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뚜라 25화

4.2 존엄성실천하기_3

4.2.3. 존엄성 실천하기_1

by 이성룡

4.2.3. 존엄성 실천하기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존엄성을 슬기롭게 회복하고, 이를 통해 좁게는 우리 존엄한 인간 공동체에서 ‘공동선의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넓게는 우리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상과의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가 추구해야할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우리가 함께 애써 찾아낸 소중한 지혜를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실천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자아상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그저 생각의 창고에 넣어두고 있다가 어쩌다 동호회 모임 같은 곳에 참석해서 자신의 지식을 은근슬쩍 자랑하는 데에나 활용하고 실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평일에는 속인처럼 살다가 일요일에만 교회를 열심히 나가서 일요일에만 예수의 가르침을 외치는 일요일 성인(Sunday saint)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파악한 지혜를 활용해서 우리의 세계관과 자아상을 재정립한 다음에 우리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에 따라 ‘공동선의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걸음씩 단계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세계관, 자아상, 이성적 합리성의 순서대로 함께 논의 해보기로 하자.


세계관의 보편화

제일 먼저 보편화해서 재정립해야할 것이 우리의 세계관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이 세계와 우리 자신, 그리고 상호 관계에 대한 우리 인식의 프레이밍이자 관점이어서 이를 토대로 우리의 가치관과 자아상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우리의 세계관을 주관적이 아닌 상대적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하여 축의 시대의 성현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철학 사상까지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 이에 따라 우리는 노자의 동양철학과 칸트, 니체와 사르트르의 현대서양철학을 아우르는 보편화된 세계관을 결론적으로 도출해 내었다.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세계관은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질서에 의하여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순환하고 있는 세계 속에 내가 있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정리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세계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여 세계를 우리 멋대로 일방적으로 활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여 우리와 세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상호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직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인지 명쾌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E. O. Wilson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그는 “우리의 심미적, 지적, 인지적 그리고 정신적인 만족의 열쇠는 자연이 쥐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추상적인 이야기를 구체화 해보겠다고 하면서 또 추상적인 이야기를 꺼내서 어쩌자는 거야? 하고 언짢아 할지 모르겠다. 너무 나무라지 마시라. 이 글을 쓰는 나도 어떻게 해야 사진을 보듯 명쾌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낼지 잘 모르겠다. 철학과 사상은 한마디의 말로 규정해버리는 순간 미셀 푸코가 이야기한 것처럼 규율 권력이 되어 버려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 중의 하나만을 강조하고 나머지 의미들은 가려져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되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어렵다. 그것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한낱 공학도에게 불과한 나에게는 말이다. 그래도 시도해 보자. 우리가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존엄성을 회복해야하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일반인 중에 하나가 시도해 보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한번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변명의 말이 길어졌다. 다시 윌슨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의 만족, 즉 행복의 열쇠는 자연이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이야기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하여 그림 4.4를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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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4. 만족의 열쇠인 자연


그림 4.4에서 여러분은 어떤 그림이 마음에 드는가? 이 그림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이 왼쪽 그림을 선호하고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맑은 하늘에 푸른 숲, 그리고 맑은 물을 선택하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 오염된 쓰레기로 뒤 덮인 땅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싱싱한 과일을 선택하고, 맛있게 먹으려하지 썩어가는 과일을 선택하고 먹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림 4.4(b)의 우리 사람의 경우도 그림 4.4(a)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둡고, 칙칙하고, 음흉해 보이는 오른쪽의 인상 보다는 밝고, 맑고, 웃음 짓는 호의적인 왼쪽의 인상을 선호한다. 다만 우리 인간은 사르트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림 4.4(a)의 ‘의식의 대상’들과 같이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왼쪽을 선호하는 현상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어쨌든 우리가 생명의 자연을 선호하는 것은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지난 6백만 년 동안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 과정 속에서 터득한 경험에 의해 이를 우리의 유전 인자 속에 뼛속 깊이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제 부터라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처럼 자연을 우리 마음대로 마구 파헤치고 무분별하게 개발해서 ‘수단’으로 활용하면 화석연료는 바닥이 날 것이고 세상은 온난화되어 생태계의 파괴로 우리는 설 자리가 없어져 왼쪽에 있는 아름다운 생명의 자연을, 싱싱한 과일을 선택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니 말이다. 이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AI로봇을 창조(?)하여 우리의 할 일을 대신 하게하고 짐 싸서 화성으로 이사 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화성은 영화 ‘아바타’의 판타지처럼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우리에게 지금에 버금가는 자연을 제공하기에는 현실은 너무 냉혹하다. 게랄트 휘터의 말처럼 우리의 생각에 맞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스스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노자의 가르침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의 관계성으로 바라보고 이 관계성 안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세상의 질서 안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도(道)를 자연스럽게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즉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인식을 통해 나는 신(세상의 진리)을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랑을 통해 나는 신(세상의 진리) 안으로 들어선다,”는 신(세상의 진리)이 나의 자아이고 나의 자아가 바로 신(세상의 진리)이라는 범아일여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설사 니체가 제시한 초인의 세계관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가치를 지닌 ‘자유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되 스스로 설정한 ‘윤리 도덕’이 보편성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도(道)를, ‘윤리 도덕’의 보편성을 어떻게 확립하고 실천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다음 ‘자아상’에서 상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이제 부터는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질서에 의하여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순환하고 있는 세계 속에 내가 있는 것’이라는 세계관을 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의 가치관과 나아가 자아상을 정립하도록 하자.


자아상의 재정립

이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편화한 세계관에 의해 우리의 자아상을 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자아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과정에 의해 재정립 되는지에 대하여 ‘4.1 뇌의 가소성’에서 그림 4.1의 뇌의 행동 패턴 플로우챠트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제 이를 활용하여 우리가 존엄성을 갖는 자아상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 방안에 대하여 논의해 보도록 하자.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처리할 뿐 아니라 이 정보를 기반으로 창의적인 미션을 창출하기까지 하는 막강한 능력의 뇌를 갖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뇌는 어마어마한 정보처리 능력을 수행하는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여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에너지의 20%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웬만한 태도나 행동은 자동화 프로그램이나 문제회피 전략 등과 같은 단순화 프로그램으로 처리하고 판단이 필요한 경우 ‘자아상’을 나침반과 같은 표상으로 삼아 일관성을 갖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하는 생존전략으로 진화해왔다. 따라서 그림 4.1의 뇌의 행동 패턴 플로우챠트에서 보는 것처럼 ‘자아상’을 제대로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자아상’은 우리가 태어난 후 처음 2년 동안 부모를 비롯하여 나와 관계를 형성한 사람들에 의해 ‘소속감’이 형성되고, 계속해서 뇌 형성 초기단계의 기간 동안(청소년기) 이 ‘소속감’의 유대 정도에 따라 이타심과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더불어 이 ‘소속감’을 기반으로 개인적인 성장의 경험에 따라 ‘자율성’이 형성되고 이기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소속감’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우리의 ‘자아상’이 형성되고, 이것이 삶의 표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 시기에 부모를 비롯한 사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4.2.2 자아상 재정립’에서 공동선의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첫째, 스키델스키의 충분의 7가지 조건(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을 보장하고, 둘째, 쉴러의 과도한 피싱(Phishing)을 규제하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고, 존엄성 회복을 위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존엄성 교육을 시행함으로서 우리의 후속 세대들이 제대로 된 ‘자아상’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는 사회 전체의 문제이고 앞에서 자세하게 논의 하였으니 여기서는 나 자신 즉 개인의 실천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자.

다시 그림 4.1의 뇌의 행동 패턴 플로우챠트로 되돌아 와서 우리가 ‘소속감’과 ‘자율성’을 조화롭게 형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제대로 된 ‘자아상’을 형성하여도, 우리 인간이라면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경험, 그래서 아서 쾨슬러가 진화의 그릇된 방향이라고 한탄한 대상화의 경험, 즉 적자생존의 경쟁과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경험 때문에 우리의 ‘자아상’은 수시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고통에 직면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목적이 아닌 이와 같은 수단으로서 대상화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마주하게 되면,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소속감을 향한 기본 욕구를 억제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기비하를 통해 자신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있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이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가 이야기한 우리 진화의 키워드인 ‘생존과 번식’에서 ‘생존’의 관점에서 채택한 생존전략인 ‘풍요와 차별화’전략과 일치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속감’을 억제하고 ‘자율성’을 극대화하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전투구를 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자율성’을 억제하고 자존감을 버려서라도 상대적으로 능력 있는 그룹에 소속됨으로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차별화를 꾀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형성한 ‘자아상’이 ‘자율성’을 상실하거나 ‘소속감’ 억제를 통한 주체성과 자유 욕구를 스스로 통제하여 존엄성을 잃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타인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이라는 전쟁터의 한 복판으로 자신을 스스로 내모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아상에 투영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거나, ‘만남’을 통해 자아상과 세계관을 확장하고, 자신의 신념에 대하여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시각을 갖게 됨으로서 존엄한 ‘자아상’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니체의 ‘초인 사상’과 같은 세계관을 만났고, 예수의 ‘사랑’, 붓다의 ‘자비’, 그리고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가치를 만났다. 따라서 우리는 축의 시대 성현들과의 만남을 통해 보편타당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받아들여 ‘자아상’을 끊임없이 재정립하여 존엄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다 좋은데 너무 추상적이다. 예수를 만난 베드로처럼 진리를 깨닫자마자 모든 걸 내려놓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갈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해답은 우리 생존과 행복의 열쇠인 ‘욕망’,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의 ‘욕망’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새로운 만남과 공부를 통해 좋은 진리를 아무리 많이 깨달아도 우리 뼛속 깊이 새겨진 욕망이 꿈틀거리면 실천이 매우 어렵다. 우리의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자 행복의 원천이어서 원천봉쇄할 수도 없고 교황의 낙수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어느 순간 ‘욕망’을 억누르고 존엄을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3.2.1 사람의 욕망 그리고 제어”와 “3.2.2 행복, How much is enough?”를 통해서 한마디로 ‘욕망’의 양은 클수록, 많이 충족될수록 그에 비례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정 부분이 충족되면, 그 이상의 것은 행복하고는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림 3.5, 그림 3.6 참고] 그래서 공동선의 좋은 삶을 위해 스키델스키의 자본의 탐욕에 맞설 7가지 기본재(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를 사회가 보장하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하였다. 설사 사회가 이것을 완벽하게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7가지 기본재는 어느 정도 충족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에게 ‘욕망’의 양을 제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림 3.2로 표현한 인간의 본성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평소 인간의 본성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일심의 바다’에 ‘마음자리’하고 있다가 외부에서 일어나는 환경 변화에 따라 또는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변화에 따라 때로는 이 두 가지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마음결’이 일어나는데, 이때 생겨나는 욕망의 양과 세기는 일정 부분 이상은 행복과 관계없다 했으니 이를 올바로 인식하기로 하고, 이 인식을 토대로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쳐들고 나오는 수많은 ‘욕망’중에서 나의 가치관에 투영된 가치 있는 ‘욕망’을 상대적으로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가 우리 자신이 인식해서 해석한 세계라는 것을 이미 안다. 즉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어 살아가는 세계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기가 본 대로,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상관없이 나의 밖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러한 세계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 인 것이다. 마치 붓다의 가르침 중에 아래 ‘두 번째 화살’처럼 말이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접하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합니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느낌을 겪으니, 곧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을 또다시 맞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접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며 결코 정신적인 느낌은 겪지 않습니다. - 아함경 -


우리는 니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목적과 의지’ 그리고 ‘우연’이라는 두 가지 영역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연’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고 진행된다. 바로 붓다가 이야기하는 첫 번째 화살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바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졌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측불가능하게 일어난 ‘우연’, 즉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다. 이 우연한 사건이 깜박이도 켜지 않고 느닷없이 우리의 목적과 의지의 영역으로 쳐들어와 우리의 ‘목적과 의지’를 파괴하고 괴로움이라는 후폭풍을 일으키는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 붓다는 ‘첫 번째 화살’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우연이지만, 이로 인해 ‘두 번째 화살’까지 맞지는 말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살다보면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칠 수도 있다. 우연하게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이 짜증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라고 분노와 원망의 괴로움을 폭발하는 ‘두 번째 화살’은 일어난 사건에 대한 우리의 대처에 달려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아하! 돌이 여기 있었구나. 다음부턴 좀 살피며 걸어야지.”하면서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제 갈 길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인디언 추장의 일화는 어떤가? 어느 날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분노·슬픔·탐욕의 늑대와 사랑·소망·인내의 늑대 말이다.”라고 말하자, 손자가 “할아버지,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하고 물었고, 이에 추장이 “그야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참고 4.1]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고 싶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여러 마리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분노·슬픔·증오의 늑대, 기쁨·즐거움·사랑의 늑대, 탐욕과 풍요의 늑대 그리고 희생과 가치의 늑대 등 말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본능인 욕망을 송두리 뿌리 채 뽑아내 버릴 수는 없다. 봄날 우후죽순처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의 늑대 중에서 희노애락애오(喜怒哀樂愛惡)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풍요와 가치 중 어디에 가치비중을 둘 것인가 하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사랑’, 붓다의 ‘자비’는 풍요의 욕망을 억누르고 최소화하도록 제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본적인 풍요를 적절하게 충족하면서 가치를 추구하는 즉 풍요와 가치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욕망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에릭 시노웨이는 그의 저서 ‘하워드의 선물’에서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무엇을 비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라고 하였다.[참고 4.2] 우리 행복한 삶에 대한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의 키워드인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위하여 끊임없이 채우는 ‘풍요’와 이를 ‘좋은 사람과 함께’ 누리기 위하여 계속해서 비우고, 배려하며, 희생하는 ‘가치’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풍요’와 ‘가치’의 욕망을 선택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탐욕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현대의 사회를 살면서 이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치’를 선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예수의 ‘사랑’처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거나, 붓다의 ‘자비’처럼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은 우리 같은 평범한 소인들이 솔직히 흉내 내기도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풍요’만을 고집해서는 우리와 세상이 공멸할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공동선의 좋은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 부분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풍요’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가치’만을 추구하는 고고한 성인군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풍요’에 일정 부분의 ‘가치’를 더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당연히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수많은 유혹에 흔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노자의 도덕경 20장 절학무우(絶學無憂) 편을 읽으며 마음을 다 잡으면 어떨까?


俗人昭昭 我獨昏昏 (속인소소 아독혼혼)

俗人察察 我獨悶悶 (속인찰찰 아독민민)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담혜기약해 료혜약무지)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我獨異於人而貴食母 (아독이어인이귀식모)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 홀로 혼란할 뿐일세.

세간의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 홀로 답답할 뿐일세.

담담하여 바다같이 너르고 고고한 산들바람처럼 그칠 줄을 몰라.

뭇 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완고하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네.

나 홀로 뭇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만물을 먹이는 생명의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 도덕경 상편 제20장중에서 - [참고 2.32]


상선약수의 도를 추구한 노자도 세상의 유혹에 마음이 어지러웠나 보다. 나는 오히려 노자의 이런 모습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상선약수의 도를 추구해야 함을 깨달았지만, ‘풍요’만을 추구하라는 본능적인 욕망을 상선약수의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고백한 것이다. 속인소소 아독혼혼(俗人昭昭 我獨昏昏). 세상 사람들은 모두 똑똑한데 나만 홀로 혼란스럽고 답답하구나.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쓸모가 있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나 혼자만이 고집스럽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구나. 하지만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만물을 먹이는 생명의 어미(食母)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라고 말이다. 여기서 왕필은 ‘생명의 어미(食母)’의 의미를 “식모란 생의 뿌리이다. 뭇 사람들은 모두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그 뿌리를 망각하고 말엽의 장식적인 꽃만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 홀로 뭇 사람들과 다르다고 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화려한 꽃 만 바라보고, 불나방처럼 꽃만을 좋아하고 쫓아가는데 반하여 노자는 그 뿌리를 보고, 세상의 진리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쾌하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자연의 모든 것이 함께 하고 있다. 지금처럼 나 혼자만, 각자 개인만의 ‘풍요’를 추구하고 신자유주의의 탐욕에만 몰두하면 제3차 대전이 일어나거나, 생태계가 파괴되어 기후위기로 6차 대멸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환경을 찾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환경에 맞춘다.” 휘터의 말처럼 인간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맞게 인간의 생각이 스스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세상의 화려한 꽃 만 보지 말고 그 뿌리를 보고, 세상의 진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만 실천이 어려워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적당한 풍요에 일정 부분의 가치를 더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에서 조화와 균형을 위해 ‘적당한 풍요’와 ‘일정 부분의 가치’에 대한 가치 비중을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하느냐 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무한경쟁의 삶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느라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버려두었던 ‘충실’을 반드시 꺼내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그림 4.5와 같은 만족, 가치, 그리고 충실의 3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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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5. 행복한 삶의 3요소


예를 들어 등산가들의 꿈인 에베레스트, K2 등을 비롯한 해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 14좌의 완등은 고산병과 추위, 그리고 단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등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충실하게 걸어서 정복해야 진정한 만족과 가치가 있는 것이지, 헬리콥터나 케이블카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가는 것은 편리하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히말라야 등정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충실하게 걸어서 올라가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대재벌의 자녀로 태어나 자동적으로 재벌이 되어 풍요를 누리는 사람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복권에 당첨되어 부자가 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얼마안가 전 재산을 탕진하고 그 이전 보다 더 불행하게 산다는 소식도 들어 알고 있다. 자신의 목적과 의지로 자율적인 노력에 의한 성취가 아닌, 즉 충실함이 수반되지 않은 만족과 가치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우리는 ‘불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첫째,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하는 혜택을 누렸고 만물의 영장이 되는 토대를 구축하였지만, 편리함을 쫓아 나태의 욕망을 잉태하였으며, 둘째, 농업 생산력 증대로 풍요를 구가한 대신에 계급사회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무위도식할 수 있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이 되기 위하여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무위도식이 아니라 다시 유위도식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 각자가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에 목적으로 대하여야 할 대상이지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장자의 ’천지‘편에 ”유기계자 필유기사 유기사자 필유기심(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의 고사가 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공이 초나라에 가는 도중에 한 노인이 우물에서 항아리에 물을 길어 날라 밭에 물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의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자공이 ”물을 효율적으로 퍼 올릴 수 있는 기계가 있는데, 이를 사용하면 손쉽게 물을 댈 수가 있습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대뜸 ”내가 그 기계를 몰라 이러고 있는 줄 아시오? 나는 내가 지키려는 도(道)가 있소. 도 앞에 부끄러워 나는 기계를 쓰지 않을 뿐이오. 내 몸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천하를 다스리려 하오? 나는 내 스승에게 일찍이 배웠다오. 인간의 삶에 기계가 도입되면 기계로 인한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有機械者 必有機事), 기계로 인한 일이 생겨나면 기계로 인한 나태한 마음이 반드시 생겨나게 마련이오(有機事者 必有機心).“[참고 2.32] 이 말을 들은 자공은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한적한 농촌에서 물 긷는 노인도 자신의 스승인 공자처럼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음을 크게 깨달았다는 고사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만들어 낸 자동차가 자연의 말 보다 빠르고 편안하지만, 그 대신에 자동차로 인한 사고와 공해 등 각종 문제를 감수해야만 한다. 말은 우리가 잠들면 스스로 절벽 앞에서 멈추지만, 자동차는 그냥 절벽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자율주행 자동차에 목을 매고 열심히 달리고 있다. 자동차에 인공지능이 들어오면 우리의 세상은 행복해 질까? 이 이야기는 쳇지피티(ChatGPT)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다. 다음은 내가 오픈에이아이(OpenAI) 홈페이지에 들어가 쳇지피티(ChatGPT)에게 영어로 질문한 내용과 그의 대답을 번역하고 요약한 내용이다.

질문

인공지능은 스스로 학습하고 자유롭게 진화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아래에 제시된 로봇의 3가지 원칙과 같은 논리로 제한시킨다면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인공지능의 진화를 제어할 수 있을까?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인간이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입히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2. 로봇은 첫 번째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로봇은 제1법칙과 제2법칙을 위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위의 세 가지 법칙은 아래의 법칙을 위반할 수 없다.

0.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류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


대답

당신이 제시한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은 공상과학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소개한 아시모프의 로봇 법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로봇의 행동을 안내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인공 지능의 진화에 대한 완전한 제어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AI 시스템이 데이터에서 학습하고 그 학습을 기반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AI가 더욱 발전함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러한 법률을 우회하거나 해석하는 전략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러한 법칙은 로봇이 인간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로봇은 인간의 명령을 잘못 해석하거나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여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둘째, AI 시스템은 물리적 로봇에 국한되지 않고 제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소프트웨어 및 알고리즘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비물리적 AI 시스템에서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을 시행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AI 진화의 방향을 제한하면 잠재적인 이점도 제한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는 AI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진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전문가는 안전과 윤리적 고려가 항상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AI의 개발 및 사용은 단일 주체의 통제 범위 내에 있지 않습니다. 이해관계와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는 정부, 기업 및 개인과 같은 다양한 이해 관계자가 관련됩니다. 이로 인해 AI에 대한 통합 규칙 세트를 설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은 지능형 기계의 안전과 윤리적 행동을 보장하기 위한 유용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하지만 인공 지능의 진화를 제어하기 위한 완벽한 솔루션은 아닙니다. AI 개발의 잠재적 위험과 이점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인간의 안전과 웰빙을 우선시하는 윤리적 지침을 개발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은 AI의 개발 및 사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지만 진화를 완전히 제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AI 개발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문가와 이해관계자 간의 지속적인 연구와 대화가 필요합니다.


인공지능인 쳇지피티(ChatGPT) 자신도 인공지능의 진화 방향에 대해서 이렇게 걱정하는데 정작 그걸 창조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무위도식의 달콤한 미래의 유혹에 빠져서 또한 경제적 돈벼락이라는 탐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주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결과가 또 다른 우리(?)를 창조하는 우리가 되어 이렇게 세상을 마구 헤집어 놓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가르침을 어기고 오히려 이제는 창조주조차 넘어서 보겠다고 박박 우기며 바벨탑을 완성해가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창조주의 심정은 어떨까? 하물며 창조주와 비교조차도 불가한 하찮은 능력가지고 우리가 겁도 없이 창조주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가겠다고 객기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생각을 전략적으로 하게 되고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풍요를 누리고 생산성과 효율이 향상되어 더욱 여유롭고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반면에 그에 상응하는 각종 사고와 전쟁, 기후위기 등을 엄청난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자공의 고사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무위도식하기 위해,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무한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위도식이라는 충실한 삶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명을 송두리째 거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림 4.5에 보인 바와 같이 그저 우리의 충실한 삶을 기본으로 만족과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위도식이 삶의 기본자세가 되면 이미 채우고서도 멈출 줄 모르는 프란체스코 교황의 탐욕의 마술 잔(magic glass)이 아니라 적어도 스키델스키의 “How much is enough?”를 되새기며 성찰이 가능한 마음 자세가 되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 가지면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해’하고 만족할 줄 아는 비로소 노자의 지족자부(知足者富)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자의 도덕경 9장을 살펴보자.


持而盈之 不如其已 (지이영지 불여기이)

揣而梲之 不可長保 (취이절지 불가장보)

金玉滿堂 莫之能守 (금옥만당 막지능수)

富貴驕 自遺其咎 (부귀이교 자유기구)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길이 없다.

금과 옥이 집을 가득 메우면 그를 지킬 길 없다.

돈 많고 지위 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이다.

- 도덕경 상편 제9장 - [참고 2.32]


노자는 말한다. 이미 필요한 만큼 갖고 있으면서 더 가지려고 욕심 부리는 것은 그 때에 멈추는 것만 못하다고 일갈한다. 그 이유는 무언가를 열심히 갈아서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칼은 날카로울수록 예리하고 칼로서의 기능이 향상되지만, 칼은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금방 무뎌지고 한계를 벗어나면 칼로서의 강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연습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당연히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축구의 박지성 선수처럼 무릎 연골이 다 닳아 버려서 오히려 조기 은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선수생활을 오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체력을 단련하려고 운동을 하는데,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신체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지족자부(知足者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 금과 옥이 가득하여 넘쳐나면 그걸 제대로 지킬 길이 없다고 가르친다. 아니 성능 좋은 금고를 설치하고 훈련된 경비원을 두거나 은행에 안전하게 맡기면 충분히 가능한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보통 우리는 쓴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중국이 북방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중국은 만리장성이 파괴되어서 침략당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성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고, 보통 거부들이 재산을 잃는 것은 금고나 경비원이 문제가 아니라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의 배반이나 가장 가까운 가족의 바보 같은 행동들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 이제 노자의 지이영지 불여기이(持而盈之 不如其已)를 마음에 되새기면서 스키델스키의 “How much is enough?”로 성찰할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졌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Ryff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가지는 6가지 특성과 함께 우리의 문제를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행복한 사람의 6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참고 4.3]


첫째, 환경의 통제(environmental mastery)

둘째, 타인과의 긍정적 인간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

셋째, 자율성(autonomy)

넷째, 개인적 성장(personal growth)

다섯째, 인생의 목적(purpose of life)

여섯째, 자기수용(self-acceptance)


이 특성을 종합하여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행복한 사람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에 의한 일관성 있는 목적을 가지고,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타인과 상호 공감적이고 신뢰 관계를 형성하여 자율적이면서도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하고 그 상황에 적합한 가치를 창출하는 통제감을 가진 사람이다. 조금 더 단순화하자면 나 자신의 문제와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해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즉 나 자신의 문제인 내 인생의 목적(purpose of life)과 지속적인 성장(personal growth)에 대한 자기 수용적, 긍정적 태도(self-acceptance)와 내 주변과의 관계인 타인을 포함한 주변 환경의 통제(environmental mastery)와 이에 따른 자율성(autonomy)의 확보를 위하여 이들과의 긍정적 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앞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했지만, 결론적으로 행복은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귀결된다. 부연하자면 공동선의 삶, 존엄한 삶을 위한 행복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만족, 욕망)에 대한 자기 수용적, 긍정적 태도(self-acceptance)와 “좋은 사람과 함께”, 즉 가치를 위한 긍정적 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를 얼마나,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3.2.1 사람의 욕망 그리고 제어”를 실천하는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참 많은 길을 돌아 왔다. ‘그림 3.2. 인간의 본성’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의 본성은 인의예지의 마음과 7가지의 감정이 ‘마음자리’하고 있다가 우리의 세계관, 자아상 그리고 내외부의 처한 상황에 따라 욕망이 ‘마음결’을 일으키고 ‘마음씀’으로 이어져 ‘마음씨’로 표출된다.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인 ‘인의예지’가, 우리의 ‘이성’이 확고부동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하는 ‘의지의 나약함’ 따위가 없어서, 칸트의 ‘정언명령’대로 욕망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춘추전국시대의 골육상쟁도, 1, 2차 세계대전의 아비규환도, 비참한 노예제도도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도 경험하지 않고 예수를 따라, 붓다를 따라, 노자를 따라 존엄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 덕분에 그나마 우리가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기후위기가 되었든, 3차 세계대전이 되었든 가까운 미래에 6차 대멸종을 초래할 것임을 알고 있기에 성현들의 지혜를 다시 소환하여 우리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노력을 기울여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3.2.2 행복, How much is enough?”를 통해서 행복은 ‘욕망’ 충족의 결과인 풍요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 다는 사실에서 존엄성 회복을 위한 실마리를 찾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스키델스키의 충분의 7가지 조건(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을 보장해주고, 쉴러의 과도한 피싱(Phishing)을 규제함으로서 끊임없이 탐욕을 부추기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의 자본주의에서 불견가욕(不見可欲)의 가치주의로 중심이동을 꾀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이루어져야 우리의 행복인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의 풍요(욕망)에만 매달려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었던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가 마치 더러운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사회 공동체의 영역이고, 우리 모두 공동선의 행복한 삶을 추구 할 때 가능해 지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개개인이 존엄성을 회복하고, 내가 존엄한 만큼 타인도 존엄함을 인식하고 존중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이제까지 칸트의 ‘정언명령’으로도, 예수의 ‘사랑’으로도, 붓다의 ‘자비’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욕망’을, 그림 3.3에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충족 5단계와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의 3단계로 표현한 욕망과 행복의 단계를 통하여, 실천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탐색해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3.2.2 행복, How much is enough?”에서 스키델스키의 충분의 7가지 조건이 충족되고, 우리의 주관적인 행복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조작하는 쉴러의 피싱(Phishing)이 적절하게 규제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노자의 지족자부(知足者富), 지이영지 불여기이(持而盈之 不如其已)를 깨달아 행복의 첫 번째 단계인 ‘만족’은 비교적 여유롭게 실천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이는 매슬로우의 욕구 충족 3, 4단계인 사회적 그리고 존중의 욕구 단계에 이르면, 비록 우리가 만족하고 있다 하여도 행복의 두 번째 단계인 공동체에서의 상호 비교에 의하여 우리의 만족은 무참히 깨져버릴 수 있음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의 풍요(욕망)에만 매달려 무한경쟁의 수렁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를 소환해서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행복의 과정을 추구해야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샘솟아 나오는 ‘욕망’을 ‘이성’으로, ‘성경’으로, ‘불경’으로 무조건 억누르고 제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의 가치로 취사선택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 이제 니체의 ‘초인’의 정신으로 세상을 충실하게 살면서 흔들릴 때 마다 노자의 속인소소 아독혼혼(俗人昭昭 我獨昏昏)으로, “How much is enough?”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더불어 그림 4.5에서 살펴본 행복의 3요소 중 하나인 ‘충실’을 소화하여 ‘무위도식’이 아닌 ‘유위도식’으로의 프레임 전환과 Ryff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풍요(만족, 욕망)에 대한 자기 수용적, 긍정적 태도(self-acceptance)와 “좋은 사람과 함께”, 즉 가치를 위한 긍정적 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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