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롤스의 정의
3.1.4. 개인의 권리 - 자유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일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희생시키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정의(Justice)’를 ‘자유’와 연결 지어 주장하기 시작한다. 마치 베이컨의 ‘신 아틀란티스(New Atlantis)’를 실현한 국가처럼 보이던 19세기 자유롭고 풍요로운 미국을 모델 삼아,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의 권리장전을 내세웠다. 이 권리장전에는 다수의 힘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종교 자유를 포함하여 다양한 자유들을 규정하고 있다. 이를 내세워 ‘정의’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점점 지지를 받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샌델에 의하면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치열한 정치 논쟁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유주의의 주장을 알아볼 차례인데, 그 전에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 보편타당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먼저 생각해보자. 이를 위해 그 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수없이 토론한 가설을 한번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참고 3.4]
가설 1: 당신은 시속 100km로 달리는 열차의 기관사인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멈출 수가 없다. 이때 저 멀리 5명의 인부가 선로 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열차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비상 선로가 있다. 그런데 그 선로에는 1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다. 그냥 달리면 5명이 죽고, 비상선로로 선회하면 5명이 사는 대신 1명이 죽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논의 1: 우리는 대부분 5명이 죽는 것 보다는 1명이 죽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한사람의 목숨을 희생하여 다섯 목숨을 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해 보인다.
가설 2: 상황이 바뀌어 이제 당신은 브레이크가 고장 나 멈출 수가 없는 상태에서 시속 100km로 달리는 열차를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다. 열차 앞에 5명의 인부가 선로 보수 작업을 하고 있고, 그냥두면 그 5명은 열차에 치여 죽기 직전이다. 그런데 비상 선로도 없다. 마침 당신 앞에 거인 같은 사람이 1명 서 있다. 당신은 이 사람을 밀어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1명은 죽겠지만 5명은 구할 수 있다.(당신이 희생할 수도 있지만 열차를 멈추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논의 2: 논의 1에 동의한 사람들은 역시 똑같이 한사람의 목숨을 희생하여 다섯 목숨을 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억지로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비록 선의라 하더라도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당신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직접 밀어서 죽게 하는 행위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한을 주었는가? 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요, 도덕성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는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과 선의라 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원칙이 상충하면서 발생한다. 아주 어려운 문제이고, 철학자들도 의견을 하나로 모아 정리할 수 없는 그야말로 딜레마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칸트가 이야기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존엄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은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가설은 앞으로 공리와 자유가 ‘정의’앞에서 서로 상충할 때마다 소환 될 테니 이쯤하고 이제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자유방임을 지지하는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에서부터 정치・사회적, 경제적 정책에 따라 매우 넓고 다양하다. 우리는 풍요를 대전제로 행복을 생각하는 공리주의와 대응하기 위하여 자유시장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로버트 노직(1938~2002)은 대표적인 자유시장주의자이다. 그는 1974년 그의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분배 정의에 반대하는 ‘최소국가’를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노직은 “오직 계약을 집행하고 사람들을 폭력과 사기, 절도에서 보호하는 기능만을 수행하는 최소국가만이 정당화 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떤 일도 강요받지 말아야 하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고, 그런 국가는 정당화 될 수 없다.”라고 주장 한다.[참고 3.7] 특히 노직은 존 롤스의 ‘정의론’의 한 원칙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가장 혜택 받지 못한 구성원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가는 단지 계약을 집행하고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수준의 최소국가면 충분하기 때문에, 국가가 그 이상을 수행하면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실시하는 다음 3가지, 온정주의, 도덕법, 그리고 소득과 부의 재분배 정책을 반대한다.[참고 3.4]
첫째, 온정주의 : 사람들을 위험에 빠지지 않게 국가가 법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인데,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지키는 자동차 안전벨트 의무화 법과 같은 종류의 온정주의 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이 설령 사고 시 심각한 부상을 경감 시키고 목숨을 구하는 장점이 있다 하더라도, 제3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이는 개인의 권리이므로 국가가 나서서 통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둘째 도덕법 : 국가가 미덕을 권장하고, 다수의 도덕적 신념에 따르도록 법으로 강제하겠다는 것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예를 들면 매춘 금지법이 잘못된 것 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춘이 비록 비도덕적이지만, 성인들 간에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위를 국가가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셋째, 소득과 부의 재분배 : 세금 등을 이용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법으로 강제하여 조정하겠다는 것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람이 빈곤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국가가 이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개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도둑과 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자유주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노직은 제3자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소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여 성인들 사이에 자율적이고 유효한 합의적 또는 비강제적 계약을 보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원칙이 지켜질 경우 심지어 노예 계약조차 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덧붙여 노직은 ‘분배 정의’가 구현 되려면, 공리주의처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의 ‘소유’에 관한 정의가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조건은 초기 소유물에 구현된 정의로 돈을 벌 때 사용한 자원이 원래부터 합법적인 소유물 이었는가? 둘째 조건은 소유물 이전에 구현된 정의로 시장에서 자유로운 교환으로 또는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건네준 선물로 돈을 벌었는가? 이다. 이 두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즉 부당하게 획득한 것이 아닌 한 현재의 소유물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이러한 분배의 결과가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정당하기 때문에 국가는 소유자의 동의 없이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참고 3.4]
노직은 이러한 분배 정의를 그 당시 인기 프로 농구선수 체임벌린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지만, 여기서는 2021년 넷플릭스의 최대 흥행작 중의 하나인 '오징어 게임'으로 이를 한번 다루어 보자. 이 드라마는 사회・경제적으로 막바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큰 상금이 걸려 있는 게임에 초대한다. 초대된 참가자들은 456명에 이르고, 이들이 총 6개의 어린이 게임을 하게 되며, 게임의 총 상금이 456억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게임이 게임에서 져 탈락하는 순간 바로 사망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것과 게임에 참가한 사람 1명당의 목숨 값이 1억 원으로 책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통과하여 최후의 승자 1인이 되면 총 상금 456억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이 죽음의 게임에 도전한다. 결과적으로 게임에서 탈락한 455명은 게임 중 죽거나 탈락 후 사살 당하고, 최후의 승자인 생존자 1인은 456억을 챙긴다.
이 무지막지한 드라마가 2021년 10월 한국사회 전체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빅 이슈에 함몰된 상황 속에서도 장안의 화제가 되는 것을 넘어 세계적인 화제가 되어 버렸다. 10월 2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월 17일부터 방영된 '오징어 게임'이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넷플릭스의 최대 흥행작으로 떠오르면서 이제 세계적 현상(global phenomenon)이 됐다"고 보도했다. 또 미 경제지 포춘(FORTUNE)은 '오징어 게임'을 지난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방송과 케이블쇼 40개의 시청자 수(18~49세 연령대)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인 전 세계 8200만 명이 시청할 것으로 추산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만든 '오징어 게임'에 무엇이 있기에 전 세계 젊은이 들을 매료시키고 있을까? 10월 1일 자 BBC는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현실사회에 지친 젊은이들의 분노가 비록 세상에서 소외를 받았어도 게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메시지가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게임이 쉬워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는 점과 ‘달고나’ 등 게임이 한국인에게는 향수를, 외국인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점 등의 부가적인 요소도 있긴 하지만, 국내외 여러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핵심 메시지는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가 반영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고 절차가 공정하기만 하면 세상은 정의롭고 건강한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두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 남을 이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게임의 절차가 공정하면 게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은 정의롭지 않아도 무방한가? 왜 모든 국내외의 미디어가 '오징어 게임' 현상을 분석하면서 아무도 이 부분을 다루지 않는 것일까?
이는 마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사회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 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마저도 자본주의 하의 계급사회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현 시스템을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통제 장치가 가동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마치 이미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1899년에 발표한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의 내용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베블런은 이 책에서 비정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쟁취한 자본권력을 가진 유한계급(Leisure Class)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약탈적·금전적인 사회적·문화적 권한을 누리며 노동 없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의 특권을 누리면서, 과시적 소비(가치와 상관없이 값이 비싼 것 선호)와 과시적 여가의 이용을 통해 그들의 약탈능력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문화적·사회적 통제와 정서적·이념적 통제를 하게 되는데, 전자는 애국심·민족주의·군국주의·제국주의 등이고, 후자는 경쟁적 소비주의가 바로 자본주의를 지키는 통제 장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재산의 규모가 사회적 권력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가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경쟁적 소비를 하게 되며 일단 경쟁적 소비의 악순환에 빠지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수입에 상관없이 만성적 불만에 빠지고 금전적 문화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다.[참고 3.8] 이러한 유한계급이 무위도식의 특권을 위해 발생하는 각종 정치·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오징어 게임’에서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오징어 게임'의 ‘비록 세상에서 소외받은 사람들도 게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현상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상은 자본가의 정서적·이념적 통제에 경고를 하고, 무한경쟁의 적자생존 프레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로 치부해서 인간이 원래 악하다는 부정적인 믿음이 이기적인 사회 구성원을 양산하는 ‘노시보’(nocebo) 효과를 일으키는 현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실제 현실은 코로나19로 다시 조명을 받은 블리츠(Blitz) 현상[세계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에 56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융단폭격을 자행했을 때, 영국국민들이 극도의 공포 상황에서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주의 보다는 오히려 이타주의, 동정심, 관대함 등 인간의 선함이 상승한 현상]에 의해 인간 존엄성 회복의 가능성에 도전해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세상이 아닐까? 우리 다 함께 이러한 정치・사회・경제 전반의 ‘정의’에 대하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오징어 게임’으로 돌아와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게임은 성인들 사이의 자유의사에 의해 각자 결정하였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샌델이 제시하는 2001년 독일의 로텐부르크에서 벌어진 식인 행위의 예를 한번 살펴보자. 마이베스는 아무런 보상 없이 죽어서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를 고기로 제공할 의사가 있는 사람을 찾는 광고를 인터넷에 올렸고, 이에 약 200명이나 반응했는데, 그 중 브란데스가 유일하게 마이베스의 제안에 합의하였다. 결국 마이베스는 브란데스를 죽여, 요리해서 20kg이나 먹어치우는 중에 체포되었다. 마이베스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독일에는 식인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 없었지만,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종신형을 선고한 사례이다.[참고 3.4] 이때 마이베스의 변호사는 자유주의자의 핵심 주장인 개인의 권리 즉, 성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합의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설사 적용한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죽음에 합의했기 때문에 일종의 안락사처럼 ‘요청에 의한 살인’ 죄만 인정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고 한다. 만약 자유지상주의자의 주장이 옳다면, 마이베스의 식인 행위를 금지하고, 결과적으로 종신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며,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목숨을 건 무지막지한 서바이벌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지상주의자의 ‘자유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샌델은 “우리 신체와 목숨은 우리 소유이며 따라서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근거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참고 3.4]고 말한다. 이상 살펴 본 ‘오징어 게임’이나 ‘식인 행위’의 사례에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핵심 사항은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가? 둘째, 제3자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소유를 보장하고, 성인들 사이에 자율적이고 유효한 합의적 또는 비강제적 계약은 반드시 보장해야만 하는가? 이다.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하여 자유주의 주장의 근본이자 이론적 배경인 우리는 칸트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존엄성의 교과서이지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일반인도 알기 쉽게 정리한 샌델의 설명을 내 방식대로 재정리해 보았다.[참고 3.4]
칸트(1724~1804)는 세계적으로 인권혁명이 일어나던 시기, 즉 미국독립혁명이 일어나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777년에 “도덕 형이상학 기초”를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8세기 당시의 혁명가들이 부르짖은 인권 뿐 아니라 현대의 보편 인권이라는 개념 정립에도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이는 칸트가 도덕의 대원칙과 이와 관련지어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들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칸트는 책의 서두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행복, 자유, 도덕의 세가지 요소를 소개하고 이를 하나씩 정의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첫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의 행복 극대화 방법, 둘째,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을 통한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 방법, 셋째, 재화를 분배하여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방법이 각각 정의로운 것인가? 에 대하여 살펴보고, 칸트는 첫째 행복 극대화 방법과 셋째 도덕을 포상하는 방법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다고 보았으며, 둘째 정의의 관점에서 자유를 중시하는 방법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칸트가 이야기하는 자유는 매우 어렵다. 칸트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타인의 강요 없이 단순하게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의 자율적인 행위 이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지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칸트의 ‘자유’에 대한 지혜를 한번 따라가 보도록 하자.
칸트는 “인간은 본능에 구속되지 않는 도덕적 자율성을 가질 때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며, 도덕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라고 선언하였다.[참고 2.10] 이 한 마디에 본능, 자율성, 존엄성(다른 생명체와의 구별), 그리고 도덕이 들어가 있다. 먼저 인간의 자율적 행위와 그의 결과를 칸트는 왜 모두 ‘도덕’과 연결하여 설명 하였을까? 이는 칸트 생각의 토대인 서양철학의 뿌리,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정리되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고, 인간은 선(善: 인간에게 좋은 것)을 목적으로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를 하며, 인간은 점점 더 상위의 선(善)을 계속하여 추구하다가 언젠가 최종적인 목적, 즉 최고선(最高善)에 도달하게 되는 데, 이것을 바로 행복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고, 이에 대한 인간의 행위 과정과 결과는 항상 선(善), 즉 도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칸트는 도덕은 결과적으로 인생의 목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시간,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발생하는 욕망, 호기심, 기호 등과 같은 경험적・본능적 요소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본능적 요소들은 우연성과 가변성을 갖고 있어서 목적으로서의 보편적・진리적 도덕의 원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인간의 욕구를 바탕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행복 원칙은 인간의 도덕성 확립에 전혀 기여할 수 없어, 결국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그를 선하게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게 할 뿐이기 때문에 칸트는 공리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목적인 도덕의 원칙이 될 수 있을까?
칸트는 이러한 도덕의 원칙을 다른 생명체도 다 가지고 있는 본능(욕구)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에서 찾는다. 칸트는 “목적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 아니면 존엄성 중 하나를 가진다. 가격을 가진 것은 동일한 가격을 가진 대용물로 대치될 수 있지만, 그에 반해 존엄성은 대용물이 허락되지 않는다.”[참고 2.10]라고 말하며 인간은 누구나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그 이유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에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는 존재이어서,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에 더불어서 우리는 이성적 능력 뿐 아니라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지각력도 있어서, 벤담이 주장한 ‘우리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 한다는 전제’는 인정하나, 쾌락과 고통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칸트는 “감성은 욕구 또는 본능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성에 의해 억제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이성이 우리 의지를 제어할 수 있으면,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 몰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우리가 언제나 완벽하게 이성적・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선택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이성적・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선택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성적・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선택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하고, 이 능력을 실천하는 것하고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순수 실천이성’을 깨닫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만 우리가 본능에 구속 되지 않고 언제나 완벽하게 이성적・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됨으로서 도덕적 최고 원칙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 이제 이러한 이성과 자율성에 기반 한 ‘자유’에 대한 칸트의 의견을 고찰 해 보도록 하자. 칸트가 주장하는 ‘자유’는 본능이나 사회 환경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스스로 자유롭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동이란 그저 주어진 목적에 알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고, 이는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분에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존엄성을 가지며,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칸트는 자유는 나 스스로 자유롭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이렇게 자유에 기반 한 모든 행동은 도덕으로 나타나게 되며, 이때 나타난 도덕의 가치는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우리는 이성에 의해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능력이 있지만, 언제나 모든 행동의 결과가 진정한 도덕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행동의 동기에 따라 결과가 도덕으로 발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행복한 삶이 진정한 도덕으로 발현되기 위한 최고의 원칙 세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의무동기, 자율성, 그리고 정언명령 이다.
첫째, 의무동기는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동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것이 뭐야? 라고 정색하며 물어 볼 수 있다. 칸트는 의무동기의 의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진 않았지만, 의무가 아닌 다른 동기를 예를 들어 제시하였는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거나, 본능적 욕구를 채우려는 시도 등이다. 칸트는 이를 끌림동기라 부르고 이와 대조를 통해 의무동기를 비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오만원짜리 지폐를 오천원짜리 지폐로 잘못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빵집에 들어와 천원짜리 빵을 하나 구입하고 오만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4,000원의 거스름돈을 받으려 할 때, 빵가게 주인이 그렇게 하지 않고, 상황을 잘 설명해주며 49,000원을 거슬러 주었다면, 가게 주인의 이러한 행동은 의무동기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끌림동기 의한 것일까? 만약 가게 주인이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어서 당연하게 그렇게 행동했다면 의무동기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 4,000원만 거슬러 주어도 되지만, 가게 주인이 만약 이러한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되어 소문이 나게 되면 장사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정직하게 거래하였다면,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옳은 행동이지만 근본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정직하게 거래한 것이기 때문에 가게주인의 행동은 끌림동기에 의한 것이고, 이에 따라 그 행동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타심에 의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동정심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선행동기 조차도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남을 돕는 일이 옳은 일임에 분명하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이타주의자들의 선행동기는 끌림동기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의무동기와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즉 이타주의자의 동정(선행)은 칭찬과 격려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지만, 존중까지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어떤 행동이든 의무동기에 의한 행동만이 그 행동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엄격하게 말하면서, 어떤 행동의 동기(선행동기 조차 도 포함)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어야지 즉 의무동기에 의한 행동이어야지 그 행동이 행복감(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자율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자연의 모든 것은 물리 법칙, 인과 법칙 등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본능(욕구)’과 ‘끌림’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이성’을 갖고 있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자연에 원래부터 이미 주어진 법칙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우리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만 있다면, 이성이 자신의 의지를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이성이 언제 어느 때나 의지를 항상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이성이 의지를 항상 지배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실천 이성이 도구로 간주되는 이성이 아니라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실천이성’일 때만이 언제나 의지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정언명령은 명령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고, 이에 따라 우리의 ‘순수실천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한 명령을 말한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이 의지에 명령하는 방법으로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가언명령은 ‘좋은 대학에 가고 싶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여라.’와 같이 공부를 하는 행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좋은 대학을 가기위한 수단으로서 언제나 조건이 따라붙는 명령이다. 이처럼 가언명령은 우리의 이성을 도구(수단)로 활용하기 때문에 오직 정언명령만이 도덕적 명령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율적이라는 의미의 자유를 추구하려면 가언명령이 아닌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해야만 한다고 칸트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채 명령을 내리는 실천 법칙”을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해야 우리의 이성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활용하는 정언명령을 실천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이를 위하여 두 가지 방법, 즉 ‘첫째, 행동준칙을 최대한 보편화하고, 둘째,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를 제시하였다. 먼저 ‘순수실천이성’에 부합하는 도덕적 법칙으로 행동준칙을 보편화한 상태에서 칸트는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똑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고 주장한다. 인간을 물건 취급하듯이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나 타인이나 똑 같이 이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 받아 마땅하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타인을 속인다든가,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아 가는 것, 심지어 이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타인을 목적으로 존중하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며, 심지어 자기 스스로 자살하는 경우에도 자신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칸트의 정언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인간 존중의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의한 애착, 즉 사랑, 공감, 소속감, 동료 의식 등과 같은 끌림동기에 의한 도덕 감정과는 엄연히 다른 의무동기에 의한 정언명령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자유는 자유롭게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의무동기에 의한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그리고 도덕법 또한 인간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즉 정언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도덕과 자유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사고로 공리주의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 즉 행복이나 공리를 도덕적 기초로 한 원칙은 언제나 조건적이기 때문에 도덕법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칸트가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제시한 행복, 자유, 도덕의 세가지 요소 중 마지막으로 남은 ‘자유’는 어떠한가? 자유주의자들이 근거로 삼은 칸트의 자유는 이들의 자유를 지지할 수 있는가? 이를 정리하기 위하여 로직의 자유에 대한 사례로 제시했던 ‘오징어 게임’과 ‘식인 행위’의 결론 부분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들 사례에서 우리는 존엄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의 논리에 대해 다음 두가지 의문을 가졌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가? 둘째, 제3자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소유를 보장하고, 성인들 사이에 자율적이고 유효한 합의적 또는 비강제적 계약은 반드시 보장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명확하다. 위 두가지 모두 ‘그럴 수 없다.’ 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자유’의 철학적 토대인 ‘의무동기’, ‘자율성’, 그리고 ‘정언명령’ 모두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수단으로 대하고, 의무동기가 아닌 끌림동기에 의하여 정연명령이 아닌 가언명령에 따라 언제나 우리의 이성을 수단으로만 활용하기 때문에 도덕적 명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도 인정하는 자유와 선천적인 불평등 혹은 계약 당사자 간의 환경이 불평등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계약, 그리고 낙오자를 구제하는 안전장치가 미비한 비도덕적인 자유시장까지 인정하고 지지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존 롤스의 생각은 어떤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3.1.5. 존 롤스의 정의(Justice)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평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로부터 촉발되어 서로 상반되는 형태로 겉돌던 평등과 자유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평등과 함께 자유를 개념적・상호 보완적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존 롤스(1921~2002)가 1971년에 출판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의 공리를 희생함으로서 성취되는 공리주의에서는 ‘정의’가 도출될 수 없고, ‘정의’는 이성적인 개인들이 각각 자유로운 상태에서 서로 완벽하게 평등한 상태에서 동의한 거버넌스의 원칙들에 의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참고 3.9] 롤스는 행복한 사회를 위한 ‘평등’과 ‘자유’를 각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함께 사회의 ‘정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바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칸트를 통해 ‘의무동기’, ‘자율성’, 그리고 ‘정언명령’ 모두를 위배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는 자유중에서도 롤스는 선천적인 불평등 혹은 계약 당사자 간의 환경이 불평등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의 자유에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원초적 평등한 상황’을 위해 롤스는 모든 개인이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정치・경제 및 역사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조건, 재능, 그리고 사회・경제적 능력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가려져 '원초적 상태'(original position)에 있는 한 가상의 집단을 상정한다. 따라서 이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롤스는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태의 객관적・상식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사회계약에서 ‘정의’의 두 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가언합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모든 개인은 동등한 입장에서 평등한 기본적 자유권을 갖는 자유 원칙이다. 둘째, 모든 개인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조건하에 동등한 삶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위해 조정될 수 있다.
롤스가 이야기하는 ‘정의’의 두 가지 원칙 중에서 아마도 첫째 원칙인 ‘누구나 평등한 기본적 자유권’에 대해서는 우리의 대부분이 가언합의에 동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사 우리가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상태가 아닌 실제 현실 상황에 노출되어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현대 민주시민 교육을 받아서 ‘인간의 평등과 자유에 대한 기본권’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원칙인 ‘차등원칙’이다. 이는 공리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불만은 있어도 배려해서 분배한다는 점에서 쉽게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주의자들의 경우, 앞에서 살펴본 자유에 대한 논리를 이유로 상당수가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롤스의 ‘차등원칙’은 사회에서 가장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일정 수준이하의 저소득층)에 한하여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이를 배려하는 원칙으로,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공리주의와는 다르다. 결국 롤스의 ‘차등원칙’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각각의 한계 속에서 많은 성찰 끝에 나온 절충안으로 생각 된다. 물론 롤스의 ‘차등원칙’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한걸음씩 양보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정당성·보편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따라서 롤스는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의 사회적 분배에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이 아닌 ‘우연성’의 개입에 주목하였다. 이 ‘우연성’은 첫째, 선천적 우연성, 둘째, 역사적·사회적 우연성을 말한다.
먼저 선천적 우연성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과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예를 들면 봉건시대에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과 노예로 태어난 사람, 현대사회로 말하면 대기업 회장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과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운 빈민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사회적·경제적 권리와 권력의 불평등이 매우 심하다. 그러나 이렇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적·경제적 환경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이러한 우연성으로 임의로 주어진다면 이는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이렇게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자가 주장하는 기회균등이 누구에게나 공식적으로 보장되는 자유시장이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분배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롤스의 생각이다.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는데,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누구는 출발선에서 뛰는데 누구는 80m 앞에서 달리는 것처럼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거나, 누구는 맨발로 뛰는데 누구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조건이 다르다면 이 경기는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따라서 롤스는 이러한 불공정을 개선하기 위하여 사회적·경제적 불이익을 해소하고 단지 형식적인 기회균등이 아닌 실질적인 조치, 예를 들면 저소득층 학생도 부유한 학생과 똑같은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사회적 우연성은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워서 모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 상태에서 각 개인이 똑같은 능력과 노력을 경주한다 하여도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의 배분이 같지 않고 임의성을 띄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매우 유능한 화가가 시대적 사조와 맞지 않아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궁핍하게 살다가 사후 어느 시점에서야 뒤늦게 능력을 인정받게 되는 경우라든가, 프로축구 선수 손흥민 선수 못지않은 재능과 노력을 경주했지만, 4~50년 전의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이 받쳐주지 못해서 손흥민 선수와 같은 부와 명예를 갖지 못한 선배 축구선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롤스는 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과 노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와 시대적 상황 등의 우연성도 작용해서 그에 걸 맞는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을 분배 받는 것이니 이에 합당한 부와 명예를 누리되, 그 일부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도록 사전에 합의하자는 것이다. 롤스의 차등원칙은 공리주의처럼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을 평등하게 분배하자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정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와 달리 개인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이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의 우연성을 고려하여 소득, 재산, 기회, 권력 등의 분배에서 우연성과 임의성을 최소화함으로서 논리적 정당성·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샌델은 롤스의 분배정의는 도덕적 자격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분배정의가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기는 합법적 기대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첫째, 자신이 아무리 우수한 능력이 있다하여도 이 능력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만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고, 둘째, 어떤 특정한 시기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역사적·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여 도덕적 보편성이 아닌 임의성을 갖는 점이다.[참고 3.4] 그러면서 미국 교사들의 평균 임금(4만 3000달러/년)과 방송 진행자 레터맨의 수입(3100만 달러)의 격차를 사례로 든다. 이 임금 격차가 롤스의 차등원칙에 따라 사회의 조세제도와 재분배 체계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도록 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레터맨이 교사들 보다 700배나 많은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설명한다. 레터맨이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은 TV 스타에게 돈을 쏟아 붓는 시대의 사회에 우연하게 살게 된 행운 덕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사가 대접받는 중세 봉건시대나 종교적 신실함에 가장 큰 포상을 주는 사회에 살았다면 레터맨의 재능은 덜 개발 되었거나 다른 재능으로 눈을 돌렸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롤스의 주장은 각 개인의 능력이 사회의 인정 여부에 따라 사회적 가치의 경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사회의 인정이라는 행운에 따라 부의 분배 격차가 생기는 것이니 이의 일부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내놓아야 한다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할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긴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참고 3.4]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난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이에 따라 롤스는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데 가언합의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자연의 분배 방식이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는 롤스의 이야기는 마치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보는 것 같다. 하늘의 태양이 떠있는 것은 특별히 누구를 위해 떠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냥 누구에게나 빛을 비추어 주고 에너지를 주고 있을 뿐이다. 누구는 그 빛 과 에너지로 생명을 얻고 살아가고 누구는 그 때문에 타 죽기도 하는 것이다. 롤스는 베이컨이 주장한 ‘신 아틀란티스’의 표상인 미국의 대학교수였다. 미국은 자유주의 천국이자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지만,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이기도하다. 이런 나라에서 롤스의 ‘차등원칙’은 대단히 용감한 주장이었고, 공리주의의 평등과 칸트의 자유에 대한 ‘순수실천이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으며, 샌델의 말을 빌리자면 미국 정치철학이 아직 내 놓지 못한,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현대의 미국은 세계의 신자유주의를 주도하고 있고,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의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좀 더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