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인류가 지난 600만년 동안의 세월 동안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 왔고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같이 살펴보면서 여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수백만 년 전 자연 속에서 우연하게 생겨난 우리 인류는 먹이를 찾아 넓은 광야를 떠돌다가 생존을 위해 함께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소속감을 바탕으로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상부상조하며 평등한 관계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불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 인류는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하였고, 먹이를 직접 재배하는 농경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BC 2,000 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비옥한 땅을 찾아 4대문명지역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인구가 몰려들어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한정된 공간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이는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질수록 이에 상응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다가 결국 BC 1,500 년대 이후부터는 계급사회를 고착화하고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폭력과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들어 버린 것이다. 이에 ‘축의 시대’의 성현들이 좋은 삶의 지혜를 설파하였으나 권력과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탐욕에 눈이 먼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폭력과 전쟁의 상황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우리 인류가 출현한 후 대부분의 세월 동안 소속감을 기반으로 상부상조하며 평등한 삶을 살다가 조금 풍요로워져 사유재산이 생기면서부터 계급사회가 되고 불과 우리 인류 생존기간의 1%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를 따르기 보다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차지하기 위하여 폭력과 전쟁을 불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류의 서사시 중 가장 오래된 “길가메시(BC 3,000 년)”에 묘사된 당시 인간들이 보여주는 모습들과 그 후 수천 년이 넘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어마어마한 기술 발전과 풍요의 문명을 이룩하고 누리며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욕망을 품고 이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교만하고 환희와 좌절을 왕래하는 삶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보편성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그러는 사이 우리 인류는 19세기 이후 과학과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그에 따라 세상은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풍요로워질수록 오히려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제국주의에 의해 폭력과 전쟁의 규모도 세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엔 두 차례에 걸친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성은 말살되고 세계는 초토화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인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염세주의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 처한 우리 인간은 심기일전하여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저지른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꽃을 피워 내었다. 서로 머리를 맞대어 국제연합(UN)을 만들고, 1945년 6월에는 국제연합 헌장을 선포하였으며, 마침내 1948년에는 UN 총회에서 인권선언문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마치 세계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에 56일간의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한 블리츠(Blitz)동안 아비규환의 공포 상황 속에서 혼자만 살겠다는 이기주의 보다는 오히려 이타주의, 동정심, 관대함 등을 영국국민들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 인류가 다시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에 귀 기울이고, 비로소 칸트의 존엄에 관한 무조건적인 명령을 우리의 의무로 받아들인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을 반드시 따라야하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규정하였다. 칸트는 인간은 비록 자연의 동식물, 산, 강과 같이 각자 나름의 쓸모가 있는 ‘보편적 가치’를 가진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들과는 다른 ‘존엄성’이 있다고 설파한다. 이에 대하여 칸트는 인간이 본능에 구속되지 않는 ‘도덕적 자율성’을 가질 때 다른 생명체와 구분이 되며, 도덕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참고 2.10] “인간은,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너 자신의 인격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도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 칸트는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인격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위배되지 않을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노예로 부리거나, 나의 목적을 위하여 누군가를 이용하는 등 수단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쯤해서 공자의 인(仁)의 실천 규범인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 떠오르지 않는가? 공자는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재미있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힘들고 위험해서 내가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떠맡기는 한마디로 상대야 어떻든 나는 무위도식하며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특혜를 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네가 일어서고 싶으면 먼저 남부터 일어서도록 해주고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남부터 먼저 이루도록 하라는 것이다. 바로 칸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목적의 왕국에서는 가격 아니면 존엄성,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가진다. 가격을 가진 것은 동일한 가격을 가진 대용물로 대치될 수 있다. 그에 반해 모든 가격을 넘어서는 것, 대용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존엄성을 가진다.” 칸트는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있고,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할 대상이기에 그 누구도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강압이나 폭력에 의해 다른 대용품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UN 인권선언문’ 제1조에 다음과 같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 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즉 우리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 나서야 1948년 전 세계가 UN에 모여서 늦게나마 다행스럽게도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와 칸트를 소환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합의하고 모든 인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든 모두가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의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정신으로 행동할 것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인류는 귀족, 평민, 노예 등의 계급사회에서 오늘날의 민주체제인 평등사회로 대전환을 이루고 인권 신장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실 아직도 일부 독재체제에 의한 인권유린은 계속되고 있고, 대부분의 나라가 정치사회적으로는 평등사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여전하고 이에 따른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노동 착취 또한 여전히 우려스러우며, 국가 간 패권 경쟁은 여전해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왜 우리 인류는 UN을 조직하고 스스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하고도 아직도 유의미한 실천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노자의 지족자부(知足者富)를 실천하지 못하고 스키델스키의 How much is enough?라는 질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유한계급(leisure class) 그것도 최상층을 향해 불나방처럼 몰려가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한 해답은 현대 진화 심리학자들의 우리 인간의 행복에 대한 정의에 있지 않을까? 즉 우리 모두가 원하는 좋은 삶, 행복한 삶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철학적 명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의 결론은 인간의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험이고, ‘행복(욕망, 쾌감)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 인류 출현 초기에는 이 행복이라는 도구가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작용하였으나, 어느 정도 풍요로워져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무위도식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향한 탐욕으로 작용하여 무한경쟁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사실 칸트는 “감성은 욕구 또는 본능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성에 의해 억제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이성이 자유의지를 지배하여 의무동기, 자율성, 그리고 정언명령을 실천함으로써 진정으로 도덕적인 삶,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덕적이고 행복한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의지의 나약함’ 때문이고, 칸트에 의하면 순수 실천이성을 갖추지 못하여 우리의 의지를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니 아리스토텔레스도, 칸트도 해결책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마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예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경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암송하여 예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배고파 길거리에 쓰러진 이웃을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하는 독실한 신도처럼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붓다의 자비를, 노자의 도덕을 소귀에 경 읽기 하듯이 암송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칸트의 이성에 대한 이원론적 본질에만 매달려서 쩔쩔매며 헤매다가 서양 철학도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거대한 흐름을 전환하기 시작 하는데, 이는 헤겔의 관념론을 거쳐 니체와 사르트르로 이어지면서 현대 철학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니체와 사르트르를 통해 우리의 밀린 숙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니체(1844~1909)가 살던 19세기 말은 산업혁명과 이로 인한 자본주의 출현으로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무너지면서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부패로 말미암아 구원이라는 기독교 전통의 가치가 약화되어 가고 있던 시기로 그 당시 세파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삶의 허무함에 빠져 염세주의에 빠져 들어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대표적으로 대변한 철학자가 쇼펜하우어(1788~1860)이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과 칸트를 공부했지만,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영향 또한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고 사는 이유도 죽는 이유도 없다.”고 이야기 한다.[참고 3.24] 그 당시까지 아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굳건하게 믿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 즉 하느님의 나라가 있고, 하느님의 축복으로 특별하게 인간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동양 철학의 관념론처럼 세계의 질서 속에서 우연하게 태어나 우연하게 살다가 우연하게 죽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생존을 위한 욕망을 기본 속성으로 가지고 있고, 이 욕망 때문에 “삶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처음엔 생존을 위해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욕망은 끝이 없어서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바로 새로운 욕망이 자리를 잡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욕망은 무한하고 이를 성취하여 충족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의 아픔을 맛 볼 수밖에 없고,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자신의 존재 이유는 더욱 약해져서 자기 자신 보다는 욕망의 대상을 더 소중하게 여겨 정작 소중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이러한 고통의 늪 속에서 삶이 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우리의 좌절과 권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하였는데, 이는 바로 금욕주의, 자연과 예술에의 심취, 그리고 철학적 삶의 지혜라고 하였다. 하지만 금욕주의는 우리의 본성인 욕망을 억지로 억누르는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고, 자연과 예술에의 심취는 아름다움을 즐기는 순간순간의 일시적인 것이며, 철학적 삶의 지혜로 사는 것은 우리가 칸트의 순수실천이성을 갖지 못하는 것에서 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무가치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꼭 살아내야만 할까? 아니면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이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니체는 대학생이던 어느 날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이에 심취하여 플라톤의 이데아, 기독교의 천국, 칸트의 이성은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고, 쇼펜하우어와 같이 관념론적 세계관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니체는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히 죽는 이런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우리의 좌절과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나만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초인(Übermensch)사상을 피력함으로서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강조한 것이다.[참고 3.25]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해버린다. 기독교 전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서구사회 한복판에서 감히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을 부정해 버린 것이다. 이 세상은 기독교적 하느님이 마스터플랜을 갖고 우리 인간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스스로 그러한 세상에 우리 인간이 우연하게 태어나 살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허구헌날 고달픈 삶에서 구해달라고 신에게 징징대는 노예도덕을 버리고, 과감하게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군주도덕을 취하는 초인이 되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헛된 희망을 버리고, 그저 이 세상에 충실한 삶을 살면 영겁회귀 하는 초인의 삶을 영원하게 살 수 있으니 허무주의를 버리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바로 노자의 거피취차(去彼取此)를 닮았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즉 저 하늘나라의 천국 말고 바로 여기 현실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은 우리의 목적과 의지 그리고 우연이라는 두 가지 영역이 혼재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삶은 우리 의지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우연의 영역은 예측이 불가하여 두렵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는 이를 주사위 놀이로 설명하였는데, 주사위를 던지는 의지와 행위는 우리의 목적과 의지이고, 허공에 던져진 주사위는 우연이며, 땅에 떨어져 1부터 6까지의 조합중 하나가 반드시 나오는 상황이 필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예측 불가한 우연 때문에 시련과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는 초인(Übermensch)의 사상으로 삶에 대한 가치 있는 목적과 의지를 다진 다음, 우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거침없이 나아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마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라고 외친 것처럼, 공자가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가치 있는 목적과 의지는 어떻게 설정하고 이를 거침없이 실천해야할까? 니체는 세상의 가치를 극복하고 나만의 가치를 창조하라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고통을 거름삼아 위대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초인이 된다고 말했다.[참고 3.26] 현대에 미셀 푸코(1926~1984)가 “본질이나 중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준이 돼 결국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라고 주장하며 문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세상의 프레이밍인 ’규율 권력‘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자신만의 가치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설사 자신의 꿈을 성취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낸 사람조차도 은퇴 후에 인생이 허무하게 생각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보다는 세상에 맞추어 살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프레이밍 한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지 말고, 여기에서 탈출하여 각자가 자기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의 시대에는 기독교 윤리가 세상의 가치였고, 현대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시장을 표방하지만 부익부 빈익빈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자본경제가 세상의 가치인데 이러한 프레이밍에 속박되지 말고 과감하게 탈피하여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기 자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능, 의지 그리고 잠재능력 모두를 일깨워 서로 최대의 시너지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니체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요, 현대의 진화심리학자가 이야기하는 행복(욕망, 쾌감)이다.
바로 이점을 높이 평가하여 니체를 현대 철학의 시발점이자 근원으로 보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근대 철학이 이성을 인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이성의 본질을 추구하는 이성의 시대였다면 니체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며, 본능 즉, 욕망(육체)의 시대의 문을 활짝 열고, 현대 철학의 길로 안내한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 철학자 들뢰즈(1925~1995)는 그의 저서 ‘니체와 철학’에서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 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참고 2.9] 이러한 니체의 관념론적 철학은 사르트르(1905~1980)와 카뮈(1913~1960)의 현대 철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르트르는 니체의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하게 죽는다.”는 관념론적 세계관을 이어받고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을 받아들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과 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즉 ‘이데아’, ‘이성’ 등의 본질은 칸트의 물자체(thing in itself)처럼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학문적 탐구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 보다는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 즉 본능에 기반 한 자신의 자유의지로 규율권력을 넘어 자신만의 가치 창조를 추구한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르트르는 스스로 존엄한 자신과 스스로 존엄한 타인사이의 관계, 즉 연대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이는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우리 인간의 행복을 한마디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 하는데, 여기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니체의 권력의지이고, ‘좋은 사람과 함께’는 사르트르의 관계가 바탕이 되어 표현되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니체의 권력의지는 규율권력을 넘어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 그리고 ‘존엄’에 대한 바탕이고, 사르트르의 관계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기반으로 ‘자유’와 ‘자유’ 그리고 ‘존엄’과 ‘존엄’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선’에 대한 바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에 대한 사르트르의 생각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존재와 무(1943년)”에서 두 차례의 처절한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하면서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선언한다.[참고 3.27] 여기서 사르트르의 본질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는 그 존재에 대한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 의도와 목적이 만들어지는 존재의 본질이다. 예를 들면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져 존재하게 되므로, 본질이 존재를 앞선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리 존재의 본질인 우리를 존재하도록 하는 의도와 목적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조주인 신은 후설이 이야기한 것처럼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학문적 탐구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객관적 실체로서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우리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이에 따라 우리 인간은 우리를 창조한 의지와 목적 즉, 본질도 모른 채 이 세상에 존재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은 미리 설정된 본질이 없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만약 우리 인간에게 우리를 존재하게 한 의지와 목적, 즉 본질이 있다면, 우리는 미리 설계된 목적대로만 살아가야하는 존재, 즉 노예처럼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된다. 우리 인간은 본질이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문제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한 결과에 대해서 항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일정한 기준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자유 의지 이외에는 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매 순간 선택과 행동을 할 때 마다 불안하고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르트르는 “인간은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자,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진 존재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을 기반으로 사르트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식’과 ‘의식의 대상’으로 구분 하였다. 여기서 의식은 우리 인간처럼 존재하는 것을 현상적으로 인식하여 해석할 수 있는 존재로 이를 ‘대자’라 하였고, 의식의 대상은 바위처럼 자신은 인식 능력이 없는 그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이를 ‘즉자’라 하였다. 이러한 대자는 지향성을 갖고 있어서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의식(반성적 의식)과 그런 자기를 인식하는 의식(전반성적 의식)의 이중적 의식을 갖고 있다.[참고 3.27] 따라서 대자가 지향성으로 즉자를 인식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대자가 또 다른 대자를 인식할 때는 그 순간 대자를 현상적으로 인식된 즉자로 인식할 뿐 아니라 그런 자기를 인식하는 전반성적 의식도 자신을 대자가 아닌 즉자로 인식하여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우리(대자)가 바위(즉자)를 인식하는 것은 마치 카메라로 바위의 현상을 포착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내(대자)가 어떤 사람(대자)을 인식하는 것은 반성적 의식으로 그 사람의 그 순간의 현상적 이미지를 카메라 사진처럼 즉자로 인식함과 동시에 전반성적 의식으로 자신의 느낌(직관)으로 인식함으로서 어떤 사람(대자)을 그의 본 모습이나 본질이 아닌 즉자적으로 현상적이고 직관적인 그 순간의 모습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앞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행동경제학의 대부 대니얼 카너먼(1934~현재)이 생각나지 않는가? 카너먼이 그의 저서인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생각은 시스템 1(직관적 결정)과 시스템 2(이성적 결정)의 2가지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연동하며 작동해서 실제 판단과 선택으로 구현[그림 19 참고]되는데, 시스템 1은 바쁘고 시스템 2는 게을러서 오류에 빠지기 쉬어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주장 말이다. 이러한 카너먼의 주장은 사르트르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다시 사르트르로 돌아와서 그의 생각을 좀 더 따라가 보자.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나 이외에 타자가 존재하고, 이 타자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대자적 존재이면서, 타자의 시선 속에서는 즉자처럼 하나의 객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타자들 속에 있는 나는 그 수많은 타자의 시선에 각각 즉자로 인식되고, 즉자로 노출된 나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 한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에 타자 시선에 즉자로 노출된 나의 세계는 강탈당한 상황이라서 이때 나에게 주어진 자유는 한계에 빠져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참고 3.27]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 하였고, 타자의 시선에 노출된 나는 타자가 주체이고, 내가 객체이지만, 반대로 나의 시선에 노출된 타자는 내가 주체이고 타자가 객체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관계는 서로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기 위한 시선의 투쟁 과정에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에 따라 사르트르는 나의 자유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따른 책임과 타자를 즉자가 아닌 대자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해져야만 서로 연대를 이루어 공동선의 좋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카너먼의 시스템2가 제대로 가동하여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도록 노력하고, 상대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해야만 제각각 착각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현대 진화심리학자가 행복이라고 정의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삶”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기반으로 한 ‘개인의 자유’ 그리고 ‘존엄’이 보장되고, 사르트르의 관계인 ‘자유’와 ‘자유’ 그리고 ‘존엄’과 ‘존엄’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가능하며, 이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존엄성 회복’으로 실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추구해야할 존엄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존엄’은 로마의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인간을 특정 짓는 것이 바로 숭고하고 우월한 태도, 그리고 존엄이다.”[참고 2.10]라고 이야기한 그러한 존엄이 아니다. 즉, 로마시대에 귀족의 지위를 가지고 사회적 명망이 있으며 관직에 오른 사람을 칭하는 그런 존엄,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최고 존엄이라 떠받드는 그런 존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칸트가 이야기하는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존엄을 말하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 즉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가지는 존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나 자신의 인격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도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고 대우받을 수 있는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인류의 생각은 두 차례의 처절하고 무자비한 세계대전을 치른 후에야 그 황폐한 잿더미 속에서 ‘세계 인권선언’으로 꽃을 피워냈다. 이는 히틀러의 광기에 휘둘렸던 독일로 이어져 1949년 독일헌법 제1조의 1항에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 권력은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라고 선포한다. 그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헌법으로 규정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1962년에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였다. 이렇듯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하고, 헌법에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봉건시대와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지 실상은 인간이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우리는 우리 인류가 스스로 설정한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의무를 저버리고 있을까? 축의 시대의 성현들의 가르침과 칸트에서 니체, 사르트르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사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인가? 사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근대에는 우리가 우리를 존엄한 존재로 만들어준 이성이 본능(욕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지의 나약함’때문이라 했고, 칸트는 ‘순수실천이성’을 갖추지 못해서라 분석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인간의 권력의지(본능, 욕망)가 이 사회에 이미 문화와 문명으로 형성된 규율권력을 넘지 못하여 예속되고, 타인을 즉자로 바라보는 시선의 투쟁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서양철학은 근대적 해석이든 현대적 해석이든 간에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이원론이냐 일원론이냐의 차이일 뿐 삶의 실천은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가 기본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이나 자아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동양철학은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를 깨닫고, ‘생이불유(生而不有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와 위이불시(爲而不恃 : action without self-assertion)’ 즉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능한 약하게 하여 물이 흐르는 것처럼 세상의 진리와 질서에 따라 살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차이점에서 우리 인류의 숙제인 존엄성 회복의 실마리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서양철학이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칸트를 기점으로 헤겔, 니체,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양철학의 일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붙잡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사르트르가 상대를 즉자가 아닌 대자로 대해야한다는 자유와 자유의 연대를 제안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권력의지, 즉 자유의지를 우선하는 한 현대의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빙자하여 빈부격차를 더욱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치달리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상황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인간의 생각이 현대의 인간을 넘치도록 풍요롭게 하고, 우리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을 창조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인류가 이런 생각을 계속 고집해서 살아간다면 가까운 장래에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결국은 6차 대멸종을 초래하여 최상위포식자인 우리 인류가 전멸할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주역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인 것이다. 궁하고 막히면 스스로 먼저 변해야하고, 내 생각과 신념, 행동이 변해야 해결할 방법이 나오는 것이며, 그런 해결책이라야 오래가는 것이라는 가르침 말이다. 즉 우리 인류가 ‘이 세상이 우리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 ‘우리 인간은 이성적이어서 합리적이다.’라는 생각이 ‘우리 인류는 자연의 동물과 식물들처럼 이 세상에 속한 존재라는 것’과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게랄트 휘터가 “인간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스스로 바꾸는 것”이라고 제안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류는 무위도식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향한 탐욕으로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이 아닌, 다시 말하면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에서 ‘음식을 먹는 것’의 풍요 보다는 ‘좋은 사람과 함께’라는 연대의 가치에 방점을 찍자는 것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연대의 가치’는 우리 인간사이의 관계를 넘어 자연과의 관계로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이요, 우리는 이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존엄성 회복을 위해서 다음 사항을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세상은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천지불인(天地不仁)하지만,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스스로 그러한 세상 속에 우연하게 태어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하고 있는 여러 생명체 중의 하나에 불과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마치 태양이 차별 없이 온 세상을 비추듯이 먼지가 자동차 보닛(bonnet) 위에 아주 고르게 자리하듯이 이 세상은 화광동진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어느 특정대상만을 위하고 가엾게 여겨서도 아닌 천지불인 한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진리와 질서 속에서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 즉 자유의지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우리 인류가 살아오면서 만들어 놓은 문화에 의한 사회의 규율권력 속에서 헤매지 말고 이를 과감하게 타파하고 온전한 자신만의 자유의지로 세상을 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간에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기 어려워지고, 카너먼의 지적처럼 비합리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시스템2를 가동하지 않고 상대를 즉자로 대하여 착각의 오류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신의 비합리성을 인식하려 노력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합리적이라는 확증편향에 빠져 있기 때문에, 풍요가 넘쳐흐르는 현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만족할 줄 모르고 적자생존과 무위도식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은 진정한 존엄성 회복을 위해 가능한 한 자신의 자유의지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흐르는 물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선약수(상선약수)의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이러한 세상의 질서를 따르겠다는 우리 생각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우리는 약 138억 년 전부터 존재해온 이 세상에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서 언젠가 우연히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현재를 내 자유의지로 살든 규율권력에 구속되어 살든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세상의 것을 빌려 살고 있다는 사실, 즉 내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도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어떤 것도 나의 소유가 아니라 니체의 우연과 필연에 의해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자신의 자유의지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세상의 질서를 따르겠다는 우리 생각의 대전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에릭 시노웨이의 “삶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무엇을 비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즉 지금까지 채움의 풍요만을 위해 쉼 없이 달려 왔다면, 이제 부터는 비움의 가치를 인식하고 우리의 자아상, 가치관, 신념을 풍요에서 가치로 중심 이동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예수, 붓다, 노자의 가르침을 오해해서 모든 것을 다 비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채움의 풍요로 너무 기울어 있던 가치관의 비중을 채움의 풍요와 비움의 가치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슬기롭게 제어하자는 것이다.
둘째, 칸트의 존엄을 사르트르의 연대로 확장하자.
케네스 밀러는 그의 저서 ‘인간의 본능’에서 “우리가 행복, 우정, 사랑을 추구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성취하려는 욕망이 우리 선조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심리에 새겨진 적응이기 때문이다.”[참고 2.3]라고 이야기 했다. 한마디로 현대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우리의 모습은 누군가의 마스터플랜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니체가 말하는 우연과 필연에 의해 지금까지 진화되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우리의 이러한 사회적 행동의 원천을 다음과 같은 진화적 관점으로 설명한다. “신화, 의식, 상징을 중심으로 응집할 수 있었던 사회집단은 종교가 없는 사회집단에 비해 식량을 구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자식을 나아 기르는데 더 효율적이었고, 따라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적 재능을 현대의 인류에게 전승하는데 성공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류 존재 기간의 99% 이상을 부족사회를 이루어 상부상조의 평등한 삶을 살아왔고 이를 뼛속 깊이 새겨 간직하며 유전적 재능으로 현대의 인류에게 전승한 우리가 어찌하여 스스로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 기간의 불과 1%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풍요를 얻는 대신에 계급사회를 만들고 무위도식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향한 탐욕으로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으로 폭력과 전쟁도 불사하는 신자유주의의 현대를 맞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압인 욕망(행복),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욕망이 생존을 위해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지만,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풍요로워질수록 더욱 커져 서로 죽고 죽이는 무한 경쟁의 이전투구를 지속하며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러한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을 극대화하며 추구하면서도 우리가 ‘축의 시대’의 성현들의 가르침인 덕(德)을 기본으로 우리의 문화와 문명을 구축해온 덕분에 폭력과 전쟁이 극에 달하여 우리 인류가 극도의 공포와 생존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개인의 이기심 보다는 이타주의, 동정심, 관대함 등 인간의 선함이 오히려 상승하고, 인간의 본성인 덕(德)이 소환되어 위기를 극복해 왔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칸트의 존엄과 자유를 UN의 세계인권선언으로 꽃피웠고, 각 나라의 헌법에 인간의 존엄성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마치 성경에서 예수가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는 가르침을 우리, 특히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러 온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처럼, 나의 존엄과 나의 자유만을 중심으로 하는 직관적 생각으로 살면서 자신만의 존엄과 자유를 만끽한다. 이는 자유계약, 자유시장 만능주의로 법적,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의 자유계약은 약자의 절실한 생존의 조건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공정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현대의 신자유주의가 빈부격차를 극대화하고 사회를 양극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존엄만큼, 타인의 존엄도 존중하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칸트의 존엄을, 타인을 즉자가 아닌 대자로 대하는 사르트르의 연대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만이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약육강식에서 이긴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를 한 '종' 이 더 우수한 형태로 살아남는다는 주장을 하며,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협력하는 것은 내 몸속의 유전자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이기심보다는 이타심, 즉 내가 잘살기 위해 남을 도와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살면서 사르트르가 인간이라면 처할 수밖에 없는 이중성, 즉 우리에게 우연히 주어졌으나 마음대로 바꾸기 힘든 나의 상황(결정론)과 이 상황 속에서 나의 선택으로 나의 삶을 만드는 것(비결정론)에 처할 수밖에 없고, 이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 개인의 삶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결정론 속에서도 첫째 항의 이 세상은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채움의 풍요와 비움의 가치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도록 제어하면서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존엄성의 회복인 것이다.
셋째, 마이클 센델의 공동선의 삶으로 프레이밍하자.
샌델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 둘째, 자유시장의 도덕적 한계의 공론화, 셋째, 공동체 연대를 통한 불평등 해소, 넷째, 도덕에 기초하는 사회의 네 가지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네 가지 주제에 대하여 성공적인 해법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위 첫째항의 세계관과 둘째항의 개인의 자율성 보다는 소속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 각 개개인의 존엄에 대한 소양을 육성해야 한다. 당연히 이를 위하여 학생들의 정규 교육과정과 성인 평생학습 등의 사회교육과정에 이러한 시민 교육이 필요하다. 그 다음 이러한 소양을 바탕으로 사회운영체제에 적어도 ‘욕망’과 ‘연대’에 대해서만큼은 카너먼의 시스템1만이 아닌 시스템2가 연동하여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선의 프레이밍을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욕망을 필요이상으로 끊임없이 부추기는 쉴러의 피싱(Phishing)을 적절하게 규제하도록 도덕공동체 안에서의 윤리강령을 운영하고, 자본주의의 무한한 탐욕에 맞설 수 있는 스키델스키의 7가지 기본재(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를 충족시켜줄 수 있도록 사회 공공영역에서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동선의 프레이밍은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을 보장함으로서 필요 이상의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나 개인만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의 연대로 가치관을 확장하여 공동선의 행복한 삶을 누리며 채움의 풍요 보다는 비움의 가치에 ‘마음씀’을 이동하게 되는 존엄성 회복의 선순환을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우리가 살아온 우리 생각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축의 시대’ 성현들의 가르침, 그리고 이에 기반 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삶의 지침까지 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우연하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어려운 상황들을 지혜롭게 극복하여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 나아 가기 위해서는 위 세 가지 사항을 우리 각자 각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가소성(Plasticity, Flexibility)이 있어서 이미 잘못 형성된 자아상이나 신념도 얼마든지 리셋팅하고 새로운 자아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포함하여 우리가 공동선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어떻게 자아상을 재설정하고 실천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논의하기로 하자.
3.1 다음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사상”,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58467
3.2 김수환 추기경, “바보가 바보들에게”, 산호와 진주, 2019.
3.3 다음백과, “마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7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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