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은 우리 플랫폼의 스테디 셀러세요."
MD가 사무실 공간에 온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원래 방문시간은 오후 3시였으나 조금 늦겠다는 문자가 오고 3시간이 지연된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였다.
"스테디요?"
"크진 않지만 고정 수익을 내는 분들을 말해요. 전담 직원을 붙여 관리할 필요가 있는 작가님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제 담당이 MD? 그렇게 불러요? MD님?"
"예, 처음엔 계약담당으로 업무를 맡았는데,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짧은 단발 밑으로 하얀 귓볼이 봉긋하게 드러나 보였다. 붉은 피로 가득찬 속살 위로 귓볼의 둥근 선을 따라 새끼 고양이같은 솜털이 새하얳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철호는 민지라는 이름이 박힌 그녀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궁금한 게 몇가지 있어서요."
"어떤?"
민지는 잠시 고개를 숙여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가져온 와인 전문점에서 구입한 프랑스 와인을 쳐다보았다.
"아, 제가 너무 사무적으로 대하고 있군요."
철호는 민지가 가져온 와인 박스를 들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고 와인따개를 꺼냈다. 상자에서 꺼낸 와인의 레이블을 확인했고, 주둥이에 비해 투박한 바디가 무거운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보틀 디자인이었다.
"보르도 와인이군요."
"작년에 시테 뒤 뱅에서 본 와인이 가게에 있어서 신기해서 사왔어요."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보네요."
"매년 한 번은 가는 편이에요. 생활에 갇혀 사는 기분이 조금은 해소가 되거든요."
민지가 또 한 개의 종이가방을 뒤적거려 속에 있는 포장을 꺼냈다.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하고 빵을 좀 넣어왔어요. 카눌레라고, 오크통에 넣었던 계란 흰자를 섞어 반죽했다고 해요. 그래서 스폰지 케익같은 질감이 부드러운 식감을 주고요. 우유 버터 같은 기타 혼합재 때문에 칼로리가 좀 높아 다이어트 중이라면 안 드시는 게 좋아요."
"이런 안주가 감정을 부드럽게 하기도 하죠."
민희가 자신의 집인 것 처럼 자연스럽게 철호의 옆에 서서 납작하고 길쭉한 꽃무늬로 테두리한 접시를 꺼내 테이블로 들고 갔다. 동글동글한 카눌레를 포장에서 꺼내 보기 좋게 한 줄로 접시 위에 올려 놓았다. 철호가 코르크에 전동 오프너의 바늘을 박아 넣고 펌핑을 하는 사이 민지가 포크를 가져와 접시 위에 올렸다. 반 이상 밀려 올라온 코르크를 손으로 잡아 뺀 철호는 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잔을 가지러 다시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늘, 코르크가 말썽이죠. 그래서 부스러기가 병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전동 오프너를 하나 장만한 게 아주 잘 한 일이었네요."
"어머, 보르도 잔을 가지고 계시네요."
"예, 없는 것 빼고 다 갖추는 성격입니다. 이것 저것 잡다하게..."
"목넘김 전에 혀뿌리까지 와인이 흘러들어가 혀밑바닥을 적실 때의 감각이 짜릿하죠."
"그런가요? 보르도가 바디감이 높아서 강렬한 탄닌의 진한 맛 때문에 온몸으로 텐션을 느낄 수 있어요."
철호가 민지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술잔 속을 휘돌며 붉은 색의 액체가 물결쳤다. 쳐다보는 민지의 눈이 흐려지며 풀어졌다. 살짝 사시인 듯 보이는 그녀의 눈은 어디에 초점화 되어 있는지 모를 거리감 없는 초점을 유지한 채였다.
"와인 좋아하시나 봐요."
"작가님도요."
철호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물을 한잔 따라 민지에게 건네고 자신도 컵에 따라 입 속에 흘려 넣고 입 안을 휑궜다.
"제대로 하시네요."
"그 쪽도..."
민지가 철호를 따라하는 사이 철호가 잔 기둥을 잡고 잔 끝을 코밑에 갖다 댔다. 입안을 헹군 민희 역시 잔 기둥을 세 손가락으로 잡고 잔을 돌렸다.
철호와 민지는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민지가 철호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빛은 흐려 있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둘이서 이렇게 하나가 될 수있는 일체감을 느끼는 일은 많지 않은 거 같아요."
"일테면?"
"작가님이 쓰고 있는 그런 이야기 같은 거요."
"그런 이야기?"
사실 철호는 자신의 작품이 말초를 자극하는 저급한 삼류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불편했다.
"H의 이야기요."
"H?"
"그래요, 그녀가 원했던 것? 그녀가 남자들을 만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
철호는 혜연을 떠올렸다. 자신이 혜연을 통해 본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훑고 지나갔다.
"모자란 것이 하나도 없는 여자가, 딸을 데리고 남자를 만나러 다니잖아요.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도 알고 싶고요."
"흥미와 자극을 위해 좀 과장된 묘사는 있어도, 엄밀히 말하면 모두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입니다."
철호가 한 모금, 민지가 한 모금 붉은 와인을 머금었다. 철호의 입술에 와인이 번졌고, 민지의 입술을 붉은 와인이 촉촉하게 적셨다.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이 있어서요.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아..."
철호는 놀랐다. 자신의 이야기가 남에게 갔을 때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은 늘 철호의 관심사였다. 그 관심이 철호를 계속 쓰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고 철호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소위 말해 독자의 수용에 관한 관심, 그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게시판 같은 기능을 했다. 지금 자신의 글에 계속 올라 오는 댓글들에는 좋은 얘기만 써있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지금은 그게 제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철호는 민지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그녀에 대한 경계가 풀리는 듯했다. 잘 듣기 위한 일종의 상담가적 자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민지가 고개를 꺾어 잔 바닥의 술을 비우자, 철호는 한 손으로 병의 뒤를 잡고 한손으론 병 주둥이를 받쳐들고 민지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이상하게 붉은 색깔이 옅은 와인이었다. 잔에 따르는 양에 따라 핑크빛에 가까운 색이 되기도 했다.
"그 소설 속에 나오는 H의 상황 말이에요. 남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버림받았고, 그래서 그 탈출구가 포토그래퍼 K라고 나오는 상황... 밀실 스튜디오에서 정사장면이 펼쳐지잖아요. 그런 상황을 묘사하신 부분에서 딸은 카운터에서 카메라 강의를 받고 있죠?"
"맞아요. 그런 상황 공간이 2분화된, 그런 설정이 있죠."
다시 민지가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속으로 술이 들어갔고, 그대로 삼키자 민지의 목젖이 울렁거렸다. 그걸 쳐다보며 철호 역시 빠르게 잔의 술을 비우고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창밖 마당에 어둠이 내렸고, 대문 밖으로 멀리 내다 보이는 동네로 내려가는 내리막 언덕 길의 하얀 시멘트 길이 좁다랗게 어둠에 깔린 것이 보였다. 철호는 일어나, 거실 커튼을 쳤다.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혼자 있을 땐 거의 하지 않는 행위였다. 그의 성격이 워낙 내놓고 생활하는 스타일이라 남에게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늘 대문은 열어두었고, 현관의 비번은 입주후 지금까지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철호는 기다리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철호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철호를 친구들은 평화주의자라고 했다. 그 말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음악, 어떤 걸 좋아하세요?"
민지가 한손에 잔을 든 채 철호 쪽을 쳐다봤다. 철호는 오디오 선반에서 아이패드를 가져왔다.
"좋은 세상에 사는가 봅니다. 이렇게도 음악을 들을 수있다는게 믿을 수가 없어요."
철호가 아이패드를 민희쪽으로 내밀었다. 민희가 음악을 선정하는 사이 철호는 진공관 앰프의 전원을 넣었고 전체적으로 거실의 조명을 조절했다. 진공관에서 나오는 푸른 빛이 거실을 따뜻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탁 테이블의 조명을 밝혔다. 사위는 조용했고 어두웠으며, 그들이 앉은 자리는 환하게 밝았다.
"댐네이션이에요, 오페쓰의 일곱번째 스튜디오 레이블이에요."
조용하고 장중한 음악이 공간 안으로 퍼져 나왔다. 기타로 시작한 리듬을 드럼과 키보드가 받았다. 그리고 차분한 보컬이 이어졌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정제된 느낌을 주었다. 중반으로 흐르면서 일렉 솔로가 연주되면서 감정을 고조 시켰다.
"이건 마치 조용한... 외침같은 거예요."
"역설적으로 들리네요."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사람들이 아우성 치는 것 같아요. 비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조용하기 귓속을 파고 드는 것 같아요. 아주 조용한 외침들..."
철호는 자신이 평소 듣던 볼륨에서 반을 깎아 내렸다.
"그리고 그날 그 방에서 들었던 조용한 절규 같았던 소리가 들리는 거죠. Damnation의 전곡을 다 들었어요. 런닝타임 41분 43초였어요."
"한번 각인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죠. 그게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마당의 갈변한 감나무 이파리가 몹시 흔들렸다. 사람들은 산 밑을 지나며 옷깃을 여몄고, 손발의 틈으로 찬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철호는 일어나 보일러의 난방 버튼을 눌렀다. 이것 역시 혼자 있을 땐 거의 난방을 하지 않는 그였지만 손님에 대한 예우였다.
"작가님, 가까운 사람의 정사를 목격하는 건 어떤 감정일까요?"
민지가 고개를 들고 철호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구석에 세워진 은은한 스탠드 조명을 그대로 받은 그녀의 입술은 와인으로 촉촉하게 젖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