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델의 공동선
3.1 가야 할 길(道) : 행복_3
3.1.6. 마이클 샌델의 공동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좋은 삶, 행복한 삶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되었든 다윈이 말한 것처럼 ‘행복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었든 행복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부터 모어의 유토피아, 벤담의 공리주의, 노직의 자유주의, 그리고 롤스의 정의론 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결론이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인간에게 이성이 있어 인간다운 ‘훌륭함(德)’으로 언제나 ‘좋은 것(善)’을 목적으로 행동을 함으로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실제 플라톤이 정리한 이데아적인 이성과 달리 우리 인간의 이성이 깨달아서 아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의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인간이 이성에 의한 지성적인 덕이 있다하더라도 ‘의지의 나약함’ 때문에 실천이 안 되는 것으로 보고 ‘품성적인 덕’으로 실천 의지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서로 물고 물어뜯기는 무한 경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해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편, 모어가 살았던 15세기에서 16세기 초의 유럽의 사회는 르네상스와 신대륙 발견 등으로 시장 규모의 확대 및 이에 따른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한 도시 귀족층이 출현하고 자본 증대 및 근대 기업화 등 상업혁명으로 전통의 귀족 계급의 몰락과 신흥 상인 계급의 부상이 혼재하는 명실상부(名實相符)가 아닌 명실상치(名實相馳)하는 대 변혁의 시기였다. 이렇게 서로 많이 갖겠다고 빼앗고 빼앗기고, 죽고 죽이는 대 혼란기에 평등한 사회의 유토피아를 꿈꾼 것이다. 이어서 벤담의 시대 또한 18~19세기 산업 혁명으로 사회는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신흥 상공인 계급의 등장으로 르네상스 시기와 마찬가지로 명실상치(名實相馳)의 어마어마한 변혁의 시기였으며, 이에 벤담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평등한 세상의 공리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사항은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풍요의 대부분은 소수 특권층에게만 집중되어 오히려 사람간의 격차는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간 개개인의 기본권이 양적으로 보장되는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유토피아를 꿈꾸고, 공리주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수인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결과적으로는 소수지만 사회적 능력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사회 평등을 위해 능력 있는 자의 능력을 억누르는 정책에 대한 우려의 사례로 샌델은 카트보거네트의 단편 “해리슨 버거론”을 제시한다. 이 단편의 주인공처럼 지능이 높은 사람에게는 지능의 활용을 억제시키기 위하여 20초 마다 강한 자극의 잡음을 발생하는 이어폰을 꽂고 다니게 하고, 잘생긴 사람에게는 코에 공을 달고, 이빨에 검은 덧니를 씌우는 등의 핸디캡을 부여함으로서 남보다 잘난 능력을 억제함으로서 사회의 평등을 유지한다. 이는 사회 전체를 하향 평준화시키고 개인의 자율성 보다는 공동체의 소속감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의타심만을 조장하여 오히려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부작용만 부각되게 된다. 더구나 플라톤의 이데아적 이성, 칸트의 순수실천 이성을 간과하여 이성을 가진 인간의 자율성을 제한함으로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창의력과 자발적 의욕을 꺾어 버려 사회 발전의 성장 동력의 싹을 잘라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서 간과한 개인의 권리를 철저하게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20세기 들어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세계 최강의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로버트 노직의 자유주의로 발전한다.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분배 정의에 반대하는 ‘최소국가’를 주장하였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세상을 주도하는 소수, 기득권과 능력 있는 소수에 의하여 강력하게 지지를 받았으며, 플라톤의 이데아적 이성, 칸트의 순수실천 이성은 이들의 강력한 논리적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첫째, 나는 내 것이니 자유롭게 다루어도 되나? 둘째, 제3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한, 성인들 사이에 자유로운 계약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가? 역시 20세기의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의문에 평등주의로 보완한다. 즉 롤스는 모든 개인은 기본적인 자유권을 갖는다는 자유주의 원칙을 지지하면서, 여기에 모든 개인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조건이 주어지고, 그래도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나타난다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차등원칙을 보완하였다. 이러한 롤스의 차등원칙은 현대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누진세, 사회적 약자의 복지정책 등으로 반영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의 부자국가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기회만 생기면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끊임없는 반론과 공격을 일삼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롤스의 차등원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도덕에 기대지 않고, 사회적 능력자의 능력이 자신만의 재능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의 도움에 의한 것이기도 하니 사회에 일정 부분 환원해야한다는 논리로, 칸트의 이성에 의한 자율성 보다는 그 이전의 사회의 소속감에 호소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보다 근본적인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 적 이성이든, 칸트의 순수 실천이성이든 서양 철학이 이원론적 실재론의 한계로 이성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영역에 있는 것들의 본질에 대하여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완전무결하고 보편적이며 완벽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규정을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에 의해 지적・철학적인 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지의 나약함’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거나, 칸트가 말한 순수 실천이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의무동기에 의한 정언명령을 실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은 이와 같은 이원론적 실재론의 한계로 이미 헤겔의 변증법을 거쳐 동양의 세계관처럼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들어선지 오래다. 다만, 실재론으로 교육받은 우리 시민들의 생각이 여전하게 변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자 이제 “이 세상에는 정비공이 없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 흔히들 많이 하는 이야기인데, 정확한 출처는 모른다. 세상에 정비공이 없다는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는 자동차나 가전제품 등이 고장 나거나 고장 나지 않도록 수리해주거나 유지보수해주는 정비공은 있지만 세상을 유지보수해주는 정비공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고 세상의 질서에 따라 스스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지보수 되는 것이 아니라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어 흥미롭다. 그런데 사실 정비공은 정답, 비밀, 공짜의 줄임말로 세상에는 정답, 비밀, 그리고 공짜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내가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성이나 정치・사회적인 문제들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그 본질을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해답을 구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은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던 ‘행복한 삶’에 대한 우리의 정답은 제시할 수 없는 것인가? 아쉽지만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정답은 아니지만 해답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현대 철학이 일원론의 관념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서부터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라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행복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도구’라는 현상에 집중하게 되어 현대의 진화심리학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되는 공통적인 진화의 키워드는 ‘생존과 번식’이고, 이를 위하여 적어도 우리 인간은 행복(쾌감)을 도구로 삼아 지금까지 진화했다고 현대의 진화심리학이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인간의 행복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것이다.[참고 2.8] 여기서 ‘맛있는 음식’은 곧 생존을 의미하고, 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쾌감) 때문에 우리 인간은 사냥과 농사 등의 노동을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혼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하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에 기대어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으며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만을 강조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자율성을 기반으로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소속감에 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는 공동선은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마이클 샌델은 공동선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에 앞서서 로버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1968년 3월 캔자스 대학 연설을 소개한다. 이 당시의 미국은 세계 최강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 여러 도시에서의 폭동, 인종 차별, 일부 지역의 심각한 빈곤 등의 정치・경제적 각종 문제에 휘말려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케네디는 “우리는 국가의 목표나 개인적 만족을 단순한 경제적 성장에서 찾을 수 없다. ... GNP는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우리의 유머나 용기, 지혜나 배움,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는다. GNP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측정한다.”[참고 3.4]고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케네디의 이 연설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구체화 한 것이 그림 3.1(a)이고, 1982년에 영국의 경제학자 핸더슨에 의해 그림 3.1(b)와 같이 3층 케이크로 표현되었다. 핸더슨은 이 그림에 대하여 “산업사회의 총생산은 ‘어머니 자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당의(糖衣)가 입혀진 3층 케이크와 같다.”라고 설명하였으며, 이는 케네디의 의견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케네디는 국가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을 일깨우면서 사회 정의는 단순히 국민 총생산의 규모(풍요)와 분배의 문제를 넘어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생각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며 공동체 의식을 호소한 것이다.
그림 3.1.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포함한 국민총생산(GNP) [참고 3.10]
샌델이 굳이 50여 년 전에 비운의 암살로 고인이 된 케네디를 소환한 것은 우리가 정의를 이해하는 행복, 자유, 그리고 도덕의 세 가지 방식 중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해왔던 도덕을 단지 미덕의 관점이 아니라 공동체에서의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여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좁혀나가는 문화를 추구하여 공동선의 사회를 이룩하고 싶어서였다. 이제까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주장의 핵심은 단지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을 분배하는 방식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정의로운가에만 서로 매달려 왔고, 이 과정에 도덕은 자신들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단지 미덕으로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정의와 권리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샌델은 정의롭고 좋은 삶을 위해 공동선의 사회를 제안하는 것이다. 샌델은 공동선의 사회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의와 권리문제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의 ‘낙태에 대한 논쟁’을 사례로 들었다. 낙태의 문제는 엄마 뱃속의 태아를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이고, 이는 도덕적・종교적・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현재도 갑론을박 중이다. 낙태 금지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태아도 생명이기 때문에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낙태 금지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는 임신한 여성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는 이에 대해 중립을 지키고, 여성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2022년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그동안 많은 논란 속에서도 유지되어 왔던 ‘임신 6개월 이전의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공식적으로 폐기한다고 선포하였다. 지금 현재 이 후폭풍으로 미국 사회는 엄청난 논쟁 중이다. 미 민주당과 바이든 대통령은 낙태 금지 판결에 강력히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의 재임 시절 무려 3명이나 보수성향의 대법관을 새로 임명해 미국 연방 대법관 9명 중 6명은 보수 성향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이미 미국 연방대법원의 법적인 영역을 떠나 버렸다. 샌델은 이러한 ‘낙태 금지법’의 사례처럼 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종교적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도덕에 기초한 공동선의 사회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정의는 단지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의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도덕적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샌델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를 위하여 다음 네 가지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할 것을 제안하였다.[참고 3.4] 이는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 둘째, 자유시장의 도덕적 한계의 공론화, 셋째, 공동체 연대를 통한 불평등 해소, 넷째, 도덕에 기초하는 사회에 대한 논의 주제를 말하는데 이를 하나씩 알아보고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
정의로운 사회에는 인간의 자율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소속감을 기반으로 하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공동선의 사회를 위하여 공동체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각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민주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연대와 상호책임의식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공공기관 공공서비스의 양적 질적 개선과 투자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공립학교가 의무교육을 통해 시민교육을 담당하는데, 단지 시민의 미덕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경제적・종교적・인종적 배경이 다른 청소년들이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없도록 같은 사회제도 안에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시민 교육을 말한다. 이를 위하여 공립학교를 비롯한 공공 서비스에 민간 서비스 못지않게 과감한 투자를 하여 가난한 사람 뿐 아니라 여유 있는 사람도 다 같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공공 서비스가 열악하면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이용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고급의 민간 서비스를 이용하며 이중과세라 불평하는 바람에 공공 서비스의 투자는 점점 약화되어 공공과 민간의 서비스 격차가 벌어지는 악순환의 과정을 밟게 되고, 이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발생하여 공동선을 추구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시장의 도덕적 한계의 공론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자유시장은 정의로운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매매, 대리모를 통한 임신과 출산 거래 등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행위를 자유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의롭고 좋은 삶의 사회를 위하여 공동선의 도덕적 가치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공개토론 및 이의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공동체 연대를 통한 불평등 해소
빈부의 격차가 큰 사회는 자연스럽게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에서 설명한 것처럼 공공 서비스를 사회적 약자만 이용하고 부유층은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려 공공 서비스의 양적 질적 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첫째,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부자가 누진적 부자 증세를 꺼리고 불평하면서 재정문제가 악화되어 공공 서비스의 질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게 된다. 둘째,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곳에 공원, 시민회관 등의 공공시설이 들어서지 않음으로서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심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시민 연대의식이 약화되는 악영향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좋은 삶의 사회를 위하여 적어도 공공의 영역에서 만큼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삶에 기반이 되는 공공시설과 공공 서비스들을 민간 서비스 이상으로 재건하는 것을 공동선의 목표로 삼아 이를 제공하는 것에 공동체가 합의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넷째, 도덕에 기초하는 사회
도덕적・종교적・사회적 신념에 따른 서로 다른 의견은 앞의 ‘낙태 금지법’ 사례처럼 좀처럼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도덕적・종교적・사회적 신념에 사회가 어설프게 개입한다면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한 상호존중의 토대를 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 시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공동체안의 동료들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종교적・사회적 신념에 따른 서로 다른 의견을 애써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공동선의 도덕에 기초해서 공감을 이끌어 내도록 더욱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 보다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 없이 공동체의 연대감을 높이는데 더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공동선을 확립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에 대하여 석학들의 도움을 받아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하게도 행복한 삶에 대한 본질적인 정답은 찾질 못했다. 평등주의든 자유주의든 각자의 개인적 신념에 따라 주장하는 해답이 있을 뿐이다. 이제 조심스럽게 롤스의 차등원칙을 이어받아 마이클 샌델이 도덕의 가치에 기대어 공동선을 확립하도록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공론화에 나서자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출판한지 십 수 년이 넘게 흘렀고, 하버드의 수재들이 그의 열강을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인기리에 들었음에도 안타깝게도 미국이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낌새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2022년 현재 오히려 ‘낙태 금지법’ 부활로 논란이 끊이지 않고, 끊임없이 총기난사 사건이 반복 되어도 총기 규제에 대한 논의조차도 시도되지 않고 있다. 마치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와 붓다를 비롯한 도덕적 신을 따르고 있음에도 실제 삶의 현장은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빈부격차를 비롯한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희망은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석학들의 이야기는 첫째,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본능(욕구)은 이성이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둘째 행복을 풍요의 관점에 바라보고, 이의 분배 정의. 즉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을 분배하는 정의로운 방법에 대한 논의만 집중한 것이었다. 이를 희망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들까지를 고려해서 석학들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가야할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자 이제 대니얼 캐너먼을 비롯한 행동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어떤 정해진 본질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관점과 행복을 풍요와 함께 가치의 관점에서 행복한 삶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