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11시 쯤, 민지는 남은 카눌레 1개와 내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철호의 집을 나섰다. 그녀가 비탈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서 철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철호의 집 맞은 편소나무 숲 속에는 새벽부터 하얗게 내린 서리가 해가 뜨면서 녹아 내린 물기로 축축한 텐트가 한 동 자리 잡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세워진 텐트 안에는 스탠드에 고정된 카메라의 망원 렌즈가 오늘 아침 민지가 철호의 집을 나서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기록했다.
험한 인상을 가진 남자는 텐트 뒤편의 출입구 자크를 조금 열어두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기록물들을 플레이 버튼을 눌러가며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스캔한 남자는 민지가 아래 쪽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카메라를 끄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텐트밖으로 나온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카메라가방을 맨 채, 숲을 벗어나기 위해 텐트로부터 걸어나왔다. 숲속에서 오솔길로 걸어나온 남자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텐트로 돌아가 자크를 열고 안에 있던 책 사이에서 노트를 한권 꺼내 빈 페이지를 한 장 찢어냈다. 그리고 집중해서 뭔가를 쓴 후 텐트의 자크를 올리며 종이를 그 사이에 끼워 놓았다.
'건강을 위해 잠시 휴식 중입니다. -주인백'
등산복 차림으로, 산에서 내려온 남자는 오전의 한적한 동네 골목을 지나 차들이 다니는 큰 도로로 나왔다. 도로를 따라 걸어나갔다. 공장 건물들이 몇채 보였고, 대체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왕복 2차선 도로에는 뜸하게 한 두 대의 트럭이달렸고, 찬바람만 빈 도로 위를 스쳐지나갔다. 도로 건너 콘크리트 전봇대가 하나 서 있고 얼키설키 전깃줄이 도로를 따라 어지럽게 연결된 뒤 쪽으로, 남자는 자신이 내려온 얕은 산 쪽을 올려다 보았다. 초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갈색의 마른가지들만이 서로 얽혀있는 겨울산이었다.
지난 밤, 남자는 밤을 새워 철호의 집을 주시했다. 여자가 철호의 집으로 들어갈 때,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어두고, 이내 다시 산을 내려가 차에서 텐트와 가벼운 카메라 가방을 하나 메고 올라왔던 것이다. 그리고 바람을 막는 간이 텐트 속에서 추위를 견뎠다.
10분 정도 도로를 걸어 올라가자, 작은 골목 안으로 세워진 차가 보였다. 남자가 전날 밤 세워둔 차였다. 차에 올라 탄 남자는 카메라가방을 옆자리에 던져 두고, 급히 시동을 걸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한참을 골몰한 후, 차량 핸즈프리를 통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백팀장입니다. 몇 장 사진을 더 확보했습니다. 오후에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자는 저쪽의 대답에 약소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골목을 빠져나온 차량은 천천히 남자가 왔던 방향으로 도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빈 나뭇가지들을 통과하며 솨하는 소리를 냈던 을씨년했던 지난 밤을 떠올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남자의 왼손은 핸들을 꼭 붙들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남자는 천천히 도로 끝을 향해 미끌어져 나갔다. 봉산 자락을 벗어난 남자의 차는 어느새 수색을 벗어나 경의선철도를 따라 북가좌동 주택가 쪽으로 접어들었다.
전철에 몸을 맡긴 민지는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연차를 낸 상태였다. 회사라고 해봤자, 회의실 하나와 기획 총괄 팀, 홍보 관리 팀, 기술팀의 사무실로 나뉘어져 있었고, 민지 자신은 기획 총괄팀 일원으로 사업유지보수나 경영관리 쪽의 일을 보고 있었다. 사무공간 브라켓 위에 명패가 걸려있고 거기에 팀장 민지라고 써 있었다. 지금은 경영 총괄 팀장 밑에서 팀장이라는 불분명한 호칭으로 불렸다. 그녀는 경영 기획 팀의 팀장급으로 초빙되어 온 상태였다. 차후 회사의 사세가 확장될 걸 대비해서 경영총괄을 독립시킨다는 계획 아래 자신을 뽑았다는 말을 대표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대표는 상장까지 갈 수 있도록 호재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 아래 기반을 다지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회사 스타트 업에 관여해서 매출을 조장하고, 이미지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작가를 초빙할 것인가, 신진 작가 관리에 무게를 더할 것인가, 주저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지가 신진 작가에 무게를 두자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했을 때 기존의 기득권출판과는 다른 스타트업으로서의 자리를 단단히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블루 오션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선점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거였다.
그녀 스스로도 이 플랫폼 회사에 입사한 이유 역시 전망 때문이었다. 2000년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스타트업으로 웹툰과 웹소설 플랫폼이 뜨고 있었다. 만화와 소설을 포함해서 종이 출판시장의 주도권이 디지털로 넘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장 초기에 자리잡는 과정을 이제 막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색다른 폭로성 소설이 떴다는 운영팀으로부터 새나온 말이, 업무 메신저도 돌았다. 시점이 불명확하고, 하나의 사건을 다시점으로 혼성모방한 테크닉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운영팀 자체의 내부평이었다. 첫장부터 단숨에 읽어내려간 민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운영팀의 일독 권유 평은 일종의 포르노 단체 공유와도 같은 행위라는 거였다. 플랫폼에는 낯뜨거운 내용으로 가득찬 소설들이 난무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내용들을 읽기에는 적절치 못했고, 그건 마치 포르노 영상을 글로 읽는 것과 같은 민망한 수준이었다. 성행위의 묘사가 19금의 수준을 뛰어넘었고 그 내용도 사실 묘사 이상의 수위를 보인다는 운영팀장의 언급은 공개적으로 포르노를 보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자직원들끼리, 서로들 킬킬대며 작품의 품평에 은근했고, 반쯤 되는 여직원들은 메시지와 오가는 대화 속에 언급된 소설들을 읽어 대기에 바빴다. 트렌드를 알고, 흐름에 편승한 댓글을 달자는 대표의 홍보방식을 따른 결과였다. 자극적인 댓글과 은근한 댓글, 개인정보를 흘리는 댓글들을 대표는선호했다. 그러면서도 웹소설계의 선두자리를 지키자고 대표는 강변했다.
"댓글 문학상도 하나 만들자!"
대표가 걸어놓은 캐치 프레이즈였다. 그만큼 작가가 쓴 글 아래 댓글을 달아 홍보하고 거기에 독자들을 현혹하게 만드는 기술을 적용하자는 얄팍한 경영 마인드였다.
민지는 34회에 걸친 '별사탕'의 글을 완주하며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damnation과 어두운 방,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들, 거기에 몰입된 남녀의 뒤엉킴은 가슴 한복판을 지지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뜬금없이 그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생활은 멈추었고, 머릿속은 텅 비었다.
"민지야, 왜?"
세찬이 아래로 내려가며 민지를 끌어 올렸다. 민지는 세찬을 안고 그의 몸위에서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위로 올라간 민지가 모든 움직임을 멈춘 순간, 그세찬이 민지를 올려다 보았다. 그렇게 민지는 세찬 위에서 멈춰섰다. 세찬으로부터 떨어져 내려온 민지는 한참을 숨을 몰아 쉬어야 했다. 가슴 한 복판을 불화살로 맞은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며칠 후, 다시 그런 일이 거듭되자 전조증상 비슷한 것이 오기 시작했다. 뒷머리 쪽이 현기증 일듯 어지러웠지만, 그게 일반적인 어지럼증과는 다른 종류였다. 이상하고 기분 나쁜 머릿속 증상이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머릿속 현상이었다. 현기증이 끝날 즈음 과호흡이 밀려왔다. 최근, 발생 간격이 짧아지기까지 했다.
그걸 세찬은 민지가 익사이팅된 상태로 인지했고 그 순간 세찬의 움직임은 더 격하게 변해갔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민지에게는 고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별사탕의 소설 '폴리아모리 와이프'에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데 너무 놀라웠다. 그래서 회사의 오픈된 자신의 자리에서 한 번에 내려 읽어버린 것이다. 부부의 외도 편력을 기본 소재로 하여 각자의 파트너와 벌이는 상황별 섹스행각이 너무 사실적이라는데 일단 충격이었다. 민지는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나타난 부분에 빠져들었다.
아내 J가 안방에서 벌이는 외도 현장을 잠시 집에 들른 남편 C가 목격하면서 시작되는 스토리였다. 민지의 경험과 데자뷰되는 장면은 C의 내연녀 H가 언급하는 그녀의 남자들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 음악이 흐르고, 밀실과도 같은 방이 설정되어 있고, 타인들에게 노출된 공간과 밀실이 혼재하는 상황 속에 벌어지는 행위가 묘사되고 있는 부분이었다. 딸을 데리고 간 수강 장소에서 엄마 H가 그 선생 K와 밀회를 하는 장면, 철호에게는 자신의 경험과 다른 상황으로 바꿔 말했다. 소설의 상황과 민지의 경험이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자신의 상황과 흡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민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고, 그 문제는 고 3때 겪었던 그 장면들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트라우마라는 정신적 장애가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별사탕 '김철호'라는 작가는 모든 걸 알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가 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더더욱 놀라운 충격을 민지에게 안겨주는 일이었다. 민지는 자신이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라는 걸 철호가 알 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H에게 위안을 주었고 그녀의 우울을 씻어준 C에 대한 기대만은 지울 수 없었다. C가 H의 삶을 되돌려 놓았듯이 민지 자신도 C에게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C가 김철호라면, 그녀는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민지를 보낸 철호는 쳐놓았던 커튼을 다시 활짝 열어 젖혔다. 동향의 거실로 차가운 겨울 햇살이 한꺼번에 들어찼다. 그리고 햇살에 눈부신 얼굴로 그녀의 딋모습을 멀리 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 보았다. 잠시후 산비탈에서 등산객 한 명이 오솔길로 내려와 철호의 집 쪽을 힐끗 쳐다 보곤 민지가 내려간 길을 따라 사라졌다. 봉산은 간간이 등산객들이 찾아 들었다. 얕은 동네 산을 둘레길 걷듯 한바퀴 돌고 내려오면 그래도 몸이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철호도 가끔 올라가 보는 산이었다.
식탁에 앉아 민지가 먹고간 흔적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가 가져온 와인은 빈병인 채로 남았고, 카눌레를 올려두었던 접시도 빈 채로였다. 포크와 입술 흔적이 남은 보르도 와인잔, 물잔들 이런 기물들이 테이블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제만 해도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가지런했고, 그것이 제자리인양 완전했던 테이블위의 상황이었다. 안주과 술, 물병과 빈잔들이 만들어내는 정물화는 채움과 비움의 차이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듯했다. 하나는 가지런한 세계였고, 하나는 어지러운 세계였다. 어제의 가지런한 세계가 오늘 아침에는 어지러운 세계로 변해 있었다. 지금은 채움에서 비움으로 바뀐 세계에 철호가 앉아 있었다. 민지로 채워졌던 공간이 그녀가 빠져나가 비움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인 듯했다.
철호는 그대로 앉아 졸린 눈을 붙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번쩍 눈을 뜬 철호가 노트북을 숄더 가방에 넣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들고 거실 한 복판에 우뚝 섰다. 그는 핸드폰을 켜고 민지라고 쓴 이름을 눌러 몇자 적었다.
"지금 운주사에 갈 건데, 같이 갈래요?"
문자를 받은 민지는 회사 총괄 팀장에게 전화를 넣어 자기개발 휴가를 요청했다. 동시에 재택신청을 더하여 일주일간 출근을 보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뭘 딱히 바란 건 없지만, 문자에 응답하는 민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민지는 자기 눈으로 보았다.
"수색역 앞에 서 있을게요."
민지는 타고가던 전철을 반대편으로 갈아타고 다시 수색역으로 돌아 왔다. 북쪽에서부터 경의선 철길을 따라 기차가 역사를 향해 들어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차가운 공기를 실어오는 기차는 민지로 하여금 버버리 옷깃을 세우고 핸드백의 어깨끈을 바짝 당겨 매게 했다. 그리고 한쪽 힐의 뒷굽을 세우고 서서, 역사 출입 유리문 안쪽에서 을씨년스러운 가로수들이 늘어선 바깥을 내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