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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Dec 15. 2024

두 마리의 고양이

  사진강좌에 딸을 수강시키면서, H가 강의실 뒤편의 스튜디오에서 K와 벌이는 행각을 묘사했다. 관능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사용한 단어들도 숨김이 없었고 돌려서 말하지도 않았다. 남녀의 신체를 지칭하는 어휘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를 통해 감각되는 감정을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언어는 그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 철호는 자신이 표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단어의 선택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의 딸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는 방법은 예능 뿐이라고 생각한 H가 입시 브로커인 HK를 통해 사진작가이자 입시전문가로 명성이 나있던 K를 소개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조건이 붙어 있는 소개였다. 합격을 보장하는 대신, 학부모 면접에 통과해야 한다는 것. H가 전 애인에게 실망과 배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딸의 입시를 위해서도 그렇고,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생각한 H가 일단 면접에 응했다. 그래서, H의 딸이 사진 수업을 하고 있는 사이 H는 K와 극적인 정사를 나눈다는 스토리였다.

  밝은 사무실에서부터 밀실까지 이어지는 H의 여정은 새로운 세계로 리드되어 들어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리고 특수하게 최적화된 칠흑같은 밀실을 설정했다. 시각을 완벽하게 제거한 후, 촉각에 전적으로 의존한 섹스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차단된 감각이 만들어 내는 절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혜연이 철호에게 언급하며 보여준 몇개의 장면들과 철호 자신의 경험을 섞어 만든 현실과 상상이 적절히 뒤섞인 장면으로 그렸다. 그래서 시각을 차단한 상태에서 촉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접촉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그것을 극도의 감정과 연결시켰다. 또한 시각을 차단함으로써 상대라는 대상의 무작위성을 은유하기도 했다. 그것은 점차 정사 횟수가 늘어나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이어도 관계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만들었다. 특정하지 않는 무작위성을 통해 H는 난교를 경험하는 듯 했다. 이런 스토리의 구성은 일대일의 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려는 논리가 뒷받침하기 위한 상황에 개연성을 주기 위함이었다.

  H는 딸과 함께 K와 담소했고, 딸을 강의실에 남겨 두고 밀실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가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잔잔하게 어둠이 찾아들었다. 조금씩 조도가 낮아지면서 스튜디오 룸은 완전히 어두워 졌고, 시야에서 사물의형체가 사라졌다. 이대로 잠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싷제로 눈이 감겼고 H는 깊이 잠이 들었다.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진 곳에서, K가 H에게로 스며들어 갔다.

  밀실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청각신호 한 가지 즉 음악, OPETH의 DAMNATION이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는 OPETH의 음악과 어우러졌다. 악마의 음성이 밀실의 바닥에 가득했고, 그 목소리는 두 남녀의 고통에 찬 신음과 몸부림을 지휘했다.

  잔잔하던 악기들이 요동을 치고, 시종 악마와 같은 보컬의 음험한 하울링이 바닥에 깔리는 진공의 메아리같은 프로그레시브. 때론 지극히 평범하고 맑은 목소리가 그들을 제 정신으로, 정상적인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H는차단된 시각 속에 잠겨있던 쾌락을 목격했다. 끝 없이, 멈추지 않을 환락이 있다면 그런 식이었을 거라는 H의 회상을 덧붙였다.  


  "그런게 정말로 있을까 싶어서요."

  "어떤?"

  "그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느낄 수있다는 그 환락이요."


  철호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아, 미안해요, 웃을 타임이 아닌 것 같은데... 그만 웃음이..."

  "괜찮아요, 그래도 전 진지하다는 걸 아셨으면 해요."


  민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호는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민지를 올려다 보았다.


 "더워서요, 외투 좀 벗을게요."


  철호가 올려놓은 보일러의 온도탓인지, 전체적으로 후텁하긴 했다.


  "온도를 좀 낮출까요?"


 철호는 민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 벽에 붙은 보일러 패널로 가서 온도 조절 버튼을 눌러 16으로 내렸다. 다시 둘이 자리에 앉았을 때 민지의 볼이 발가스럼하게 변해 있었고, 철호 역시 얼굴이 얼얼하게 술기운이 올라온 듯이 보였다.


  "죄송해요,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게 아닌데."

  "아닙니다. 독자들에게 이런 애기 듣는 것 좋아해요. 사실은 이런 경험 처음이라, 신선하기도 하고 새롭네요."


  철호의 눈에 민희는 체구가 작지만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여성으로 보였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민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괴로움이 그늘져 있었다.


  "돌리지 않고, 바로 말씀 드릴게요. H의 경험을 저도 해보고 싶어요."


  민지가 철호를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 힘이 들어간 그녀의 눈동자를 철호는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고, 그렇다면 등장인물 모두는 실존인물들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철호는 후회가 밀려왔다. 관계가 복잡해지고, 스스로 이 모든 일들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야기를 쓰는 목적과 합치되는 점이 있는지 순간 앞뒤를 조합해 보았다. 어디에도 자기를 담당하는 플랫폼 직원이 끼어들 틈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아시다시피, 제 이야기가 사실인 건 맞지만, 그 사람들은 민지씨에게 보여드릴 순 없어요. 그리고 그건 아마도 그 사람의 특수한 경험일 겁니다. 일반화 시킬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민지가 잔을 입술에 대고 반쯤 술을 넘겼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 위로 짦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머리카락 속에서 새하얀 솜털이 돋은 귀가 드러났고, 귓바퀴전체가 둥근모양으로 발갛게 변해 있었다.    


  "잠깐 미국에 가 있었던 적이 있어요. 한국에 돌아오기 삼개월 전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한국의 친구들과 느낄 수 없는 세계를 경험했어요. 그런데, 어둠을 벗어나자 믿을 수없는 일이 생겼어요. 제가 아무것도 느낄 수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거죠. 그냥, 잠에서 깬 기분이랄까, 전혀 다른 현실에 눈을 뜬 그런 기분이었어요."  


  철호는 와인잔 옆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잠깐 생각했다. 왜 이 젊은 여자가 자기에게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인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데, 거기엔 필시 그녀만의 무슨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왜 저죠?"

  "예?"


  민지가 반문하자 철호는 천천히 설명하듯 느린 속도로 말했다.


  "그러니까, 왜 저한테 민지씨의 사생활을 털어 놓느냐 하는 겁니다. 야속하게 들리겠지만, 이건 극도의 개인 프라이버시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민지씨가 지금 이야기 하고자하는 내용, 그리고 제가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말 할 수없는 극도로 내밀한 문제가 아닐까요?"

  "그건..."


  민지도 자신의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쉽지 않았어요, 이런 결정. 작가님이 쓰신 H이야기에 등장하는 K가 한 말때문이에요."

  "K가? 어떤 말?"

  "스튜디오 안에 나만 있었다고 생각해?"


  그 말은 K에게 제 삼의 여자가 있다는 걸 H가 알아챘을 때, K가 H에게 한 말이었다. 그래서 H는 K를 단념할 수 있었고, 더 이상 K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철호에게로 온 것이었다. 철호 역시 혜연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철호에게 '보험을 들어놓으라는 말을 남겼던 맥락이, 그제서야 철호는 그녀의 사정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


  "오! 그런 일이!"


  철호는 자신도 모르게 놀람의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혜연이 자신을 떠나야만 했던 전후 사정이 모두 연결되어 그의 머리 속에서 환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상자 속에 고양이가 한 마리만 있었을 거라 속단하지 마셨으면 해요.”


  철호의 안광이 눈 안에서부터 반짝 하고 빛이 나는가 싶은 순간, 보르도 잔의 기둥을 잡고 있는 민지의 손가락 마디 끝에서 반짝거리는 에나멜 페인트가 어떤 다리보다 매끈한 자태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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