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게물공원
제주에 오면 한번 가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곳들은 다 들러 본 것 같은 교만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어디 가고 싶어?” 아내에게 채근하듯 물었다. “어때? 내가 보여 달라는 곳 다 보여줬지?”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는데,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에 가고 싶단다. “아니, 가고 싶은 데가 화수분이야. 어떻게 끝도 없이 나와?” 하는 생각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에서 파는 도시락을 경험해보고 싶단다. 원래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는 오설록에 있는 자연친화 화장품을 만들고, 체험해보는 곳인데, 이곳에서 제주의 신선한 식재료로 오가닉 도시락도 만들어 파는 카페를 운영한단다. 그래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한번 보고 먹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어제 한라산 다녀왔으니 아침은 좀 느긋하게 지내다가 11시쯤 출발해서 이니스프리에서 점심을 도시락으로 먹고 신창 풍력발전단지가 있는 싱게물공원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군산 오름을 다녀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11시 40분쯤 오설록에 도착했다.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와본 곳이어서 별 기대 없이 들어섰는데, 이건 뭐야?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옛날엔 몰랐던 제2주차장이 있네. 그사이 이렇게 달라졌나?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어설프게 안다고 설치는 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오설록 티뮤지엄에 들어섰다. 아내는 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바로 이니스프리가 어디냐고 묻는다. 이니스프리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아직 12시도 안 되었는데, 이놈의 갑작스러운 허기짐은 정말 답이 없다. 빨리 아무거나 하나 시켜서 먹자고 툭 던졌는데, 이쁜각시는 카페에 메뉴는 무엇이 있고, 이들은 각각 어떤 음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양은 어떤지 탐색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술 더 떠서 식재료들이 오가닉이라는데, 어디서 어떤 형태로 재배된 것인지 질문도 하고 자료도 뒤지며 열심이다. 나의 배고픔은 관심 밖인 것 같다. 그래서 “이쁜각시, 나 배고프다. 빨리 주문하자. 응?”하고 채근했다. 이쁜각시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본인이 살펴보고 싶은 것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어찌어찌 허겁지겁 점심을 먹었다.
<사진> 오설록에서 바라본 녹차밭 전경
칸트 할아버지께서 “인간이 본능에 구속되지 않는 도덕적 자율성을 가질 때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고, 도덕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라고 설파했는데, 배고픔 하나를 못 참아서 돼지가 되어 버렸다. 여유로운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가뜩이나 말이 없는 이쁜각시는 입을 닫아 버렸다. 그저 부디 인간이 되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수밖에... 한경 용수리 포구로 향하는 차창 밖은 내 마음과 달리 눈이 부시게 푸르다.
<사진> 용수리 포구
그렇게 용수리 포구에 도착했다. 용수리 포구는 올레 12코스 종점이다. 아담한 포구가 참 평화롭다. 한치를 정겹게 널어 말리는 너머에 차귀도가 보인다. 이곳은 김대건신부 표착 성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 김대건신부 표착 성지 (좌) 성당 (우) 성당에서 본 전경
아까 배고플 때와는 달리 안단테, 안단테... 느리게 그리고 여유롭게 이곳저곳 둘러보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만끽하면서 한경해안도로에 진입했다. 제주의 해안도로는 육지의 그것과 달리 참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제주에 있는 거의 보름을 자동차로 뚜벅이로 반복해서 해안도로를 다니는데도 가는 곳 마다 색다른 매력이 있다. 아름답게 드라이브하다 보니 어느덧 싱게물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국남부발전 국제풍력발전센터가 있는 곳이다. 해상 풍력발전단지를 싱게물공원으로 승화시킨 누군가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싱게물공원 - 해상풍력발전단지
일반적인 해상풍력발전단지와는 달리 단지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해안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였고, 발전기와 발전기 사이를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으며, 운치 있는 정자도, 잠시 쉬어가는 벤치도 있다. 발전기 사이 아름다운 바다 위를 돌아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탄소중립을 위해 풍력 발전기가 많아지면, 지구의 자전에 부하로 작용해서 지구의 자전 속도가 조금 느려지지 않을까? 그러면 하루의 시간도 길어질까? 물론 물리적으로 풍력발전기가 지구의 자전 속도에 영향을 주려면 지구 자전 토오크에 상응하는 부하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다시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다가 마음 내키면 천천히 걷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신창항 이다. 아쉽지만 이제 숙소까지 거리를 생각해서 발길을 돌리기로 하고, 가는 길에 군산 오름을 돌아보고 오늘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군산 오름은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 하나이지만 나에게는 직장이 있는 군산과 동명이라서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육지에 있는 군산이 여기에도 있네.” 이 정도의 호기심과 친근감으로 군산 오름에 도착했다. 자동차도로가 있긴 하지만 비좁고, 가팔라서 세심한 운전이 필요하다. 조그만 주차장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살짝 경사가 있는 계단 길이다.
<사진> 군산 오름 (상좌) 진지동굴 입구 (상우) 정상가는 길
(하) 정상에서 바라 본 서귀포 중문과 바다
군산 오름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에 일본군이 우리나라 민간인을 강제 동원해 만든 9개의 진지 동굴이 있다. 미군 폭격에 대비하여 군수품을 숨기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제주의 군산 오름은 군사 전략적으로, 육지의 군산은 드넓은 만경 평야의 식량 수탈 전초기지로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일제만행의 현장으로 공통점을 갖고 있으니 이를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 지 가슴이 먹먹하다. 다시는 나라를 잃는 처참한 역사만큼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