에서 주변(다수)으로, 귀족에서 평민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하여 명실상부(名實相符)가 아닌 명실상치(名實相馳)가 일어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중심(소수)을 주변(다수)이 공격하는 현상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고 이의 결과에 따라 또 다른 문명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의 욕망 측면에서 보면 사유재산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차별이 생기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가 생기고 결국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개개인의 자율의지에 기반 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문제는 이 욕망이 통제되지 않고 무한히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살펴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든 간에 이제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우리 문명이 앞으로도 자손만대 지속가능하고, 이 자연과 함께 상생하려면 최소한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개개인의 ‘욕망’을 조금씩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변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칸트의 “인간이 본능에 구속되지 않는 도덕적 자율성을 가질 때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고, 도덕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의미가 있는 것이 되고, 인간이 인간다운 존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자, 우리 스스로 통제가 어려워 골치 꺼리이기도 한 ‘욕망’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고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방법을 찾아 우리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같이 논의 해 보도록 하자.
3.2.1. 사람의 욕망 그리고 제어
우리는 약 600만 년 전 침팬지와 공동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후 그 생존기간의 대부분을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소속감을 기반으로 상부상조하면서 서로 평등하게 살아왔고, 이러한 소속감 즉 이타심의 원천인 ‘덕’의 유전적 재능을 현대 인류에게까지 물려주었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불과 도구”를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 풍요를 누리게 되고 문명생활을 하면서 만물의 영장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 대신에 오히려 그 풍요로 인한 적자생존의 경쟁으로 갈등과 폭력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렸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문화와 문명생활을 누리기 시작한 불과 5~6천 년 동안에 우리의 발아래에 있는 세상뿐 아니라 우리 인류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도 불사하는 무한 경쟁의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사회를 만들어 버렸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유한계급의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무분별한 개발로 6차 대멸종이 될지도 모를 기후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인류는 본질에 매달리던 현대 서양철학이 본질 보다는 현상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진화론이 재조명되고 최근 20여 년 전부터 진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현대 심리학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 진화심리학의 학문영역이 구축되기 시작한다. 이 진화심리학은 이제까지 우리가 신봉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행복은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다.”라는 진화적 관점으로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렸다.[참고 2.8] 즉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라는 것은 거창한 철학적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적 관점에서 모든 생명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마지막 키워드인 “생존과 번식”을 충족하여 자연선택을 받아 살아 남기위한 도구일 뿐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즐거움(pleasure)이고 ‘욕망’이어서 이는 더 큰 것, 즉 “생존과 번식”을 충족하기 위한 열쇠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생명체가 종족을 번식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먹어야하는데, 이러한 욕망(행복)이 바로 먹는 즐거움을 유발하고, 이러한 먹는 쾌감(행복)을 누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건 사냥을 하고, 힘든 농사를 짓는 걸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행복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참고 2.8]이라고 한다. 이러한 ‘욕망(행복)’은 우리가 무려 수백만 년이라는 긴 세월의 대부분을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생존과 번식의 도구로 작용하여 그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도록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상부상조의 ‘덕’을 뼛속 깊이 새겨 현대의 우리에게 까지 훌륭한 유전자를 계승해 주는데 긍정적으로 작용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불’을 다루고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와 문명생활을 누리며 점점 풍요로워져 현대에 이르러서는 냉장고에 음식이 넘쳐나고, 클릭 한번이면 형형색색의 기름진 요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살게 되면서 이제 ‘욕망’은 무조건적인 ‘행복’의 도구만이 아닌 통제가 필요한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케네스 밀러는 그의 저서 “인간의 본능”에서 다음과 같이 지지 하였다.[참고 2.10] 우리는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신중함과 정확성, 세밀함과 도덕성을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의 냉혹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진화한 영장류의 뇌를 갖고 있어서 이러한 진화가 과거 우리 인류 생존기간의 99% 이상인 대부분의 기간 동안을 동물의 왕국 같은 혹독한 환경의 시절에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도록 작용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풍요로운 세상에서는 오히려 과음과식으로 건강에 해롭게 작용하고, 분노, 공격성, 불안장애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를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다음 한마디로 정리하였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 혈통이 자기 존재 기간의 99%를 보낸 소규모 식량 채집 집단에 맞추어 적응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인류는 불과 1%도 안 되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문명의 진화를 이룩했고 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문화가 급속하게 변화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이 세상이 우리에게 그리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이제 이 혼란을 진화심리학자가 우리를 대신해서 정리를 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라 이 혼란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우리 인류를 무려 약 600만 년 동안 생존하여 번영하게 해준 ‘욕망’이라는 이 훌륭한 도구를 이제는 적절하게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 비우고 살라는 것은 이미 2500여 년 전 축의 시대에 성현들의 가르침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삶의 전형이 된지 오래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 화성에 가서 살겠다고 우주 저편을 날라 다니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어찌하여 사소한(?) ‘욕망’ 하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이렇게 갈등 속에서 살고 있을까? 이쯤 되면 이 ‘욕망’이 도대체 뭘까? 하고 궁금해질 것 같다. 우리 같이 욕망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년 걸렸다.”[참고 3.2]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직자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이 사랑을 가슴으로 하는데 칠십년이나 걸렸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시로 내 뱉은 사랑한다는 말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거란 말인가? 우리가 수시로 표현하는 사랑의 상징인 하트(Heart)는 어떤가?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1. 심장, 2. 사랑, 3. 중심으로 나온다. 아마도 우리 몸의 중심에 있고, 생명의 근본인 심장만큼 사랑이 소중하다고 우리가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이쯤 되면 도대체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뭐지? 이제까지 생각의 역사가 어떻고, 생각의 탄생이 어떻고, 철학 어쩌고 하면서 장황하게 떠들어 댔는데, 도대체 생각은 뭐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위키백과에서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과학] 큰 범위에서 의식, [철학] 감각하거나 인식하는 모든 정신작용, [불교]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六識의 하나)이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육식은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 :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기관[六根]이 제각각 형태·소리·냄새·맛·촉감·심리(色聲香味觸法 :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인식 대상[六境]을 만나서 생기는 여섯 가지 인식(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 육식(六識)을 마음이라고 한다.
생각의 사전적 의미를 정리해보면 생각은 의식이고 이성이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하였고, 또 그는 도덕론에서 “감성은 욕구 또는 본능을 말하는데, 그것은 이성에 의해 억제될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능인 ‘욕망’ 정도는 이성에 의해서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질을 추구하는 이원론의 한계로 ‘이성’이 완전무결하고 영원불멸하는 완전한 것일 때 가능한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이성’이 완전한 것이고 ‘이데아’적인 것이었다면 이 완벽한 이성에 의해 우리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어렵지 않게 따를 수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과 갈등의 소용돌이와 기후위기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에서의 생각은 어떨까? 생각은 의식이고 우리의 마음인 ‘육식’중의 하나이다. 마음에 대해서는 이미 “노자와 동양철학”에서 맹자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살펴보았다. 즉 맹자는 인간의 착한 본성인 덕(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마음을 인의예지의 4단(四端)이라 하였는데, 이는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이는 후에 성리학이 성립되면서 사단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을 더하여 사단칠정으로 주자에 의해 체계화되었고, 여기서 “사단은 이(理)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氣)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에서는 밖으로 드러난 마음의 흐름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로 설명한다.[참고 3.3] 여기서 ‘마음자리’는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선 담담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경지를 말한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에 그윽하게 자리하고 있는 물처럼 흔들림 없이 고요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은 외부세계와의 연기(緣起)에 의해 또는 내면의 의식 상태에 따라 ‘마음자리’에서 ‘마음결’이 일어난다. 마치 바람이 불면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듯이, 폭풍을 만나면 격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의 물결이 이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결’이 실제 나의 밖으로 발현되는데 이것이 ‘마음씀’이다. 이러한 ‘마음씀’에 따라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모양을 ‘마음씨’라고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마음씨가 좋네, 나쁘네, 참 곱네 하는 것들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교와 불교 등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에 대한 생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하면 그림 3.2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 3.2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인 사단칠정이 원효대사가 이야기하는 ‘일심의 바다’에 고요하고 그윽하게 마음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 일곱 가지 감정 중에 기쁨과 분노[희(喜)·노(怒)], 슬픔과 즐거움[애(哀)·락(樂)], 사랑과 혐오[애(愛)·오(惡)]는 서로 짝이 있는데, 오로지 ‘욕망[욕(欲)]’만은 대비되는 짝이 없다. 이는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외부세계의 연기(緣起)가 비록 똑 같아도 우리 ‘욕망[욕(欲)]’의 크기와 세기에 따라 ‘마음결’과 ‘마음씀’이 일어나고 발현되는 것이 달라져 ‘마음씨’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을 그림 3.2에 ‘욕망[욕(欲)]’에 의해 기울기가 달라지는 평형저울로 표현해 보았다. 설사 똑같은 심성으로 똑같은 수양을 통해 같은 마음의 사단을 갖고 있고, 외부세계와의 연기(緣起) 또는 내면의 의식 변화가 같게 일어난다 해도 ‘욕망[욕(欲)]’의 크기와 세기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마음결’과 ‘마음씀’이 일어나 ‘마음씨’가 전혀 다르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3.2. 인간의 본성(사단칠정)
사실 바로 이 ‘욕망[욕(欲)]’이 진화의 핵심 도구로 작용하여 우리 인류를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수백만 년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풍요롭고 번영된 세상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간적인 욕망과 감정이 우리를 타락시키고 심지어 기후위기를 초래하여 우리를 멸종 시킬 수도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 인간의 뇌는 자신의 결함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보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수족관 속의 물고기 위치가 공기와 물 사이의 굴절률 차이로 실제와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로 알아내고 이를 보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우리 인류 생존기간의 대부분을 채집과 수렵으로 생존하면서 짜고 지방질이 풍부한 음식에 대한 욕망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칠 정도로 풍요한 오늘날 비만과 각종 성인병으로 오히려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미소와 악수 같은 사회적 신호체계는 우리에게 사회성을 강화시켜주었지만, 오히려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속거나 사기를 당하는 위험도 상존하고 있다.[참고 2.3]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결함을 스스로 보정할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항상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함을 분석하는 행위를 통해 이를 보정하여 그런 불완전성을 극복할 해법을 스스로 찾고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제시한 우리 인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중요한 도구는 ‘욕망(쾌감)’과 함께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사람’이다. 우리 인류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케네스 밀러는 현대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종합하여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밀러는 그의 저서 ‘인간의 본능’에서 “신화, 의식, 상징을 중심으로 응집할 수 있었던 사회집단은 종교가 없는 집단에 비해 식량을 구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자식을 나아 기르는데 더 효율적이었고, 따라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적 재능을 오늘날의 인류에게 전승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중략.... 이기심과 개인주의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종교적 충동과 충돌하기 때문에 순응과 집단 정체성을 고양하는 유전자가 등장하면서 감소했다.”[참고 2.3]라고 하면서 우리 인류가 공동체 속에서 소속감을 바탕으로 생존에 성공한 사회적 동물임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행복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면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것이다.[참고 2.8]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서 ‘맛있는 음식’은 곧 생존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찾게 만드는 행복(쾌감)은 바로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더 큰 것(생존)을 얻기 위한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감(쾌감)을 위하여 사냥과 농사 등의 수고스러운 노동을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혼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하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에 기대어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으며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만을 강조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자율성을 기반으로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소속감에 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개개인만이 아닌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소속감까지를 포함하는 관점으로 우리의 ‘욕망’을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이를 그림 3.3에 보였는데, 이는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의 단계와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가 발표한 인간의 욕구 충족 5단계를 종합하여 나타낸 것이다. 매슬로우는 그림 3.3 중앙의 피라미드처럼 인간의 욕구 충족을 단계별로 구분했고, 인간의 욕망은 1단계부터 일단 하위 욕구가 충족돼야 다음 상위단계로 올라갈 수 있으며, 최상위단계를 5단계로 보았다.[참고 3.11]
그림 3.3. 욕망과 행복의 단계
여기서 인간의 욕구 충족 1단계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다. 말 그대로 먹고 자고 삶을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생리적 욕구를 말한다. 일단 이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의 욕구는 다음 단계를 향하게 되는데, 바로 2단계인 안전의 욕구(Safety Needs)이다. 이는 각종 사고, 재난, 질병으로부터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로 이를 충족해야 우리가 육체적·정신적 안전과 안정을 이루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존을 위한 기본권인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나’만이 아닌 ‘우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어, 우리 인간의 욕구는 다음 3단계인 사회적 욕구(Social Needs)로 향하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한 욕구로 사랑과 애정의 욕구를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욕구까지 충족되고 나면, 이제 다시 ‘우리’안에서 ‘나’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음 4단계인 존경과 존중의 욕구(Esteem Needs)로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로부터 ‘나’라는 존재와 역할을 인정받음으로서 자존감과 긍지, 보람을 갖고 싶은 욕구이다. 만약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등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본권을 충족하고, 사회적 욕구를 넘어 공동체 안에서 인정까지 받고 나면, 마지막으로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Self Actualization)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인간 욕구 중에서 최상위 단계로 자기개발과 목표성취를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는 욕구를 말하는데, ‘나’의 ‘자아상’을 기반으로 하여 자율적으로 이루어 내는 성취욕, 성취감을 의미한다.
이제 그림 3.3의 왼쪽 부분에 보인,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의 만족, 비교, 자아실현의 단계를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와 연계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만족, 비교, 자아실현의 단계를 칼로 두부 자르듯 정확하게 구분해서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림 3.3처럼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의 욕망이든 간에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행복하다고 느낀다. 욕망이 충족된다는 것은 바로 첫 번째 단계인 ‘만족’을 의미하고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만족해야 행복할 뿐 아니라 바로 행복의 첫 번째 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만족이라는 그릇은 요술 보자기라서 아주 옛날 원시시대에서는 사파리를 누비는 사자처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 만족할 수 있었고 행복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풍요로워지면 풍요로워질수록 만족이라는 그릇은 부풀어 올라 더 커져버려 웬만큼 채워져도 만족할 수 가 없게 되어 버렸다. 즉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1, 2단계인 건강과 안전의 기본권 충족 정도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워져 버린 것이다. 여기게 더하여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3, 4단계인 사회적 그리고 존중의 욕구 단계에 이르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상대와 비교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어 설사 내가 만족하거나 또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상대와의 비교우위 여부에 따라 행복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에서 말하는 최상위 행복의 단계는 자아실현에 의한 것으로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와 같다. 즉 자신의 욕구 충족 여부에 따라 또는 이를 상대와의 비교 우위 여부에 따라 단순하게 만족함으로서 행복에 이르는 것과는 달리 ‘나’의 ‘자아상’에 따라 자기개발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도전하고 노력하여 자아실현을 통해 얻는 행복을 말한다. 이러한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이야 말로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이성’이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얻는 행복으로 다른 생명체와는 차원이 다른 인간으로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 인간의 본성과 이 본성에 따른 ‘욕망’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행복은 우리 욕망의 최고 단계이자 행복의 최상위 단계인 ‘자아실현’을 통하여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 또는 공자 식으로 이야기 하면 우리의 ‘마음(4단: 인의예지)’의 재정비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지금까지 욕구 충족의 관점에서 만족을 위한 풍요를 중심으로 행복을 논하였다면, 이제 부터는 ‘이성’과 ‘자아실현’을 기반으로 하는 ‘가치’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개인의 관점만이 아닌 사회적 관계에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원론적 실재론의 한계로 서양 철학이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넘어가면서 오늘날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주장하는 “행복은 더 큰 것을 위한 도구이다.”라는 말에 주눅 들어 우리 인간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본능(욕망)’에 따라 살고 있을 뿐이구나 하고 기죽지 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명제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우리 삶의 목표인 행복을 위하여 우리의 ‘이성’이 다시 조종간을 잡고 삶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까지 중요시해왔던 ‘욕망’, ‘풍요’, 그리고 ‘자유’뿐 아니라 ‘이성’, ‘가치’, 그리고 ‘관계’까지를 포함하여 이들이 조화롭게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욕망의 제어’ 즉 ‘마음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림 3.4. 일반적인 자동제어시스템에 대한 예
이러한 ‘욕망의 제어’ 즉 ‘마음공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공대 제어공학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자동제어 시스템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림 3.4(a)는 제어공학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일반적인 자동제어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그림 3.4(a)가 전동기 속도제어 시스템이라고 하면, 그림의 빨간 점선 우측 부분의 Plant가 전동기이고, 그 우측의 화살표가 전동기의 실제 속도(Actual Value)이다. 이 전동기 속도를 주변 환경에 상관없이 원하는 속도로 운전하기 위하여 전동기의 속도 제어기[Controller & Actuator : 전동기(Plant) 왼쪽 부분]를 설계하여 설치한다. 이에 따라 이 제어기에 의해 전동기의 실제 속도(Actual Value)가 원하는 속도(Desired Value : 맨 왼쪽 입력 부분)로 출력되도록 제어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자동제어 시스템의 핵심은 전동기의 실제 속도(Actual Value)가 원하는 속도(Desired Value)로 제어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실제 속도를 빨간 점선 아래 부분의 센서(Sensor)를 통해 측정하여 이를 원하는 속도와 비교해서 그 차이만큼을 보상하도록 제어기가 제어를 하는 것이다. 이 자동제어 시스템은 만약 전동기에 부하가 갑자기 변동하거나 어떤 장애가 발생하는 등의 외란(Disturbance)에도 안정하게 동작하도록 설계된다. 이러한 제어의 결과로 그림3.4(b)와 같이 전동기의 실제 속도가 설계자의 원하는 속도에 정확하게 수렴하도록 제어되는 것이다. 여기서 설계자가 제어 정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파란색 응답처럼 커다란 오버슈트의 과도상태를 갖는 대신에 원하는 속도에 수렴하는 시간은 빠른 응답을 갖기도 하고 녹색 응답처럼 오버슈트 없이 부드럽게 제어되는 대신에 수렴하는 시간은 좀 더 늦은 응답을 갖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자동제어공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매일의 일상이 자동제어에 의해 아주 훌륭하게 수행되고 있다. 이를테면 넘어지지 않고 걷는 다든가 야구에서 외야수가 타자가 타격한 볼을 쫓아가 잡아낸다든가 평균대 위에서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으면서 걷는 행동 등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동제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림 3.2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의 뇌가 보정능력을 갖고 있어서, 우리의 ‘이성’이 개입되는 영역에서 자동제어 기능을 활용하면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한때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하면 된다.”는 긍정적 사고가 우리의 자아실현과 목표 성취에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긍정적 사고가 오히려 ‘희망고문’이 되고 목표를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최근에야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뉴욕대학의 심리학자 외팅겐 교수는 2014년 자신의 저서 ‘무한긍정의 덫(Rethinking Positive Thinking)’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 목표 성취에 관한 긍정적인 환상이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성취를 방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고 3.12] 그 이유로 목표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노력 없이 그저 동화속의 신데렐라나 알라딘처럼 자신의 인생을 꿈꾸듯이 바꾸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가득 찬 사람일수록 긍정적 사고로 인하여 무의식적으로 목표 성취를 위한 실천 노력이나 극복해야할 장애 등을 동화속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거나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외팅겐은 자아실현과 목표 성취에 효율적인 방법으로 무작정의 긍정적 사고 대신에 WOOP 사고법을 제안하였다. 여기서 WOOP는 ‘Wish(소원), Outcome(결과), Obstacle(장애), Plan(계획)’을 의미한다. 이 사고법은 한마디로 우리의 ‘이성’이 개입되는 영역에서 그림 3.4의 자동제어 시스템 기능을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목표를 성취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 3.4의 자동제어 시스템에서 원하는 목표치(Desired Value)를 Wish(소원)로, 외란(Disturbance)를 Obstacle(장애)로, 실제 결과치(Actual Value)를 Outcome(결과)으로, 그리고 제어기(Controller & Actuator)와 센서(Sensor)를 포함한 플랜트(Plant)[그림 16(a)의 빨간 점선 부분]를 Plan & Action(계획 및 실행)으로 치환하면 WOOP 사고법의 플로우 챠트가 된다.
원래 외팅겐의 WOOP 사고법은 다음 네 가지 훈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프로그램이다. 첫째, 자신이 원하는 목표(Wish)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하라. 둘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성과(Outcome)를 그림처럼 자세하고 확실하게 구상하라. 셋째, 목표(Wish)를 달성하기 위해 실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방해 요소 등 장애물(Obstacle)들을 냉정하고 냉철하게 검토하고 정리하라. 넷째, 목표를 성취하고 계획한 성과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과 장애요소를 극복하고 효율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계획(Plan)을 명확하게 작성하라. 이상과 같은 WOOP 사고법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사소한 일이라도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막연하게 ‘하면 된다.’나 ‘잘 될 거야.’ 등의 긍정적 사고로 희망고문하지 말고, 목표 성취에 대한 성과를 구체화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수립하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소한 다이어트가 목표라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몇 Kg을 감량할 것인지 목표를 분명하게 하고, 이 체중 감량으로 한 사이즈 작은 옷을 입게 된다든가 하는 성과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설정한 다음, 이를 위하여 매일 저녁 8시에 몇 시간씩 운동하겠다는 실천계획을 세우고 이의 방해요소인 친구들과의 회식 등을 피하기 위하여 매일 오후 5시 이후는 SNS 등을 차단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서 원하는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의도는 WOOP 사고법을 공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간의 욕망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프로그램으로 활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니 이 정도로 하고, 만약 WOOP 사고법에 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WOOP 앱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다시 그림 3.4(a)로 돌아와서, 자동제어 시스템에 WOOP 사고법을 적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으로 치환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WOOP(Wish, Outcome, Obstacle, Plan)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목표(Wish)는 실현가능한 욕망이다.
둘째, 성과(Outcome)는 풍요롭고 가치 있는 행복한 삶이다.
셋째, 방해 요소(Obstacle)들은 화이부동(和而不同)한 사회적 관계의 걸림돌이다.
넷째, 계획과 실천(Plan & Action)은 유위도식(有爲徒食)하는 충실한 삶이다.
위에 정리한 WOOP를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았거나 소홀하게 다루었던 단어들이 등장한다. ‘실현가능’, ‘가치’, ‘사회적 관계’, 그리고 ‘충실’과 같은 단어들 말이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센델의 ‘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이루어진다하여도 실천이 전제되지 않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 진정으로 풍요롭고도 가치 있는 행복한 삶이 실현가능해지고 충실한 삶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위 WOOP의 네 가지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기(이후 부터는 ‘WOOP에 의한 욕망 제어’로 표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