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뚜라 23화

4.2 존엄성실천하기_1

4.2.1. 세계관의 확장과 보편성 확립

by 이성룡

4.2 존엄성 실천하기


우리 인류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창조되고 이 세상을 마음껏 누리도록 선물 받았다고 생각하든, 끊임없이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 속에서 윤회하고 있는 제법무아의 존재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우주의 변화와 자연선택 과정 속에서 우연하게 생겨나 적자생존의 진화를 하고 있는 생명체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든 이것은 우리 인류 사이에 현재도 논란 중이니까 논외로 놓아두기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칼 세이건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인류는 단순히 우주의 먼지만으로 이루어진 동물들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이긴 하지만, 아마도 생각이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낸 우주까지도 이해하게 된 유일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우주가 우리 인류를 이렇게 진화시킨 것이 우주의 목표인지, 어떤 특정한 계획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는 물론 이 세상까지도 분석하고 설명할 능력을 가진 우리 인류를 만들어 낸 우주, 적어도 지구는 이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거칠게 표현하면 한마디로 이 세상의 운명이 우리 인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의 생각과 행동 여하에 따라 지속가능한 세상이 될 수도, 치명적인 파괴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류가 어느 길을 선택하든 이 우주는 마치 강물이 흐르듯 그 상황에 맞게 변해 가면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순환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운명을 손에 쥔 우리 인류가 지금처럼 풍요만을 쫓으며 계속 살아간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세상을 우리 생각대로 변화시켜버린 대가로 6차 대멸종을 이끌어 내, 우리 존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운명을 맞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처럼 회복 불가능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더 나아가 그 후속 세대들에게도 누릴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공동선의 좋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우리 모두가 게랄트 휘터의 말처럼 우리 인간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생각을 스스로 세상에 맞게 바꾸고 이를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동안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 왔는지 등을 ‘2장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개략적으로 함께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위하여 살고,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하여 ‘3장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서 함께 논의하였다. 자 이제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하여 말, 단지 구호만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에 대하여 논의해 보도록 하자. 이를 “3.2 가야할 길”의 그림 3.4의 자동제어 개념으로 설명했던 WOOP 사고법을 적용한 인간의 욕망 제어 프로그램에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자 우리가 가야할 길이 우리의 존엄성을 회복해서 우리 인간과 세상이 조화롭게 상호작용을 함으로서 공동선을 취하는 것이라면, 그림 3.4의 WOOP 사고법에서 목표(Wish)는 실현가능한 욕망이어야 하고, 성과(Outcome)는 풍요와 함께 가치에도 방점이 찍혀있는 삶이어야 한다. 여기에 방해 요소(Obstacle)와 계획과 실천(Plan & Action)은 그림 3.4의 욕망 제어 프로그램이 어떠한 상황과 악조건에서도 실패와 좌절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욕망이 제어되어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제어 프로그램 스스로 강인성(robustness)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제어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그림 3.4의 욕망 제어 프로그램을 그림 3.2의 인간의 본성, 그림 3.7의 인간의 비합리적 결정과정, 그리고 그림 4.1의 뇌의 가소성에 의한 자아상의 수정 등과 결합하여 우리가 자아상을 제대로 설정하여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하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 그림 4.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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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2. 존엄성 실천하기


그림 4.2에서 보는 것처럼 플라톤과 칸트의 이성이 되었든, 맹자의 4단7정의 본성이 되었든 우리의 마음자리에 자아상을 형성하고 있다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입력과 어떤 상황에 따라 마음결이 일어 단순화 과정으로 처리할 것인지 아니면 자아상의 지시에 따라 일관성으로 처리할 것인지 결정한다. 여기서 단순화 과정의 일부 즉, 자동화 프로그램이나 문제회피전략의 일부는 생각하는 과정 없이 즉, 마음 씀 없이 곧바로 우리의 행위와 행동으로 진행하여 마음씨로 나타난다. 하지만 외부 입력과 상황에 따라 자아상의 통제 하에 일관성을 채택하거나, 단순화의 문제회피전략 중에서 일부가 생각하는 과정을 채택한 경우 우리는 그림 4.2에 보인 마음 씀 즉, 시스템 1(Fast Thinking)과 시스템 2(Slow Thinking)의 유기적 연동에 의한 우리의 믿음과 생각, 즉 의지를 결정하고, 이 의지에 따라 우리의 행위와 행동, 즉 마음씨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표상과 방향이 올바르고 가치 있게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를 제대로 실천하여 공동선의 삶을 건설하려면 보편적 세계관과 연대의 가치 그리고 욕망의 제어 등으로 자아상을 재정립하고 직관오류와 확증편향 등의 보정을 통한 합리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우리 각자가 설정하고 있는 지엽적이고 편향되었을지도 모르는 세계관을 어떻게 확장해서 보편성을 확립할 것인지, 브레이크 없는 욕망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제어할 것인지, 제어의 수용성과 강인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존엄성을 회복한 자아상이 착각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 합리성을 확립할 것인지, 이에 따라 존엄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4.2.1. 세계관의 확장과 보편성 확립

우리는 “2.1 우주의 탄생과 소멸”에서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즉 우리를 포함한 이 우주는 137억 년 전 빅뱅으로 탄생해서 앞으로 약 60억 년 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소멸하게 될 것이고, 마치 푸른 하늘 위의 하얀 구름이 시나브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듯이 약 200억 년의 주기(일정할지 어쩔지는 확실하지 않음)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순환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스스로의 진리와 질서에 의해 순환하고 있다고 설파한 붓다와 노자의 관념론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몇 천 번을 반복했을지 알 수 없는 이 200억 년이라는 상상하기 조차 힘들게 어마어마한 우주의 순환 주기 중 어느 한 순간에 우리 인류가 출현했고, 진화를 거듭하면서 10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을 만물의 영장으로 거들먹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류가 비록 단순히 우주의 먼지만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생명체들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로 출발하였지만, 약 600만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생각이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낸 우주까지도 이해하게 된 유일한 존재,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여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변화시키며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의 과학자들이 밝혀낸 우주 탄생과 소멸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들이 그동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었던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에 대한 생각 중 최소한 한 가지는 우리 생각의 지평을 확장하고 보편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논쟁하고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신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플라톤 이후 추구해왔던 ‘이데아’, ‘영혼’, ‘천국’, ‘이성’ 등의 본질에 대해서 칸트 이후 현대의 사르트르, 푸코에 이르기까지 물자체(Things in itself)처럼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상너머의 절대 본질은 학문적 탐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계를 인정한 것이 우리의 보편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 이 우주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질서에 의하여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순환하고 있으며, 이러한 우주의 질서 속에 우리가 잠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우리 인류가 약 600만년을 살아오면서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 왔는지 ‘2.2 생각의 역사’를 함께 더듬어 보았다[그림 2.4 참고]. 우리 인류는 원래 모계 부족사회를 이루고 상부상조하면서 수백만 년 동안을 서로 평등하게 살아왔다. 이는 신화, 의식, 상징 등과 같은 종교적 믿음에 의지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사회 집단을 이루어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식량 채집과 사냥을 하고, 자녀를 낳아 안전하게 양육하며, 심지어 다른 부족과 전쟁을 수행하는데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선택에 의하여 이러한 집단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 인류 생존기간의 대부분인 99%이상의 기간 동안 우리 인류는 소속감을 기반으로 서로 도와 생산하고 같이 나누어 먹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어 생존하였고, 이 훌륭한 재능의 유전자를 뼛속 깊이 새겨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전승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행복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 즉 ‘사회적 동물’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불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현대의 산업혁명 못지않은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우리 인류의 삶의 형태는 ‘좋은 사람과 함께’ 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무게 중심을 옮겨 놓아 버렸다. ‘불과 도구’의 사용은 뇌의 용량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우리 인류가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이에 따라 우리 인류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어 잉여 농산물이 발생하는 등 풍요의 여유를 점차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먹이를 찾아 광야를 떠돌던 우리 인류는 비옥한 토지를 향해 몰려들어 도시 생활을 하고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지게 되자,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부터는 각자의 농업생산 능력에 따라 잉여 농산물의 여부와 그 양이 달라져, 각자의 능력에 따라 사유재산이 생기고 이것이 권력으로 작용하여 계급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인류는 서로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차지하여 무위도식하기 위해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의 굴레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의 굴레는 우리 인류 생존기간의 1% 안 되는 불과 6~7천년의 기간에 우리 인류를 결과적으로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게 만들어 주었다.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인류는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문명화되면 될수록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서로 무자비하게 죽고 죽이는 무참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인류는 이러한 무한경쟁의 고통과 무참함이 극에 달할 때마다 우리 인류 생존의 99%이상의 기간 동안 뼛속 깊이 다져 놓은 덕(德), 즉 ‘좋은 사람과 함께’를 소환하였다. 마치 ‘달도 차면 기운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을, 중국 고사의 물극필반(物極必反 : 만물이 변해 어떤 상태가 궁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을, 그리고 노자의 물장즉노(物壯則老 : 만물이 장성하면 쇠퇴하게 된다.)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입증하는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무한경쟁과 무자비한 전쟁이 극에 달할 때마다 우리 인류는 덕(德)을 소환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시대에 출현한 ‘축의 시대’ 성현들의 가르침이 대표적인 예이다. 붓다의 자비, 예수의 사랑, 소크라테스의 진리,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 말이다. 그나마 우리 인류는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어 폭력과 전쟁이 극에 달할 때마다 바로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를 지침삼아 혼돈을 극복하곤 하였다. 이러한 성현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류의 역사는 ‘적자생존의 전쟁’으로 치달았다가 이러한 혼돈이 극에 달하면 이를 가까스로 ‘극복’하기를 반복하면서 힘들게 생존해왔다. 마침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막장까지 몰고 간 세계 제2차 대전을 겪은 후 UN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세계가 노력하기 시작하였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고, 국지적 폭력과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 인류와 문명 자체를 멸망시키게 될 계기가 세계 제3차 대전 이 될지 아니면 기후위기가 기폭제 일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제6차 대멸종의 시한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어찌하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인류는 전쟁과 평화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도 모자라 불나방처럼 파멸의 불길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가장 먼저 우리의 세계관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세계관을 토대로 우리의 삶의 이정표인 가치관, 자아상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2.3 축의 시대”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성현들의 지혜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인간의 본성인 덕(德), 즉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이다. 우리 인류는 이 덕(德)을 기본적인 가치로 살아왔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은 일원론적 세계관을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양은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현재까지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동양은 우주의 진리와 질서 안에서 삶의 지혜를 추구하고자 자신의 내면세계를 탐색하는데 집중하였다. 반면에 서양은 이렇게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의 세상을 진리를 통하여 완전무결한 ‘이데아’의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나를 둘러싼 이 세계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겨 자연을 우리 인간을 위하여 탐구하고, 개발하고, 변형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집중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 인류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를 향한 욕망과 결합하여 서양은 자연의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빠른 성장의 역사를 건설할 수 있었고, 18C 후반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폭제로 19C 이후 과학주의 담론과 실증주의 철학이 서구 제국주의와 함께 빠르게 확산하여 서양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양의 사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전 세계가 이원론적 세계관에 흠뻑 빠져 우리 인류의 욕망을 위해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풍요를 얻은 대신에 생태계 교란과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를 초래했고, 인류가 만든 자연의 고통이 우리 인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우리 인류가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해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며 살고 있지만, 학문적으로는 이미 세계를 자아와 독립된 개체로 탐구하는 이원론적 실재론은 칸트의 근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와 모순에 봉착하게 되었다. 결국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나의 외부 세계는 내가 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나의 내면세계가 해석한 세계라는 인식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헤겔에 이르러 일원론의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대전환하게 되었으며, 니체의 초인사상과 후설의 현상학을 거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로 현대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질서에 의하여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순환하고 있는 세계 속에 내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덕(德)을 설파하였고, 예수가 가르쳐준 ‘주의 기도’는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구원의 기도가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덕(德)의 실천을 통하여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예수 사후에 바울의 구원철학에 의하여 보편 종교로 외연을 확장하였고, 아우구스티노스의 “신국론”에 의해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사상체계를 정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헤겔 이후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대전환을 이루었으니 기독교도 영원한 이데아의 신의 나라와 고통과 좌절이 있는 현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당초 예수의 가르침으로 세계관을 확장하고 보편화해야 하지 않을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많은 단순한 이가 신은 저기에 있고 자신들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신을 보아야 한다고 착각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 인식을 통해 나는 신을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랑을 통해 나는 신 안으로 들어선다.”라고 하며 신과 자아의 일체성, 즉 범아일여의 일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마치 동화의 주인공처럼 먼 훗날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기 위하여 지금의 팍팍하고 고통스런 삶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붓다의 자비를, 공자의 인을 바로 이 현실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든 간에, 이제 우리 각자가 갖고 있던 지엽적이고 편향적인 세계관을 ‘축의 시대’ 성현들의 가르침과 칸트로부터 니체,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현대 철학적 지혜를 받아들여 우리의 세계관을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확장하고 보편화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인간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스스로 바꾸어야 한다.”는 게랄트 휘터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싸우지 않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살아가되, 물의 본질에 집착하여 미셀 푸코가 말한 것처럼 주관적인 판단이 기준이 돼 결국 이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어 ‘폭력과 분열‘로 이어지는 우를 범하지 말고, ‘유무상생(有無相生)’의 관계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 관계성 안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세상의 질서 안에 자연스럽게 머무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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