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따라가기
오늘은 제주에서 맞는 일요일이자 부활절이다. 이쁜각시가 몇 일전 예약해놓은 점심에 쿠킹 클래스 수강이 주요 일정이다. 가는 길에 올레 16코스 시작점인 애월항에 들러 구암포구까지 올레 16코스 일부를 산책하기로 했다. 애월항에 주차하니 무인 카페가 나를 반긴다. 무인 카페 “산책”, 산책 나온 나에게 그 이름이 참 정겹다. 내부에는 먼저 다녀간 여행객들이 남긴 메모들이 정겨움을 더욱 증폭 시킨다. 아주 먼 옛날 학창시절 “무감독 시험”의 추억 못지않은 기분 좋은 추억이다.
<사진> 무인카페 “산책”
제주에서 맞은 부활절의 오전에 이렇게 상쾌한 추억을 마음에 품고 올레 16코스를 만끽하고 쿠킹 클래스 “토토 아틀리에”에 도착했다. 사실 나는 요리에 문외한이어서 요리학원은 들어 봤어도 쿠킹 클래스는 처음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요리 학원을 팬시하게 영어로 쓰나 보다 뭐 이런 정도의 마음으로 왔는데,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가족 들이 대부분이다. 환갑 넘은 노인네는 우리 부부 밖에 없다. 프로그램을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쿠킹 클래스가 텃밭에서 필요한 식재료들을 직접 채취해서 요리를 경험하도록 하는 체험 교육이다. 순간 “요리라면 전문가 수준인 이쁜각시가 여길 왜 왔지?”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는데, 쿠킹 클래스의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을 경험해 보고 싶었단다. 요리 문외한인 나에게도 젊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참 신선해 보였다.
<사진> 쿠킹 클래스 “토토 아틀리에”
이쁜각시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나는 잔디밭을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부활절의 상념에 빠져 시 한편을 써 내려 갔다. “님 따라가기”다.
님 따라가기
이성룡
사랑을 실천하라는
님의 뜻 따라가기가
참 어렵네요.
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
자유가 나한테
시퍼렇게 살아 있거든요.
언젠가 순종이
자유를 이겨내면
님을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2019년 부활절 아침에
이쁜각시는 쿠킹 클래스에 참여하고, 나는 여유를 즐기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쓰고 이렇게 부부가 같이 여행하면서 때로는 같이, 때로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따로 또 같이”의 여행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체험도 하고 님도 따르고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는 또 올레길을 순례할 차례인가? 올레 18코스의 일부인 삼양 해수욕장에서 시작하여 함덕 해수욕장과 서우봉까지의 자연을 만끽 했다.
<사진> 조천 대섬 야자수 올레 길
오후에 산책한 올레 18코스 중에 인상 깊었던 곳은 삼양과 함덕 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조천 대섬 야자수 올레 길이었다. 야자수만으로도 이국적인 정취인데다가 유채꽃밭과 바다가 어우러져 사진을 꼭 찍어야만 할 것 같은 흥미로운 곳이다. 30여 년 전 신혼여행 때부터 학술발표, 출장, 여행 등으로 참 많이도 다녀간 제주인데, 마치 양파 껍질처럼 올 때 마다 새로운 곳을 보여준다. 적어도 제주에서 1년 이상 4계절을 온전히 살아보지 않고는 제주를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덧 숙소에서 가장 먼 반대편 해변까지 왔으니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길을 택해 운전을 하고 있는데, 이쁜각시가 갑자기 “더럭 초등학교에 들러 갈까?” 한다. “어디에 있는데?”하고 보니 애월 어디 쯤에 있다. 위치로 봐서 올레 18코스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들렀어야 할 곳이다. 이는 지금 오늘 지나온 코스를 되돌아 갈 뿐 아니라 숙소까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좀 돌아가지만, 이쁜각시가 원하는데 뭘 못하겠어. 오케이.”하고 방향을 바꿨다. 평소 같으면 내 사전에 없는 행동이다. 여행을 다녀도 미리 돌발 상황까지를 고려한 일정을 계획하고, 일정대로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었기에, 나에겐 잔잔한 파격이었다. 이쁜각시의 미소를 바라보며, 원래 무계획으로 여유롭게 나선 길인데, “좀 돌아가면 어때?”하고 혼자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사진> 애월 더럭 초등학교
아무튼 내 평생에 초등학교를 관광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찌어찌 더럭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오호라, 학교가 아담하니 참 예쁘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의 관광코스가 되었나?”하면서 둘러보니, 여기저기 호소문이 붙어 있다. 학생들의 교육 장소이니 이것저것 유념해 달라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입장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우린 일요일에 방문했지만..) 쳐들어와 사진 찍고 웃고 즐기는 관광객들이 부담스럽기도 하겠다. 여행을 하면서 여행자들이 즐기는 것도 좋지만, 현지인들과 역지사지해보고 배려도 하면서 즐기는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달리다 보니 어느덧 중문이다.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통갈치 조림으로 저녁 만찬을 즐기고 또 하루를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