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뚜라 27화

4.2 존엄성실천하기_5

4.2.3 존엄성실천하기_3

by 이성룡

두 번째로, 그림 4.6(b)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존엄성 실천에 대하여 함께 논의 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에서 그림 4.6(a)의 WOOP사고법을 적용한 존엄성 회복의 실현 가능한 프로그램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우리의 이성이 직관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우리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존엄성 실천 프로그램을 그림 4.6(b)에 보였다. 우리는 그림 4.6(a)의 WOOP사고법을 적용한 존엄성 회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공동선의 행복한 삶이라는 성과 그리고 이에 따른 지혜롭고 실현가능한 목표 설정, 이를 성취하기 위해 방해요소들까지를 고려한 실천계획 수립 및 실천 등을 설정하거나 실천하는 과정 매 단계, 매 순간 마다 시스템 2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합리적 이성으로 수립 및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그림 4.6(b)이다.

우리의 자아상이 원래부터 존엄성을 갖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뇌의 가소성[그림 4.1 참고]을 갖고 있어 얼마든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존엄한 자아상을 재정립할 수 있으며, 이처럼 재정립하는 과정을 그림 4.6(b)의 빨간색 부분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패를 경험하거나 축의 시대 성현과 같은 새로운 지혜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자아상이나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거나 세계관 확장을 통해 자아상을 재정립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비전인 공동선의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이의 전제인 존엄한 자아상 정립에도 그림 4.6(a)의 WOOP사고법을 적용한 프로그램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축의 시대의 성현들과 석학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보편화된 세계관으로 존엄한 자아상을 정립하였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실천이고 WOOP사고법을 적용한 프로그램으로 매 순간, 매 단계 마다 성찰을 통해 보완하고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존엄한 자아상을 정립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뇌는 에너지 최소화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림 4.6(b)에서처럼 단순화와 일관성 전략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시스템 1(Fast Thinking)의 직관적 결정으로 점화효과, 후광효과, 진실착각, 과신(확증편향 포함) 등의 직관적 오류로 오염된 즉각 반응(인상, 직관, 감정)에 의하여 순간적이고 직관적으로 결정하고 시스템 2(Slow Thinking)에 이를 전달한다.[참고: 3.2.2 행복, How much is enough?] 이에 시스템 2는 뇌의 에너지 최소화를 위해 나태하고 게을러서 이 왜곡된 정보를 그냥 승인해 버리고 거기에 더하여 기억하는 자아의 인지착각, 회상용이성 편향 그리고 주목착각 등에 의해 편향된 정보를 승인하는 ‘마음결’과 ‘마음씀’으로 비합리적 ‘믿음’과 ‘행동’을 하는 ‘마음씨’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직관적 오류에 빠지는 우리의 ‘마음결’을 알아차리고 인지착각과 주목착각에 의한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시스템2가 준비 상태를 유지해야만 합리적 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2가 상시적으로 준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정신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의 뇌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피곤한 상태이거나,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함께 몰려들게 되면, 뇌의 생존전략인 에너지 최소화 전략에 따라 시스템2가 스스로 자기통제를 포기하는 ‘자아고갈’ 상태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스템2가 상시적으로 준비 상태를 유지하여 합리적 이성으로 존엄성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을 살면서 ‘삶의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첫째, 심신단련을 통한 건강한 체력 유지, 둘째, 욕심을 줄이고 삶의 여유를 유지하여 심리 및 정보 바보(Psychological & Informational Phool)가 되어 피싱에 낚이지 않는 합리성 확보, 셋째, 자신의 능력의 최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지혜롭고 실현가능한 목표를 설정한 다음, 이의 100%가 아니라 80% 정도를 목표와 성과(Wish & Outcome)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공동선의 좋은 삶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해 왔다. 이를 위해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와 가르침을 소환하여 우리의 세계관을 보편타당하게 정립하고 자아상을 재정립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우리 뇌의 가소성을 믿고 우리 개개인 모두가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우리 인간이, 모든 인간 개개인이 지금처럼 신자유주의의 프레임으로 적자생존과 무위도식하는 무한경쟁의 삶을 계속 추구하는 한 가까운 장래에 3차 대전이 일어나거나 기후위기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6차 대멸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관과 자아상을 재정립하여 마이클 센델의 공동선의 삶으로 보편화하자고 제안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공동선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 의식의 함양, 둘째, 자유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화, 셋째, 공동체 연대를 통한 불평등 해소, 넷째, 도덕에 기초하는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나만 존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개개인 모두가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한 다음 첫째,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둘째, 칸트의 존엄을 사르트르의 연대로 확장하며, 셋째, 센델의 공동선으로 삶을 프레이밍해서 우리 모두가 실제 존엄성을 회복하고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하여 우리 삶의 여정을 그림 4.7과 같이 표현해 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세계관과 자아상을 어떻게 재정립하고, 존엄성을 회복해서 이를 실천하며 ‘공동선의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하여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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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7. 우리 삶의 여정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나와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 채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림 4.7에 보인 바와 같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나드 쇼의 해학적인 묘비명 “내가 뭉그적거리다 이런 일 생길 줄 알았어.(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처럼 그저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설사 성공해서 대재벌이 되었든, 권력의 정점에서 세상을 호령했든 모두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인생무상을 외치며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러한 사실은 애플 제국의 회장 스티브 잡스가 병석에 누워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우리에게 남긴 말로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참고: 3.2.4 가치 있는 삶] 소위 세상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적인 행복한 삶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현재까지의 해답은 들뢰즈가 그의 저서 ‘니체와 철학’에서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 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현대 철학의 아버지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이다. 초인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목적과 의지로 우연과 규율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문제는 성현들이나 철학자들의 지혜를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 우리의 생활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에는 일정 부분의 갭(Gap)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들인 성현들의 숭고한 지혜를 요즘 SNS상에 떠도는 명사들의 인생 교훈들과 연관 지어 설명하면 좀 더 친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초인을 좀 더 쉽고 현실감 있게 표현한다면, 교세라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가 90년 살면서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는 삶의 교훈 5가지를 실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인생이란 자기 자신이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드라마다. 어떠한 드라마를 그릴지는 본인이 하기 나름이며 마음이나 사고방식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못하는 것이고 장래의 자신이라면 가능하다고 미래진행형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한 깨끗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신념, 소원은 꼭 성취된다. 반대로 사리사욕을 바탕으로 한 ‘흐려진 원망’은 한번은 실현되더라도 일시적인 효력으로 끝나고 만다.

4.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천직이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어진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일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5. 사람은 영감을 밖에서 추구한다. 하지만 나는 안에서 추구한다.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일의 가능성을 맘껏 추구하고 개량을 더해 가면 상상도 안됐던 큰 혁신을 도모할 수 있다.


가즈오는 90여 년 삶의 경험을 통해 좋은 삶이란 자신만의 창의적인 목적과 의지(5번)를 자기 주도적(1번)이고, 긍정적(2번)인 의지와 자신만이 아닌 세상을 위한 신념(3번)으로 실현하고 성취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만의 목적과 의지로 우연이라는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서 나약하게 신이나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니체의 초인과 같은 사람이다. 다만 사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4번)은 사회의 규율과 시스템, 즉 현재의 신자유주의 프레임 안에서 모범생처럼 사는 것으로 신자유주의가 잘못된 시스템이라면 이를 과감하게 넘어서 극복하는 니체의 초인과 다르다. 결론적으로 니체의 초인은 일원론의 관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였지만 자신만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목적과 의지는 고수하였고, 가즈오는 거기에 더하여 사회 시스템에 의한 규율권력 안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였다. 다시 그림 4.7로 돌아와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하게 태어난 우리는 존엄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우연과 규율권력 속에 놓인 강물을 매순간 선택하면서 헤쳐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에 자신의 목적과 의지, 또 다른 존엄한 존재들과의 관계, 우연과 규율권력이라는 환경, 그리고 존엄성을 유지하고 실천하기 위한 선택과 성찰 등이 있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하여 그림 4.7의 삶의 여정을 그림 4.8과 같은 플로챠트(Flow Chart)로 나타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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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8. 우리 삶의 플로챠트(Flow Chart)


그림 4.8에서 우리는 우연히 태어났지만 우리의 자아상에 의하여 자유로운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유애)하고 계속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무유애) 허무주의에 빠져 무의미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것인지 선택하게 되는데, 후자인 무유애는 우리의 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유애’의 우리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목적과 의지’는 설사 초인에 걸 맞는 목적과 의지라 하더라도 이는 자신의 본능에 기반 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인 다르마[도(道)]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 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목적과 의지로 그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진리에 따라 그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위이불시(爲而不恃 : Action without self-assertion)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냥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흐르면서 생이불유(生而不有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의 자세로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과정이 삶인 것이다. 시노웨이의 말처럼 이 과정에서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무엇을 비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문제는 니체의 초인(Übermensch)처럼 사는 것도 어렵지만, 예수, 붓다, 노자처럼 자신의 목적과 의지가 아니라 세상의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6차 대멸종을 극복하고 공동선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존엄성을 실천해야만 하기에 첫째, 강물처럼 위이불시 하는 세상의 진리로 세계관을 보편화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자아상을 존엄하게 재정립한 다음, 둘째, 그림 4.6의 WOOP 사고법에 의한 존엄성 실천하기를 실행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이불시의 세계관으로 자신만의 목적과 의지를 설정하되 지혜롭고, 실현가능하게, 자신의 능력의 최대치를 알고 이에 맞게 설정해야할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설정된 목적과 의지의 20%를 덜어내어 파레토 효과에 의한 삶의 여유를 갖고 합리성을 확보하여 존엄한 삶을 살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창의적인 목적과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유애의 삶을 살아가는데, 에릭 시노웨이가 그의 저서 ‘하워드의 선물’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7개의 자아(가족적, 사회적, 영적, 육체적, 물질적, 여가적, 직업적 자아)를 저글링하며 외줄타기 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그림 4.8]. 알다시피 외발자전거로 줄타기 하는 것은 멈출 수 없다. 물 흐르듯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묵묵히 실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우연과 규율권력 속에서 매순간, 매 단계 마다 선택하며 살아간다. 우연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7개의 자아 즉, 가족적, 사회적, 영적, 육체적, 물질적, 여가적, 직업적 자아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저글링하며 살아갈 수 없다. 예를 들어 가족 중의 하나가 위독한데, 회사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그림 4.8에 보인 것처럼 우연이라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매순간, 매 단계 마다 탐욕을 버리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하여 성찰을 통해 존엄성을 재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목적과 의지로 선택과 성찰을 하며 살아가는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관계’, 그리고 ‘우연’과 ‘규율 권력’이다. 우리의 존엄한 삶, 공동선의 좋은 삶을 위하여 이 두 가지가 선한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자.


첫째, 사회적 ‘관계’이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큼 존엄한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1938년부터 무려 75년이 넘게 진행하고 있는 하버드대의 연구결과가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참고: 3.2.3 관계 그리고 소속감] 이 연구에서 얻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는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이고, 이러한 좋은 관계가 우리의 삶에 매우 유익한 반면 관계에서 고립된 고독은 해롭다는 것이다. 또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질이지, 관계의 양, 즉 친구의 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존엄한 목적과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다른 목적과 의지를 가진 타인들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림 3.9 삶의 경험에 따른 삶의 만족도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참고: 3.2.2 관계 그리고 소속감] 그림 3.9에서 보여준 사례는 실직, 이혼, 사별과 결혼의 경우 삶의 만족도의 패턴이 서로 다르다. 실직, 이혼, 사별 등은 이러한 부정적 사건을 경험한 후 혼자 즉 자기 자신 스스로 감당해야할 삶이라면 결혼은 자신과 배우자 그리고 가족들의 관계로 형성되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우리의 ‘착각의 오류’가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픔과 시련에 적응하고 극복하여 일상의 삶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인 결혼은 주목착각에 의해 장밋빛 꿈에 젖어 잔뜩 기대하고 결혼 했다가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현실을 자각하며 삶의 만족도가 떨어진다. 이는 우리가 서로 존엄한 타인을 존엄한 의식(대자)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대상(즉자)으로 대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법륜스님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그냥 예뻐서 좋아하는 것이지 꽃에게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면서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도 이처럼 무얼 바라지 말고 그냥 하라고 말한다. 문제는 꽃은 우리 의식의 대상(즉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호불호에 따라 그냥 좋아하면 되지만, 사람(타인)은 스스로 의식(대자)이기 때문에 나의 의식(대자)과 매순간 공감하도록 서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시스템 2가 항상 직관적 착각 오류를 보정하여 합리적 이성으로 행동하도록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뇌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자아 고갈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여유를 확보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져야 푸코의 “나는 배웠다.” 시처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 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서로 노력하는 것이 바로 Ryff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가지는 특성 중에 중요한 하나인 타인과의 긍정적 인간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를 형성하는 것이요, 공동선의 삶을 향한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둘째, ‘우연’과 ‘규율 권력’이다. 그림 4.7, 그림 4.8과 같이 우연과 규율권력이라는 환경 속에서 각자 자신의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서로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존엄성을 유지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는 매순간, 매 단계 마다 끊임없이 선택과 성찰을 하면서 공동선의 좋은 삶을 향해 삶의 항해를 해 나가는 것이다. 이 삶의 여정 중에 우리는 우연이라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과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규율권력의 프레이밍으로 풍요를 향한 무한경쟁의 욕망의 유혹이라는 풍랑과 암초들을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그때마다 선택을 해야만 하고 때론 성찰을 통해 자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먼저 우리 삶 전체에 드리워진 우연에 대하여 살펴보자. 천지불인(天地不仁)하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한 세상의 진리에 대한 본질과 목적을 우리가 알 수 없듯이 우연이라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 목적과 이유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 없이 진행된다. 어떻게 보면 우연이라는 영역은 세상의 진리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우연의 영역에서 우리가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진행하는 일의 대부분은 노력하고 실천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만, 알 수 없는 우연한 일들로 인해 노력하고도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우리는 이를 운칠기삼(運七技三: 운 70%, 능력과 노력 30%라는 의미로, 최선을 다해도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말)이라며 때로는 성취에 대한 겸손한 말로, 때로는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목적과 의지가 지혜롭고 결연하며 실천 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연이라는 불확실성으로 결과를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자유로운 목적과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우리에게 자유는 우리를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걱정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근거를 그저 자신의 의사 외에는 찾을 수 없는 대다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준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행위를 선택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결정되고 그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책임이 항상 결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 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세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순환한다. 즉 얼음(고체)이 녹아 물(액체)이 되고 또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기체)로 변화하여 구성 입자들의 자유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자유가 증가하는 방향을 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도가 증가하면 할수록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커져, 걱정과 불안감에 휩싸여 스스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절대자 또는 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또는 유전자)대로 살아가게 되어있다는 결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삶이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라고 할 수 없고, 우리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니체의 초인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유 선택으로 자신만의 삶을 건설하는 비 결정론자이어야만 하고, 카이사르가 목숨을 걸고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결기로 삶에 최선을 다하는 공자의 진인사대천명, 성경 잠언의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여호와께서”의 자세로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걱정과 불안감에 의해 자아가 고갈되고 무력감에 빠져 초인을 추구할 수 없는 악순환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니 젤린스키는 그의 저서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이며, 22%는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 4%는 우리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일이고, 오직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한다.[참고 4.4] 이에 따르면 우리 걱정의 92%는 결국 어떻게 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지나간 일, 그리고 삶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사소한 일에 매달려 걱정 마귀에 시달리며 쓸데없이 자아를 고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4%는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여서 우리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일로 걱정한다고 해결되지도 않고 걱정해봐야 소용없는 일인 것이다. 즉 우리 걱정의 96%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고, 나머지 4%만이 우리가 잘 준비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걱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고 정신적으로 위안이 되며 심리적 안정을 꾀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사실 현실 생활에서 이처럼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SNS에 걱정과 관련한 내용들이 참 많이 보인다. 그중에 법륜의 “걱정 없이 사는 9가지 지혜”가 눈에 띄어 그 내용을 내 생각과 함께 편집하여 소개한다.


첫째, 걱정을 없애려 하지 말고 몰아내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걱정은 걱정이 생길 때 “걱정하지 말아야지.”하는 순간 이것이 오히려 걱정이 되어 가중된다. “걱정그만하고 운동이나 하자.”와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서 자연스럽게 걱정을 잊도록 마음을 다스리자.

둘째, 필요 이상의 집요한 생각이 걱정을 만든다.

생각을 하다가 어떤 생각에 멈춰 그 생각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걱정으로 발전한다. 생각이 집요해지기 전에 생각을 돌리도록 마음을 다스리자.

셋째, 어리석은 고집이 걱정을 낳는다.

확증편향적인 고정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 남의 비평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마인드를 갖도록 하자.

넷째, 의심의 노예가 되지 마라.

물 흐르듯 진행되어야하는 일에서 의심은 방해의 둑일 뿐 아니라 걱정의 수문이다.

다섯째, 이미 일어난 일로 걱정하지마라.

과거에 대해 성찰은 하되 이 일로 고민 하지마라.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

여섯째, 아프다 생각하면 정말 아파진다.

SNS 등에 의해 왜곡된 지식과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손쉬운 약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건강하다는 99%의 증거보다는 병이 일어날 가능성 1%에 집착하여 쓸 대 없이 걱정하고 병을 만든다. 건강문제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능동적, 긍정적 사고로 임하자. 행복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수용(self-acceptance)을 가진 긍정적이다.

일곱째, 과도한 스트레스로 잠을 못 잔다.

나에게 밀려들어오는 모든 일을 다 하려하면 자아고갈로 오히려 아무 일도 못한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 일은 버려라.

여덟째, 여유를 가져라.

우리는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가 언제 오나 자꾸 시계를 본다. 버스는 내가 초조하든 안하든 때가 되면 온다. 때로는 긴장을 풀고 뇌의 에너지를 최소화하여 자아가 고갈되지 않도록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아홉째,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지 마라.

겸허한 자세(Memento Mori)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다음(Amor Fati) 자신의 능력 안에서 삶을 즐겨라(Carpe Diem). 노자의 궁력거중(窮力擧重)의 지혜를 받아들이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역도 선수처럼 온 힘을 다해 무거운 것을 들면 그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러한 법륜의 지혜는 우리 삶의 여정에서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사실 이 지혜의 저변에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자아가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세상의 모든 현상이 제행무상(諸行無常)하여 어느 것도 영원불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면 고통과 걱정이 사라지는 열반적정의 3법인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본능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고, 법륜의 걱정 없이 사는 9가지 지혜도 이것에 기반 한 실천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붓다나 예수의 경지에 도달하는 지름길인 것은 분명하지만, 속세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야하는 우리 같은 범인이 실천하기에는 매우 어려울 뿐 만 아니라, 자칫 이를 우리의 생존전략인 문제회피전략으로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 꼭 해야만 할 일까지 내려놓아 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해서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초인과 붓다의 해탈 사이에서 지혜롭고 실현가능한 방법을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혜가 바로 노자의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위학일익(爲學日益) 공부를 하는 것은 날마다 더해지는 것이지만, 위도일손(爲道日損) 도를 행하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배워 안다는 것은 지식이 점점 쌓이고 많아져서 견문이 넓어지는 것이지만, 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적과 의지를 점점 덜어내고 범아일여 즉 세상의 진리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선약수(上善若水)로 보편화된 세계관 안에서 니체의 초인을 추구하도록 자신의 목적과 의지를 설정하고 이를 지혜롭게 실천할 수 있도록 선택과 성찰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연의 영역에서 돈키호테처럼 물불 안 가리고 전력투구하거나 반대로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40%의 절대 일어나지도 않을지도 모를 일에 대해서도 미래를 대비하여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처는 필요하고, 30%의 과거에 이미 벌어져 엎질러진 물이 된 일에 대해서도 냉철하고 지혜로운 성찰이, 22%의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옥석을 가리는 합리적 판단이 필요하며, 4%의 주어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는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불나방처럼 죽을 둥 살 둥 온갖 걱정과 스트레스를 안고 욕심껏 살 자거나 반대로 모든 걱정과 고통을 없애고 성인처럼 살자는 것이 아닌 지혜롭고 합리적인 선택과 성찰로 50~60% 정도의 걱정을 덜어 내고 현재를 즐기며 살자는 것(Carpe Diem)이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우연의 영역과 함께 우리 삶의 여정에 사회 시스템에 의해 프레이밍 된 규율권력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권력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윤리가 현대에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가 규율권력이요 프레이밍이다. 현대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자본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자본주의가 “그 정도로 만족해?”, “네 옆 사람을 좀 봐. 얼마나 폼 나게 사는지.” 하면서 인간의 주관적인 행복을 끊임없이 조작하고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규율권력 속에서는 초인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목적과 의지는 자기 자신만의 것이어서 이를 설정하는 과정에 소속감에 기반 한 연대의 가치보다는 자율성에 기반 한 풍요에 중점이 두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러한 목적과 의지로 삶을 살면서 끊임없는 선택과 성찰을 통해 성취한 결과 또한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인 욕심이 주어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도 제어할 능력이 없어 그저 ‘하면 된다.’는 희망고문으로 궁력거중(窮力擧重)하며 온갖 걱정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면서 어쩌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반복되는 실패에 좌절하고 운칠기삼(運七技三)에 위안 삼으며 버티고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삶은 기본적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 행복할 수 없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은퇴하면서는 굳이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생무상과 허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공동선의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목적과 의지가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보편화한 세계관을 토대로 설정될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세상의 진리처럼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닌 조금이라도 세상의 의지에 가깝게 실천[위이불시(爲而不恃)]하려 노력하게 되고, 이를 통해 성취한 결과 또한 가을이 되면 나무가 낙엽을 미련 없이 내려놓듯이 자기 것이라 소유하려 고집하지 않는 자세[생이불유(生而不有)]를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율성에 기반 한 풍요만이 아니라 이와 더불어 소속감에 기반 한 연대의 가치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목적과 의지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겸손하게 스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의 한계를 파악(Memento Mori)하고 이를 받아들인 다음(Amor Fati), 자신의 최대 능력이 아닌 능력의 80% 정도로 목적과 의지를 여유 있게 설정하고 가치 있는 삶을 충실하게 즐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Carpe Diem)이다. 이러한 삶은 성공과 실패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사실 실패를 실패가 아니라 경험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선택과 성찰을 통해 다시 삶을 즐기면서 진인사대천명 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소속감을 기반으로 연대와 협동을 통해 매순간 선택하기 때문에 걱정과 스트레스 보다는 지호락(知好樂)의 가치 있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신자유주의의 규율권력이 자신의 주관적인 행복을 유혹해 자신의 목적과 의지가 흔들린다면 그때마다 노자의 속인소소 아독혼혼(俗人昭昭 我獨昏昏)으로 성찰하면서 존엄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처럼 계속 신자유주의의 규율권력 하에서 적자생존과 무위도식의 무한경쟁과 인간의 주관적인 행복을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조작하여 욕망을 부추기는 체제를 방관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한, 가까운 장래에 기후위기에 의한 생태계 파괴 또는 3차 세계대전으로 6차 대멸종을 초래할 것이라는 걸 잘 안다. 설사 이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후속세대 들에게 공동선의 좋은 삶을 건설하고 물려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각자 존엄성을 회복하고 존엄한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축의 시대’ 성현들의 지혜를 소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이를 지혜롭게 실천할 방안들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 하였다.이제 우리의 결단만 남았다. 공자의 군자회덕 소인회토(君子懷德 小人懷土)를 실천해야 할 때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되고 유한계급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발버둥 치더라도[소인회토(小人懷土)] 우리는 소속감을 기반으로 하는 연대의 가치, 공동선의 좋은 삶을 생각하자는 것이다.[군자회덕(君子懷德)] 나바호 인디언의 격언 “네가 태어날 때 너는 울었어도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라.”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의 가르침 “내가 강가에서 깨달은 것은 참는 것과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이다.”인 것이다. ‘참는 것’은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는 욕심에 대한 절제요,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일들에 대한 긍정적 자기 수용성(Self-acceptance)이다. 푸코의 시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이다.”처럼 말이다. ‘듣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며 상대와 공감하는 가치에 몰입하는 것이요, 타인과의 긍정적 인간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를 형성하는 것이다. 푸코의 시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 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처럼 말이다. ‘생각하는 것’은 군자회덕(君子懷德)의 공동선의 좋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노력해서 자아상을 재정립하여 존엄성을 회복하고 이의 실천을 통해 ‘공동선의 좋은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이상과 같이 우리의 존엄한 삶, 공동선의 좋은 삶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매 단계 마다 해야만 하는 ‘선택’과 이의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시노웨이의 ‘하워드의 선물’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도록 하자.[참고 3.23]

파스칼은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고 하였다. 캐너먼과 같이 우리 인간의 비합리성을 일갈한 것이리라. 어쨌든 우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하여 우연이라는 불확실성을 최대한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어도 자신의 불확실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 3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선택을 해야 하는 현재의 객관적 상황과 그 결과에 대한 객관적 만족도는?

2. 선택에 따라 1년 혹은 2년 뒤 얻고자 하는 구체적 결과는 무엇인가?

3. 위험을 감수하고 선택했을 경우, 실패했을 때의 구체적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상황을 이해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선택’의 결과에 대해 캐너먼의 전망이론에 의한 위험회피 또는 추구 본능이 아닌 합리적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알아보자.


1. 위 3가지 원칙에 따라 위험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자.

2. 문제를 장기적 관점으로 보고 장기적인 결과를 위해 단기적 위험은 감수하자.

3. 숲에서 나와 숲 전체를 바라보자.

4. 이 선택이 되돌릴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고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하자.

5. 위험은 가급적 분산하도록 하자.


이상과 같이 불확실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예측가능성을 끌어 올려 ‘선택’하였으면, 이제 좌고우면하지 말고 과감하게 이를 ‘실천’하도록 하자. 새뮤얼 스마일즈의 “우리는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발견함으로써 해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이크 레이븐의 “높은 산일수록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등과 같은 교훈에 힘을 얻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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