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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보름 살기_13

엉또 폭포

by 이성룡

2019년 4월 23일 화요일 :

이제 제주 보름살기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육지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니 말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 그냥 비가 아니라 100mm가 넘는 비가 온다는 예보를 접했다. 이쁜각시의 여행은 소박하다. 자연으로의 여행과 전문영역인 요리에 새로운 음식과 식재료 탐색, 전통 시장 탐방 등을 좋아 한다. 비도오고 이쁜각시의 취향도 고려해서 마지막 날을 제주 동문시장, 카페 도리화과 그리고 한라산 1100고지를 지나 서귀포자연휴양림, 엉또 폭포를 거쳐 월령포구에서 여행을 마치기로 일정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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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귀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오는 도로


서귀포에서 제주로 넘어가는데 예상대로 비가 많이 온다. 차창 밖 유채꽃은 비에 젖고, 차창 안의 이쁜각시와 나는 감성에 젖고, 생각 보다 좋다. 우중 드라이브가... 제주 동문시장이다. 전통시장은 과거와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진한 사람 냄새가 난다. 이쁜각시는 채집에 바쁘고 사냥에 관심이 있는 나는 목표를 잃고 이쁜각시 따라다니기 바쁘다. 그나마 이 나이까지 나를 떠나지 않은 식욕 덕분에 다양하고 소소한 먹거리 구경도 나쁘지 않다. 시장에서 점심까지 즐긴 후, 식후 디저트 겸 이쁜각시의 슬기로운 탐구생활을 위하여 카페 도리화과로 향했다.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카페가 휴무 이다. 도리화과는 화과자와 양갱, 꽃차 등이 있는 찻집인데, 한 번 맛보고 음미해 보고 싶었던 이쁜각시는 살짝 아쉬운 표정이고, 나는 심심풀이 사냥에 실패한 포수의 심정이라면 맞을까? 사실 여기서 화과자와 양갱을 맛보았으면, 남은여생 이쁜각시가 새롭게 해석한 화과자를 계속 만들어 주었을 텐데, 내가 실망해야 맞는 거다. 어쨌든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귀포로 다시 넘어오다가 한라산 1100고지 휴게소에서 차 한잔하기로 했다. 여긴 비바람에 상당히 쌀쌀하다. 한라산 정상도 구름에 가려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휴게소 안 분위기도 어째 수선스럽고 그래서 서귀포 자연휴양림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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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라산 1100m 휴게소에서 바라본 정상


운전하면서 이쁜각시와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서귀포 자연휴양림을 지나쳐 버렸다. 이쁜각시에게 “어쩌지? 지나쳤다.”하니까 “그냥 갑시다. 비오는 분위기도 그렇고, 예전에 와 봤던 곳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바로 엉또 폭포로 방향을 잡았다. 엉또 폭포는 제주의 4대 폭포 중 하나지만, 평상시에는 물을 볼 수 없고, 비가 많이 온 뒤에야 폭포를 볼 수 있는 곳이라서 사실 비 올 때를 기다렸다 가려고 아껴두었던 곳이다. 때마침 비도 많이 왔으니 잔뜩 기대하고 엉또 폭포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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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엉또 폭포


엉또는 작은 굴의 입구라는 제주 방언 이라는데, 그 이름의 유래가 바위사이의 자그마한 굴처럼 평상시에는 보일 듯 말 듯 숨어 지내다가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나서야 폭포의 모습을 드러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나는 “엉또 폭포”라는 이정표를 지나칠 때 마다 “엉뚱”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며 궁금해 했는데, “엉뚱한 폭포”라 명명하고 스토리텔링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혼자 씨익 웃었다. 문제는 잔뜩 기대했던 폭포가 사진처럼 물 한 방울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이 정도 비로는 모자란 것인가? 아니면 산 정상 쪽에 집중적으로 비가 와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엉또가 나와 숨바꼭질하면서 여름 장마철에 다시 오라고 밀당 하는 것인가? 뭐 폭포의 위용을 못 보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입구에서부터 폭포까지의 자연 경관이 좋았고 그리고 또 물이 쏟아졌으면 보지 못했을 폭포의 은밀한 속살, 암벽을 못 봤을 거 아니야? 하는 생각에 이르니 “이것 또한 좋구나.”하며 또 하나의 자연을 마음껏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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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월령 포구 부근의 한 해변


이제 제주 보름살기의 마지막 날 마지막 방문지로 선택한 “월령포구”로 향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고(원래 이번 제주살기가 계획 없이 여유롭게 살며 즐기기였으니까..) 올레 14코스를 빼먹었던 것도 있고, 도시의 시장과 숲속을 탐방했으니 비바람 치는 바닷가에서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선택한 곳이다. 월령포구에 도착하니 제주의 여느 포구 못지않게 반갑게 맞아 준다. 다만 올레 14코스를 조금이라도 걸어 보려 했지만, 비바람이 거세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자동차 카페이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서 한적하고, 전망 좋은 곳을 탐색하다가 이름 모를 언덕배기에 자동차를 세우고 잔잔한 음악을 얹었다. 우리 부부 둘만의 공간에 비바람과 클래식 음악, 비에 취한 바다와 검은 바위들의 씨름, 모든 것이 과하지 않고 적당해서 좋았고, 이 모든 것이 이쁜각시와 함께여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제주의 보름을 정리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다.



제주의 보름


이성룡


숲길을 걷는다.

자연의 수채화

흔들리는 나뭇잎이

나를 또 반긴다.


바닷길을 걷는다.

자연의 조각품

비산하는 파도가

나의 교만 일깨운다.


그저 걷는다.

반가움으로 들어가

숙연함으로 나오는

제주의 보름.


- 2019년 4월 23일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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