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자아상 재정립
4.2.2. 자아상 재정립 – 욕망의 가지치기
우리는 ‘2.2 생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소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인류가 전쟁과 평화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도 모자라 불나방처럼 파멸의 불길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가 바로 앞 절에서 논의한 세계관을 확장하고 보편화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내 앞에 있는 세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스스로의 질서로 순환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세계관을 토대로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어떤 대상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나 의의에 관한 견해나 입장을 말하는 가치관 [價値觀]말이다.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수 없이 시도하고 실패를 반복해 왔던 금욕과 절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재정립을 통해서도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우리가 새롭게 정립한 세계관을 토대로 어디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어떤 의지와 신념을 확립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해 보기로 하자.
비록 우리가 우리를 닮은 인공지능 로봇과 화성 여행을 할 수 있는 우주선 등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칸트의 순수 이성을 확립할 정도의 지성이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지만, 사실 우리 인류는 직관오류와 확증편향에 의한 ‘착각의 오류’ 늪에 빠진 지극히 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인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기대와 달리 인류는 합리적인 이성과 지성에 의해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의지대로 진화해서 오늘날의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 인류도 다른 일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현대진화심리학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할 때 금과옥조처럼 적용하는 마지막 키워드인 ‘생존과 번식’의 프레이밍 속에서 진화해 온 것이다. 바로 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인 ‘행복(욕망, 쾌감)’이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불쏘시개로 작용하여 우리 인류를 오늘날의 풍요로운 세상으로까지 진화시켰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진화하도록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여기서 현대진화심리학자들이 우리 인류 진화의 핵심 도구인 행복을 구체적이고,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들은 행복을 한마디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문제는 우리 인류의 행복(욕망, 쾌감)이 ‘좋은 사람과 함께’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에 방점이 찍혀 진화의 도구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 인류가 ‘불과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능력이 출중해지면 해질수록, 농업생산력은 증가하여 잉여농산물이 많아져 풍요와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개인의 능력에 따른 사유재산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개인 사이 더 나아가 부족사회 사이의 풍요와 결핍의 차이는 권력으로 작용하여 사회 내에 계급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생존을 위해 거친 광야를 떠돌던 우리 인류는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비옥한 땅으로 불나방처럼 몰려들었고, 이는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져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계급과 갈등은 풍요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상류 계급을 향한 적자생존의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러한 계급 간 갈등은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사회가 도시가 되고, 도시가 국가가 되고,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더 격화되고 무자비한 충돌과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우리 인류는 행복을 위하여 ‘좋은 사람과 함께’ 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매달려 이의 결과로 풍요와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향한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에 몰입하고 ‘좋은 사람과 함께’의 ‘좋은 사람’은 유한계급 내에서 같은 부류의 사람 끼리끼리만 누리는 좋은 관계로 인식함으로서 비교와 차별화의 생존 전략을 추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류가 어리석게도 ‘전쟁과 평화’라는 극에서 극을 오가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순환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소위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우리 인류가 어찌하여 ‘전쟁과 평화’의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기껏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이 겨우 화성으로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는 것일까? 화성으로 피난가면 이 악순환의 굴레는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대로라면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악순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6차 대멸종’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치 죽음도 불사하고 불을 향해 몰려드는 불나방처럼 충분하게 풍요로운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큰 풍요를 향한 광란의 질주를 서로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처럼 ‘좋은 사람과 함께’ 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매달려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의 문화와 문명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은 우리 인류 생존기간 600만년의 1%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인류가 출현해서부터 대부의 생존 기간 동안 이룩한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를 우선순위에서 점점 후순위로 배제해 버리고 불과 7천 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의 풍요에 취해 버려서 현재 우리 스스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처럼 탐욕의 경쟁과 무자비한 전쟁의 나락에 빠져서 극도의 결핍상태가 되어서야, 마치 끓는 냄비속의 개구리들처럼 정신 차릴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같이 나름 평화롭고 풍요로울 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의 행복에만 매달리는 상황 속에서 과감하게 ‘좋은 사람과 함께’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지금까지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욕망의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행동결정론(Behavioral Determinism)으로 변명만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99% 이상의 생존 기간 동안에 DNA에 소중하게 새겨 놓았으나 1%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한쪽 구석에 버려져 있던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를 높이 들고 우리 모두 우리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엄성 회복을 위해 우리가 이미 우리 인류의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의 이기적 유전자를 제어할 방법은 있는 것인가? 여기에 더하여 우리 인류가 갖고 있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해답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가소성을 갖고 있어서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자아상을 조정해 나아갈 능력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존엄성을 갖는 자아상을 확립했다 하더라도 매순간 합리적 생각과 결정을 방해하는 요소가 크게 3가지 있다. 이는 그림 4.2에서 보인 것처럼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 행동을 결정하는 자아상이 첫째, 자아상의 가치관 확립에 토대가 되는 세계관, 둘째, 우리 생존과 행복의 도구인 욕망, 셋째, System 2의 게으름으로 인한 착각 오류에 의하여 존엄성을 갖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앞 절에서 우리는 이미 세계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계의 일부 일 뿐이라는 세계관, 세계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Somebody가 아닌 Nobody일 뿐 이라는 세계관을 받아들이자고 논의 하였다. 이 절에서는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주고 현재의 풍요를 누리도록 해주었지만, 적자생존과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무위도식을 위한 무한경쟁으로 ‘전쟁과 평화’라는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는 고통의 늪으로 빠지게 한 도깨비 방망이인 ‘욕망’을 어떻게 적절하게 제어할 것인지에 대하여 같이 논의 해보도록 하자.
먼저 도깨비 방망이 이자 폭주 기관차인 ‘욕망’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에게는 우리 인간의 본능으로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얼마든지 제어가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지의 박약’때문이라 하고, 칸트는 순수이성에 의한 정언명령을 실천하지 못해서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유야 어떠하였든 우리는 스스로 나의 의지가 약해서, 나의 순수이성을 확립하지 못해서라고 자책하며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노력해서 욕망을 제어하는 경지에 도달해야지 하며 은근슬쩍 ‘상황회피’ 전략으로 탐욕과 자책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마치 사회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죄’를 범하고, 교회, 성당 또는 절에 가서 ‘참회’하기를 반복하면서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현대진화심리학자들이 우리들의 이러한 ‘불편한 진실 또는 고민’을 그것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바로 우리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라고 시원하게 면죄부를 발부해 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도 사실은 우리 인류 탄생에서부터 생존기간의 99% 이상의 기간 동안은 ‘소속감’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새겨져 내려왔다. 이는 우리 인류가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서,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혼자 보다는 집단을 이루어 사는 것이 식량을 확보하고, 사냥에 성공하고, 그리고 육아를 하는데 유리하였기 때문에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부족사회와 같이 집단을 이루어 ‘소속감’을 기본으로 상부상조하며 ‘생존과 번식’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척박하고 무자비한 주변 환경의 불확실성과 위험성은 신화・의식・상징 등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사회집단화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 인류가 ‘소속감’을 토대로 사회적 행동을 선택하게된 것은 이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또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직면한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해낸 직접 또는 간접적인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좋은 사람과 함께’라는 소속감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덕(德)“이라는 훌륭한 ’이기적 유전자‘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불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우리 생존기간의 불과 1%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풍요에 취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하고, ‘좋은 사람과 함께’라는 소속감을 소외시킴으로써 무위도식을 위한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린 것이다.
자 이제 그동안 ‘자율성’에 비하여 형편없이 소외되었던 ‘소속감’을 소환하도록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서 현재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든 내가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그리고 이를 뛰어넘어 나의 개인 창고에 쌓아 놓기 위하여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이전투구의 상황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되돌리는 조화로운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를 위하여 우리가 ‘3. 사람, 가야할 길’에서 같이 살펴 본바와 같이 우리가 함께 지향해야 할 공동선의 행복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회복에 대하여 다시 정리하고, 이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 해 보도록 하자. 먼저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제시한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 즉 공동선의 삶에 대한 전제에서부터 출발해보자. 샌델은 우리의 이상적인 가치인 행복, 자유, 도덕을 실현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는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공직과 영광 등을 올바르게 분배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이러한 자유가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이냐의 문제이다. 결국 게랄트 휘터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소속감’과 ‘자율성’의 지혜로운 조화와 균형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우리의 행복, 즉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의 조화와 균형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까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완벽한 정답을 아직 제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축의 시대’ 성현들의 가르침과 수많은 지성들의 지혜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보편화하고 재정립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해답을 찾아갈 수는 있다.
우리가 ‘3. 사람, 가야할 길’의 논의를 통해 제시된 해답은 샌델이 제안한 ‘공동선의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과 ‘자율성’이 도덕을 토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사회와 개인이 함께 노력해서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인간의 욕망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삶의 원천이자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어서, 옹달샘처럼 끊임없이 솟아나오도록 우리 뼛속 깊이 ‘욕망의 이기적 유전자’로 새겨져서 우리가 현재의 풍요가 넘쳐흐르는 사회로 까지 진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의 이기적 유전자’를 제어할 ‘만족의 이기적 유전자’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풍요가 넘쳐도 남아돌아도 더 크거나 새로운 욕망이 또 생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이미 충분하게 갖고 있어도 누군가가 나와 비교해서 내가 없는 것을 갖고 있거나 더 많이 갖고 있으면 만족할 수 없고 새로운 욕망이 들불처럼 일어나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의 굴레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불행하게도 ‘욕망의 이기적 유전자’가 워낙 강해서 ‘축의 시대’ 성현들인 예수, 붓다, 공자, 노자의 가르침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지와 칸트의 순수이성의 지혜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젠 우리 모두의 ‘공동선의 삶’을 위해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나서고, 이와 더불어 우리도 사회와 함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의 실현 방안에 대하여 첫째, 공동선의 사회 시스템 구축과 둘째, 도덕을 토대로 한 자아상 재정립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첫째, 공동선의 사회 시스템 구축
지금처럼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간에 나만 잘되면 되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자유의 보장’을 외치면서 저마다의 끝 모를 욕망의 실현을 위해 불 섶으로 몰려가고 있는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림 3.6에 보인 소득 등 조건에 따른 삶의 만족도 그래프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림 3.6(a)의 그래프는 소득과 행복수준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3.5에 보인 UN의 22년 세계 행복지수 순위는 어떠한가? 소위 세계 최강국이자 부국인 미국을 비롯한 독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서구 열강이 TOP 10안에 들지 못하고, 한때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 자랑하던 일본과 세계 10위의 경제 부국이 된 한국은 50위 후반 순위에 머물러 있다. 우리 보다 상대적으로 덜 풍요로운 동유럽이나 중남미 국가들이 오히려 더 행복지수가 높다. 물론 정치・사회학적으로 복합적인 변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림 3.5와 그림 3.6의 결과로 우리가 행복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대전제로 내세우던 풍요는 사실은 행복과 크게 상관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일정 수준의 풍요가 충족된 경우를 전제로 그 위에 풍요가 더해지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삶에 필요한 풍요가 채워지지 못하면 당연히 행복지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풍요와 행복의 상관관계는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일정 수준의 풍요는 우리의 삶을 유지할 뿐 아니라 행복한 삶에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정 수준 이상의 풍요는 우리의 행복과는 상관없다.
따라서 공동선의 삶을 추구하는 사회라면 사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풍요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림 3.5에 보인 UN의 22년 세계 행복지수 순위 TOP 5에 랭크되어 있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국가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 다함께 잘사는 사회를 꿈꾸는 복지국가이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사람들을 어떻게든 더 많이 가지려고 무한경쟁의 이전투구를 하며 살아가도록 몰아친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하고 무차별 총기사고가 무시로 일어나는 그리고 세계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고 있지만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그런 나라가 되어버려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보다 행복지수 순위가 뒤처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림 3.1(b)에 보인 핸더슨의 ‘윤리 시장’을 상기하는 것이 좋겠다. 핸더슨은 산업사회의 총생산, 즉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척도는 자연(mother nature)과 도덕(love economy)이 미치는 사회적 가치를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3.1.5 존 롤스의 정의’에서 분배정의에 대해 고민한 롤스의 누구나 평등한 기본적 자유권과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차등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센델이 정리한 첫째, 자신이 아무리 우수한 능력이 있다하여도 이 능력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만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고, 둘째, 어떤 특정한 시기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역사적·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여 도덕적 보편성이 아닌 임의성을 갖는 점에 근거하여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공동선의 삶을 추구하는 사회는 우리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치달리고 있는 것을 막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보장하도록 방향 전환(가치관 재정립)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욕망(행복)을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부추기고 조작하는 것을 시스템적으로 제어하기 위하여 사회가 첫째, 스키델스키의 충분의 7가지 조건(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을 보장하고, 둘째, 쉴러의 과도한 피싱(Phishing)을 규제하는 정책을 추진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은 ‘생존과 번식’의 진화 과정에서 ‘터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작용하도록 우리 뼛속 깊이 ‘이기적 유전자’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를 억제하도록 제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의 욕망은 적절하게 채워지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하여 또 다른 욕망이 샘솟아서 시지프스의 굴레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유리잔에 물이 가득 차면 흘러 넘쳐서 아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낙수효과 이론에 대하여, 유리잔에 물이 가득차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마술처럼 유리잔이 커져버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흘러내리는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침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의 ‘의지’로도, 칸트의 ‘순수 이성’으로도 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스키델스키의 7가지 기본재와 쉴러의 피싱(Phishing) 규제를 통해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먼저 스키델스키의 7가지 기본재의 적정 부분이 충족된다면 우리 인간의 그림 3.3에 보인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 중에 1~4단계를 일정 부분 만족 시켜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인적인 생존과 사회적 욕구의 기본을 어느 정도 성취하게 되어 만족하게 해주는 것으로 지금까지 생존과 사회적 인정을 위해 무한경쟁을 불사하던 욕망의 동기유발 요인이 약화됨으로서 구성원 모두에게 정신적・심리적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에게 여유가 생기면 가치의 비중이 ‘나만을 위해’에서 ‘우리를 위해’로 이동하여 공동체 의식, 즉 소속감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 구성원의 관심사가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인 자아실현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가치관도 자연스럽게 방향 전환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지금까지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율성에만 집중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에만 가치를 집중했다면, 스키델스키의 7가지 기본재가 충족되면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자율성과 함께 소속감도 조화를 이루도록 가치관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번째 정책인 과도한 피싱(Phishing)의 규제는 우리를 심리적 바보(Psychological Phool)와 정보 바보(Informational Phool)로 만들어 자본의 탐욕에 이끌려 다니는 어깨위에 올라탄 원숭이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아준다. 이러한 과도한 피싱(Phishing)의 규제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이를 이용해 이기적 이익을 취하려는 또 다른 인간의 피싱 욕구가 더해지는 것 등을 막아줌으로서 우리 욕망이 비합리적으로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시스템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동선의 사회 시스템 구축을 위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첫째, 충분의 7가지 조건(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을 보장하고, 둘째, 과도한 피싱(Phishing)을 규제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더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존엄성 회복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다. 우리가 “3.2 우리가 걸어온 길 : 생각”에서 같이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 오늘날의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었으며, 우리의 생각이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의 계급사회를 만들고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논의한 자본주의 탐욕에 맞서는 2가지 정책을 잘 수립하여 구축한다하여도, 이를 운영하는 우리의 생각이 존엄하지 않으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모두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더 나아가 미래 세대의 존엄성을 위한 교육과 이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게랄트 휘터는 그의 저서에서 존엄성 회복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 숲속에서 만난 식물채집통을 둘러맨 노신사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휘터는 같이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동식물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지금까지 그저 그에게 놀이터에 불과하였던 숲길이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어른들에게 숲속의 동식물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 돼지는 도축을 하는 동물이고, 당근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며, 잡초는 농사에 방해되니 뽑아 버려야 한다와 같은 동식물 사용설명서 말이다. 그러나 그 신사는 똑같은 동식물을 가리키며 우리가 보고 듣는 이 모든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다. 아마도 그가 생물학을 전공하고 신경생물학자가 된 계기가 이때가 아니었을까? 진정한 교육의 필요성을 자신의 이야기로 설명한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 당시의 느낌을 성경의 마태오 복음 6장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장 25, 26]
한마디로 삶에 있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만이 전부가 아니다. 작은 욕심들에 얽매이지 마라. 욕심을 부리려거든 작은 욕심에 매달리지 말고 통 큰 욕심, 즉 가치 있는 욕심을 선택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를 생각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는 것이다. 마치 배고픈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부처의 일화처럼 말이다. 배고픈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어 잡아먹히는 것은 제법무아인 오온(작은 욕심)을 버리고, 부처 자신은 해탈(큰 욕심)을 얻은 것이요, 또 부처가 일국의 왕자로서 나중에 왕이 될 지위(작은 욕심)를 버리고, 수행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해탈(큰 욕심)을 얻은 것처럼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든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풍요에 매달려있던 욕심을 이제부터는 가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존엄성 확립에 대한 계몽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휘터는 존엄성 교육의 당위성을 1962년에 출간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으로 설명한다.[참고 2.10] 이 책은 DDT라는 살충제 사용이 지구의 생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그로 인해 무엇이 희생되고 있는지에 대한 현실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그토록 사랑하는 것들이 정작 우리 인간의 손에 무참히 파괴되고 있음을 우리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세계적 규모의 환경운동이 일어났고, 유럽각국에는 녹색당이 창설되어 국회에 입성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으며, 탐욕에 눈먼 자본주의 기업과 이에 부역하는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투쟁에 나서 DDT사용을 금지시킨 지도 벌써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과거 땅과 바다에 스며든 DDT로 인해 아직도 생태계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이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 인간이 우리의 편의와 풍요를 위해 무분별하게 개발한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를 지금 이 순간에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의식 있는 환경단체들이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생태자원 가운데 지구상에 남아있는 양이 그래도 3분의 2 정도는 되었는데, 이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면 2030년엔 턱도 없이 부족해져서 지구가 두개 필요하게 될 것이고, 2050년에는 세 개의 지구만큼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계는 생산성과 경영 효율 극대화가 제일목표이고,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복제하는 생명윤리를 넘나드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닮은 인공지능 로봇을 창조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는 이를 통제하고 막으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원하고 급기야 화성으로 이사 갈 궁리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수 백 만년동안 우리의 생존과 진화의 원동력이었던 육체적 노동, 즉 유위도식(有爲徒食)은 산업화 이후 컨베이어벨트에 묶여 시간과 규격화의 대상으로 전락하더니 이제는 우리의 정신노동마저 컴퓨터의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에 묶여서 업무의 방향, 분량, 그리고 스케쥴이 알고리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아주 쉬운 예가 ‘카카오 택시’의 운전기사들이고, ‘배달의 민족’의 라이더들이다. 이들은 이익 극대화라는 컴퓨터 알고리즘의 규격에 따라 업무가 주어지고, 평가를 받으며, 이 평가 결과에 따라 업무가 재조정되기 때문에 이들 운전기사와 라이더들은 기계의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이들이 인간으로서 존중 받아야하는 노동 환경과 안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자동화될 미래 사회는 인공지능이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고 끊임없는 학습과 수정을 통해 진화를 거듭하여 알고리즘을 ‘최적화’할 것이고, 이렇게 급속한 진화 앞에서 더 이상의 ‘최적화’가 불가능한 인간들은 밀려나고 그 자리를 로봇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로봇들은 휴식도 파업도 없이 24시간 일할 수 있으며, 기억용량과 속도 등 능력에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의 정확성에서 의사들이 로봇을 따라가기 어려워져 모든 병원에 의사들이 로봇으로 대체되면, 우리 인간들은 질병의 치료는 물론 우리의 탄생과 죽음마저도 로봇의 결정에 따르게 되어 우리의 존엄성은 헌신짝처럼 취급되지 않겠는가? 이런 신세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계속 풍요만을 이익 극대화만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노동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멀리 미래까지 갈 것도 없이 현재는 어떠한가?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휩쓸고 있는 오늘날 기업체들은 이익 극대화가 제일의 목표이다. 문제는 ‘공동선의 삶’ 추구에 원동력이 되어야할 공기업, 정부기관들, 심지어 교육 기관들 조차도 이익 극대화가 경영 목표가 되어버려 이를 기준으로 기관 운영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겠다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치는 병원은 어떠한가? 병원 운영을 의료인이 아닌 사업가가 키를 쥐면서부터 환자 우선의 진료가 아닌 병원의 이익 극대화가 경영 목표가 되면, 의사의 진료는 환자 보다는 수익성에 매달리게 되고, 경영 효율을 핑계로 의료 인력 감축은 의사와 간호사 1명당 돌봐야 하는 환자의 수 가 증가하게 되어 의료 서비스의 질은 감소할 수밖에 없어 당연히 의료인 자신은 물론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보장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과거에 우리가 광활한 자연에서 스스로 느끼고 경험하며 시간제한 없이 자연스럽게 배움을 즐겼다면, 이제는 마치 컨베이어벨트에 묶인 노동자들처럼 학습 시간을 40분 혹은 50분 단위로 규격화하고 시간표에 따라 정해진 대로 한과목이 끝나면 다른 과목이 이어지며 공부라는 걸 한다. 정작 주인공인 학생은 배우는 내용에 대하여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어 그저 선생님의 설명을 멍하니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은 강의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사회가 이미 정해버린 규율권력에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휘터에 따르면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우리 인간은 이렇게 순식간에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참고 2.10]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문화와 문명 속에서 규율 권력에 길들어져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휘터는 교육시스템과 학교 환경을 개선하자고 설득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독일의 경우 약 340억 유로(한화 44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돈이라는 장벽에 막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교육마저 이익 극대화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죽음과 고통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뛰어 넘어 전지전능을 꿈꾸는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 스스로 인류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기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는 신인류의 선구자)들이 만든 우리의 삶이 우리를 어떤 결과로 몰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이익 극대화의 함정에 빠져 제6차 대멸종이 될지도 모르는 두려운 미래를 현실로 맞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공동선의 좋은 삶’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풍요가 우리 인간의 신성한 노동을 희생시키고 이익 극대화의 탐욕으로 만들어 낸 것임을 교훈 삼아 이제 앞으로의 미래는 우리 인간의 신성한 노동을 존중하고, 오로지 탐욕의 풍요만이 아닌 가치와의 조화를 꾀하는 ‘공동선의 삶’을 이룩하도록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휘터는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내면의 나침반, 존엄이 바로 그 해답이라고 이야기한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생각이 중요하고 가치관이 중요하고 자아상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에 기반 한 가치관과 자아상에 따른 삶을 실천할 뿐 아니라, 이것이 후속 세대 그리고 미래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을 확립하고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둘째, 도덕을 토대로 한 자아상 재정립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제시된 해답인 ‘공동선의 삶’을 추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과 ‘자율성’이 도덕을 토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사회와 개인이 함께 노력하자고 다짐하였다. 이에 따라 두 가지 실천 방안 중 첫째, 공동선의 사회 시스템 구축에 대해서 스키델스키의 ‘충분의 7가지 조건’을 보장하고 쉴러의 과도한 피싱(Phishing)을 규제하는 정책과 존엄을 기반으로 자아상 재정립을 위한 교육을 사회 시스템화 하자고 논의하였다. 이제 ‘공동선의 삶’을 위하여 이러한 사회적인 노력과 함께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할 욕망의 제어와 도덕을 토대로 한 자아상의 재정립, 그리고 이들의 실천 방안에 대하여 논의해 보도록 하자.
그림 4.3. 사람과 세상
이를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아상’의 점검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검토한 세계관은 결국 니체의 초인사상과 사르트르의 실존, 그리고 노자의 도(道)로 귀결된다. 즉 우리 인간이 있고, 우리를 위하여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4.3과 같이 우리 인간은 자연으로 대변되는 세상(天地人)속의 일부라는 세계관 말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4.2.1 세계관의 확장과 보편성 확립’에서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다만 세상을 자유 의지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진리대로 사느냐의 차이가 있다. 즉 니체의 초인은 자신만의 윤리 도덕을 스스로 발견하고, 이에 기반 한 자유의지로 세상을 충실하게 사는 것인데 반하여, 노자의 도는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세상의 진리 즉 생이불유(生而不有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 위이불시(爲而不恃 : action without self-assertion), 장이부재(長而不宰 : 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하면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 일부 인 것은 맞지만 니체의 초인은 세상 안에서 특별한 존재(somebody)이고, 노자의 도인(道人)은 그저 세상의 일부(nobody)이다. 따라서 니체의 초인은 우리 자신 스스로 설정한 ‘윤리 도덕’이 보편타당한 것이냐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보편화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우리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어떤 대상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나 의의에 관한 견해나 입장을 가지는 가치관 [價値觀]을 설정하고 자아상을 수립할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보편화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을 생각된다.
자 이제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고, 한번 불타오르면 후쿠시마의 원자로처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제어가 어려운 하지만 적절하게 제어해야만 하는 ‘욕망’에 대하여 노의 해보자. 마치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내 마음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욕망이 솟구쳐 나오고 그 욕망의 관계양상에 따라 그림3.2처럼 희로애락의 마음결이 일어, 욕망의 성취여부에 따라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욕심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욕심을 통해서 또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무지한 수행자는 오히려 욕망으로부터 도망가려고만 하고 있다.
원수를 없애고 싶으면 먼저 자기 마음의 번뇌를 없애야 한다.
원수는 자신의 한 몸만 해치지만 번뇌는 진리를 해친다.
원한과 원수의 원인은 바로 번뇌에 있다. - 붓다 -
욕망이 문제인 것이다. 이 욕망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여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시키고 풍요로운 생활을 안겨다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우리를 어깨위에 올라탄 원숭이로 만들어 이미 충분한 양을 섭취하였음에도 계속 부추겨서 과음과식으로 오히려 건강을 해치도록 만들고, 또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분노, 공격성, 불안장애 등을 양산, 정신병원의 수를 늘리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에 케네스 밀러는 “우리는 신중함과 정확성, 세밀함과 도덕성을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선택의 냉혹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진화했을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욕망을 제어해서 인간으로서의 이성과 합리성을 찾아야만 하는 당위성인 것이다. 우리에게 욕망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관점에서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행복의 원천이자 수단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풍요로워진 현대 생활에서는 우리의 마음에 고통과 번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생산 공장으로 우리와 세상을 어지럽히는 원흉이기도 한 것이다. 붓다는 이미 이를 간파하고 필요 이상의 욕망이 부질없음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붓다가 이르길 “결국 마지막에는 네가 사랑을 얼마나 베풀며 살았는지, 네가 얼마나 품위 있는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네 거가 아닌 운명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포기하며 살았는지의 3가지만 남는다.”라고 말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삶에서 우리 욕망대로 마음껏 풍요, 권력과 명예를 누렸든 그러지 못했든 누구도 예외 없이 빈손으로 혼자서 죽음의 강을 건넌다. 이 세상에서 내가 내 것이라고 믿고 누려왔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인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에 남는 것은 풍요와 권력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살았는지, 즉 풍요가 아닌 가치만이 남는 것이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는 나바호 인디언의 격언에도 있다. “네가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라.” 어떤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부모를 비롯한 우리와 관계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우리와 삶을 함께 해주었다. 여기서 이러한 삶이 만약 나만을 위하고 나의 풍요와 권력만을 누리며 살았다면 그 동안 축적한 부와 위세를 떨치던 권력의 갑옷을 흔쾌히 반납하고 홀가분하게 웃으며 떠날 수 있겠는가? 세상이 나에게 부여한 풍요와 권력을 겸손하게 받아 세상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세상과 함께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만 때가 되었을 때 다 내려놓고 미련 없이 기뻐하며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욕망에 대한 위의 이야기가 너무나 당연해서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 붓다, 노자의 존엄한 삶을 살고 있을 터이니 논외로 하자. 그렇다면 이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의 제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실천하며 살고 싶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지의 나약함’ 때문이든, 각종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르지 못해서이든 ‘욕망의 제어’와 ‘반성’을 반복하며 살고 있거나, 아니면 욕망대로 보다 나은 풍요와 권력을 위해 ‘자아실현’이라는 미명하에 ‘시지프스의 굴레’에 빠져 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전자에 해당한다면 지금까지 논의해온 세계관과 이에 따른 가치관, 자아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고, 후자라면 먼저 지금까지 논의해온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자아상으로 재정립한 다음 이를 강화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자가 되었든 후자가 되었든 우리의 ‘자아상’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어야 하고, 그런 다음 이 ‘자아상’이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존엄성’을 확립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자 이제 우리의 자아상을 재정립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미 ‘3.2 사람, 가야할 길 – 존엄성 회복’에서 제시한 다음 3가지 교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의 삶의 만족도는 일정 수준이상 소득이 있으면 소득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없다. 이를 그림 3.6의 소득과 행복수준 비교에 보였다. 한마디로 스키델스키의 자본의 탐욕에 맞설 7가지 기본재, 즉 충분의 7가지 조건인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를 사회가 보장해줄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우리는 굳이 풍요를 위해 사생결단하는 욕망의 굴레에서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교훈으로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 연구를 통해 ‘좋은 관계’가 1)사회적 연결(관계)은 매우 유익한 반면 고독은 해롭고, 2)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질이지, 관계의 양, 즉 친구의 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3)‘좋은 관계’는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뇌도 보호하더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는 하버드대에서 무려 75년 동안 추적 연구한 결과(로버트 윌딩거의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들까? 라는 TED 강연)라니 믿어볼만 하지 않겠는가? 이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인 우리의 행복 추구가 지금까지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에만 매달려온 우리 욕망의 전략을 ‘좋은 사람과 함께’로 일부 가치 전환함으로서 우리의 행복이 ‘공동선의 좋은 삶’과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교훈은 진정한 만족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스티브 잡스가 병상에서 마지막 남긴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을 앞둔 이제야 저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얻은 재산을 나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저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한마디로 채움의 ‘풍요’만이 아닌 비움의 ‘가치’의 방향으로 가치 비중을 옮기라는 것이다.
이상 3가지의 교훈은 성현들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노자가 세상의 진리이자 질서인 도(道)를 설명하면서 제시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보자. 노자는 도(道)를 알고 실천하고 싶으면 물(水)의 모습처럼 살아가라 하였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를 닮은 물(水) 조차도 목마른 사람에게는 생명이지만, 그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죽음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욕망도 필요 이상의 욕심은 세상의 진리를 거스르는 일이요 도리어 화를 부르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세상의 진리는 천지불인(天地不仁)하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하다. 마치 태양이 온 누리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세상은 대상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고르게 무차별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이를 대하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어떤가?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13장 3-8] -
예수의 가르침 또한 천지불인(天地不仁)하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한 노자의 도와 다르지 않다. 누구에게나 무차별하게 씨를 고루 뿌려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밭이 기름진 밭이냐, 메마른 밭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결국 천지불인(天地不仁)하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한 세상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물이 우유가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붓다가, 노자가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우리가 600만년 동안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 전략으로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의 욕망을 전부 잘라내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여러 욕망들 중에 가치관과 자아상에 맞는 욕망을 선택해서 성취하도록 추구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욕망을 비워낸다는 것은 욕망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마치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는 나무를 잘 자랄 수 있도록 가지치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은 우리의 본능을 억누르는 것으로 매우 어렵지만 욕망을 가치관과 자아상에 맞게 선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 않겠는가? 물론 가치관과 자아상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다면 가치 있는 욕망을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이유는 우리가 우리 사람을 사랑하고 물건을 사용해야 하는데, 거꾸로 물건을 사랑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과 세상의 진리를 목적으로 대하고,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건을 수단으로 대할 때 우리의 세계관과 자아상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우리 삶의 표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아상이 탐욕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시스템2가 제 역할을 다하여 이성적・합리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언제나 가치 있는 욕망을 선택함으로서 우리가 ‘공동선의 좋은 삶’을 추구하는데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세계관과 자아상 재정립을 기반으로 뇌의 가소성을 활용하여 우리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다음 절에서 논의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