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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보름 살기_5

절물자연휴양림

by 이성룡

2019년 4월 15일 월요일 : 숲속 피크닉

오늘은 절물자연휴양림에 피크닉을 가기로 하였다. 제주보름살기를 준비할 때부터 이쁜각시가 해보고 싶어 했던 일이기도 해서, 조용한 숲속에서 여유 있게 하루를 만끽해보기로 하였다. 아침부터 이쁜각시는 도시락 준비하느라 바쁘다. 나는 따뜻한 봄이긴 하지만 숲속은 아무래도 추울 것 같아서 스웨터와 담요 하나를 추가로 준비했다. 이쁜각시는 어디 이민 가느냐며 웃는다. 평소 같았으면 내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을 텐데, 난 이번 여행에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웃음으로 대응하고 짐을 꾸렸다. 어울렁 더울렁 준비를 마치고 소풍 길에 올랐다. 서귀포 숙소에서 절물자연휴양림을 가는 4~50분의 여정, 제주의 자연을 만끽하면서 이쁜각시와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눈다. 새삼스럽게 나는 이 순간이 참 여유롭고 행복하다고 느꼈다. 갑자기 이쁜각시가 물어본다. “우리가 절물자연휴양림을 가본 적이 있죠?”


나는 절물자연휴양림을 두 번 방문 했지만, 아내와 같이 간 기억은 없었다. 게다가 최근 겨울에 방문했을 때는 쌓인 눈이 녹고 있어 산책로가 습지처럼 얼음물로 잠겨 있는 곳이 많았다. 처음엔 이색적인 분위기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산책로를 방수기능이 없는 운동화를 신고 걷다 보니 얼마 안가서 양말이 흠뻑 얼음물에 젖어버렸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 버렸고, 그냥 가자니 아직 많이 남았고,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경치는 좋았지만, 엄동설한에 시린 발을 끌고 얼음물 산책로를 첨벙거리며 걸었던 기억은 최악이었다. 나는 이쁜각시에게 단호하게 당신은 절물자연휴양림에 간 적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게다가 이 휴양림에 대한 나의 기억이 좋지 않아서 모처럼 숲속 피크닉을 즐기려는 당신이 실망하게 될까봐 좀 걱정된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아내도 기억이 어렴풋한지 더 이상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결론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덧 휴양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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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절물휴양림 내 우리의 피크닉 장소


편백나무 숲속 호젓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이다. 자연스럽게 숲속에 녹아들었다. 따가워지기 시작한 봄 햇살을 키 큰 나무들이 적당히 막아주고 산들거리는 봄바람이 싱그러운 숲 내음을 전해준다. 이름 모를 새들이 여기저기서 반갑게 맞아주니 어느덧 숲과 하나가 되었다. 평상에 누어 하늘을 찌르는 저 꼭대기의 하늘거리는 나뭇잎들을 한참 동안 보다가 돌아 누어 책을 보기도 하다가 다시 누어 꿈을 꾸기도 했다. 이쁜각시가 만들어온 점심도 먹고 따듯한 커피도 마셨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정말 좋은데 혹시 해서 가져온 스웨터와 담요로도 살짝 한기를 느꼈다.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은 냉난방장치가 완비된 아파트 거실에서 UHD TV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오름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너나들길을 걸으며 또 다른 자연을 만끽하기로 했다.


조금 걷다 보니 왠지 아내와 같이 와봤던 곳 같다. 아내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아내가 “거 봐요. 우리 같이 왔었던 곳이 쟎아요!”라고 한다. 할 말이 없다. 그때 보다 더 많이 가꾸어 놓기는 했지만, 분명히 아내와 같이 왔던 곳이다. 휴대폰 사진을 뒤졌다.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순간 내 기억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하며 자책하다가 “자연과 함께 해서 그 순간 좋았으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해”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였다. 사실 기억의 저편 창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휴대폰 앨범에 수백 장의 사진을 저장해 놓는 것도 좋지만 지금 이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이며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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