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언저리
최근 4~5년 동안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환갑이라는 인생의 큰 언덕을 넘어버린 지금 생각해보면 무얼 위해 그렇게 결사적으로 살았나 싶다. 어느 날 이쁜각시가 제주에서 한 달 살아보기에 대해 농담처럼 툭 던진다. 일상에서 벗어나 제주도에서 좀 쉬면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친한 친구가 아주 좋은 숙소를 소개해 주겠단다. 자기와 아주 가까운 선배 부부가 은퇴하고 서귀포에서 살기 위하여 집을 짓고 있는데, 3월 말에 완공이란다. 이렇게 우리의 제주 보름 살기는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 누군가 불길한 생각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오늘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기예보가 정확하다. “도대체 누가 기상청 직원들에게 불평을 하는 거야? 이렇게 정확하게 일을 하는데, 참나” 이런 생각도 잠시 “아니 제주에는 강풍도 분다는데, 보름 살이 이삿짐(?)들고 어떻게 이동하지?”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이제 환갑이 넘은 나이 인생 살만큼 살아 보았으니 아무런 계획 없이 좀 여유롭게 여행을 해보자는 생각이 벌써 저만치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은 일찌감치 도착해서 공항 수속을 받으면서 이미 기억창고 어느 곳으로 갇혀 버렸다. 사정 상 40여분 연착할 거란다. 상투적으로 던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인터스텔라 영화를 즐기는 시대에 왜 국내선 항공기는 여전히 내 어릴 적 엄마를 기다리던 시골 역 분위기에 머물러 있을까? 올 때마다 궁금하다. 사실은 이것이 제주여행 때마다 습관적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항공티켓 예약 할 때부터 걱정을 했던 일이다. 비행기 공항 도착시간과 군산공항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의 출발시간이 40분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그리고 다음 버스는 약 4시간 뒤에 있으니, 비행기가 연착한다는 것은 다른 교통수단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착한다는 비행기 기다리며 아메리카노 한잔 들고 비좁은 대합실 내를 배회하다가 안내데스크에 물어보니 비행기가 연착하면 전주로 가는 버스가 30분 정도 늦게 출발한단다. 참 아날로그적이다. 정겹다. 더 웃기는 건 그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내가 안도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저런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비행기는 도착했고, 탑승하기 위해 대합실을 나서니 비 온다고 장우산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고 활주로를 걸으며 군산에 바람이 이정도면 제주는 많이 불겠는데 하며 걱정스럽게 비행기에 올랐다.
역시 불길한 생각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을 또 되새긴다. 뭐 항공기를 이륙 시켰을 때는 안전하니까 그랬겠지 하며 잠시 상념에 빠져든 지 고작 20여분, 비행기가 롤러코스터로 변했다. 제주에 강풍이 내 생각 보다 훨씬 강하고 변칙적이었다. 최근 출장 등의 이유로 1년에 적어도 2번 이상 제주를 수없이 오갔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착륙 직전에는 무서움으로 변했다. 승객들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그것도 수차례에 걸쳐 들렸다. 조종사를 비롯한 항공기 승무원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무사하게 착륙했다. 렌트카 셔틀버스 기다리며 제주 강풍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대단한 바람이다. 렌트카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미리 온라인상에서 체크인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항공서비스와는 또 다른 세상이다. 정말이다. 렌트 계약서 마지막 사인 직전 직원의 친절한 한마디 “타이어 보험 추가로 가입하시겠습니까? 50시간 당 1만원입니다.” 아니 이건 무슨 소리야? 완전자차 보험에 가입했는데, 여기서 “완전”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한글을 잘못 배웠나? 제주 강풍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마트 들러 서귀포 숙소(친구에게 소개받은 처음 만나는 선배님의 집)까지 밤에 너무 늦게 도착하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빠듯하기도 해서, 내가 잘못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원 왈 “완전자차 맞는데, 계약기간 동안 1회에 한해 보상해주고 타이어로 인한 사고는 보상이 안 됩니다.” 정말 자본주의의 극치다. 더욱 가관인건 차를 건네주는 직원이 완전자차이니 자동차 흠집 이런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타이어 네 개 사진을 찍어 보관하란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참 묘한 생각과 함께, 비바람을 뚫고 서귀포 회수동 선배님의 집에 도착했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자 칠흑 같은 어두움이 온 몸을 감싼다. 뭔지 모르지만 완전 숲속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오는 날씨에 집 앞까지 나와 기다리던 선배님 부부가 반갑게 맞아준다. 너무 감사하다. 비오는 밤이기도 했지만 도시와는 딴판으로 불빛하나 없는 숲속이라 정원등 몇 개로 숙소 분위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가끔 꿈꿔오던 호젓한 전원주택인 것만은 분명하다. 집안으로 들어오니 일류 호텔 부럽지 않게 모든 걸 꾸며 놓으셨다. 어떻게 하다 보니 집을 완성하자마자 처녀림에 입성한 첫 손님이 되었다. 모든 것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 그대로 이었다. 좋기도 했지만 깨끗하게 잘 사용해서 보름이 지나서도 새것을 유지하도록 해야겠다는 조심스러운 생각과 함께 첫날밤을 시작했다.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아주 포근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오락가락하는 비와 함께 잔뜩 흐린 날씨에 바람도 여전했다. 당초 이번 여행만큼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 보리라라는 것이 유일한 계획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거실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넓은 정원의 푸른 잔디를 지나 숲이 지평선처럼 저 멀리 까지 이어져 구름하늘과 맞닿아 있다. 어느 사이 이쁜각시가 다가와 “저기 저 숲 끝이 바다야 하늘이야?” 나는 웃으며 “구름 낀 하늘이겠지, 여기서 바다가 보이겠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발하기 전 받은 주소로 구글링 했을 때 이 집이 한라산 언저리 어디쯤이었기 때문에 바다가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풍경이고, 이 모습이 너무 좋았다. 비가와도 좋다. 바람 불어도 좋다. 눈이 와도 좋다. 우리는 보름동안 이를 만끽해보리라. 날이 더 밝았다. 오호라 바다가 보이네. 해가 떴다. 해와 구름의 상황에 따라 바다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변한다.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아라,”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는 제주의 첫날 아침이다.
<사진> 제주 보름 살기 숙소
한라산 언저리 한적한 둔덕
산토리니 닮은 하얀 집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잔디정원 지나 숲의 경계
하늘과 맞닿아 있다.
문득 구름 걷히고
태양이 얼굴을 내미니
바다가 보인다.
구름 올레길 걷는 태양을 따라
바다가 현란한 춤을 춘다.
한라산 언저리 한적한 둔덕
산토리니 닮은 하얀 집
태양이 구름 올레길에 갇히면
잔디정원 지나 숲의 경계
바다가 하늘이 된다.
커피 한잔의 구름 속에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되는
한라산 언저리
- 2019년 4월 10일 아침에 이성룡 씀
<사진> 산방산과 유채꽃밭
점심 후에도 비가 오락가락하여 집에서 가까운 용머리해안과 산방산 주변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용머리해안은 강풍으로 파도가 높아 멀리서만 바라보고, 산방산 주변 유채꽃밭을 방문하였는데, 5~600평 밭에 유채를 심어 놓고 유채꽃밭 사이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면 1인당 천 원씩 이란다. 대규모의 유채군락을 기대했던 실망감에다가 유채꽃에 들어온 자본주의가 더해져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제주 유채꽃이 장관이라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검색해보니 표선면 가시리 유채꽃 도로를 소개한다. 별 기대 없이 무작정 찾아 갔는데, 약 10Km이상의 도로 양변에 유채꽃이 장관이다. 다만 벚꽃이 어느 정도 시들어진 뒤라서 좀 아쉬웠다. 벚꽃과 유채꽃이 함께 만개한 10Km의 드라이브는 생각만 해도 장관일 것인데, 어찌 자연의 조화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까, 언젠가 주어질 행운을 그저 기약할 수밖에.....
<사진> 표선면 가시리 유채꽃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