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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버스데이

by 별사탕

탐정 사무소 소장에게 일을 맡긴 후 일주일에 한번 미팅을 할만큼 요즘 들어 그와의 만남이 빈번해졌다. 그가 요청해서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 다급해진 측면이 있었다. 그동안 회사 상장문제로 6개월여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그간 눈엣가시처럼 박혔던 가시 몇 개가 아리고 쓰린 정도가 상상 이상으로 성가셨다.

아내가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계속 만나고 있다는 감이 오기 시작한 것이 벌써 4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 픽업문제로 정기적인 일정처럼 일정을 소화하던 아내였다. 처음엔 목요일, 그다음엔 목요일과 금요일 연속,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 어느 하루를 할애했다. 어떤 주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지 않고 아내는 딸을 과외선생에게로 실어 날랐다. 입시가 점점 다가올수록 시기적으로 해야 할 공부가 더 많아진 거라 생각했다. 입시란 것이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부모도 함께 치르는 힘든 난관이라고 이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지켜보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 뿐이었다.

좀처럼 울리지 않는 집전화가 몇 번 걸려 왔다. 그리고 전화기 저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저 연결된 전화기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인터넷 전화기에 발신번호가 떴고 단지 장난이거나 통화불량 정도로 여겼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진학을 했고, 가족 모두가 축하했고 그렇게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그 일은 잊혔다.

그랬던 일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이유도 있겠지만, 바빴던 일과들로부터 한시름 놓고 난 후 찾아오는 휴식과도 같은 시간 속에 놓이면서 빈 곳을 채워야만 하는 습벽 같은 것이었다. 늘 움직이던 관성을 인간은 거부하지 못한다. 이건 엄연한 물리의 법칙이니까.

전화기의 통화목록을 찾아보았다. 버튼을 눌러가며 통화목록을 확인하면서, 이 전화기로는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단 세 건의 발신자 번호가 모두 같은 번호였다. 그 화면을 사진 찍어두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강남의 사채업, 그들 말로는 금융업을 하는 박사장이 떠올랐다. 영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들의 명함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지고 있게 된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은 제2금융권을 포함해서 이들 제3금융까지 합쳐 지금 바로 끌어올 수 있는 금액으로 30억은 거뜬히 자신했다. 회사를 이만큼 키운 것도 별 볼 일 없는 중고 기계 수입상에서 시작해서 전국 AS망을 구축한 건 우리 회사 밖에 없다. 결국 중고기계에 대한 신뢰가 AS로 나타난 거였고, 대기업의 후불 계약도 밀려들었다. 대학 선배를 바지로 앉혀놓고, 실제로는 내가 이 회사를 세우고 성장시켰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었다.

박사장을 통해 소개받은 탐정이었다.


"이런 일은 더 팔수록 가급적 얼굴을 안 보는 게 서로 좋습니다."


흥신소라는 이름을 떼고, 이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박흥선이라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전직 경찰은 아니고, 관련 경찰을 잘 알고 있어 사람 찾는 일에 전문인 업무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핸드폰으로 찍은 전화번호를 전달했다. 바로 연락이 왔다.


"서울에 H대학이라고 거기 교수랍니다. 문학 이론을 가르치나 봐요. 이름이 김철호라고 하는군요."


단순 명쾌한 이름이었다. 그가 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없었다. 한 번은 내가 받았고, 한 번은 딸이 받았다. 그렇게 딱 두 번, 그가 전화를 걸었다. 그건, 거기까지 됐고, 이제 그렇게 자주 나가던 아이 픽업도 끝난 상태에서 계속 목요일과 주말에 나가는 일정은 뭔지 궁금했다.


"당신 여자들 이름이 더 이상 내 입에서 안 나오도록 해."


아내가 내 얼굴 위에 명함들을 뿌렸다. 그 속엔 회사 경리과 미스리의 메모도 섞여 있었다. 일하면서 생기는 기회는 다 잡고 본다고 마음먹었던, 뿌린 대로 거둔 결과였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담백하게 미안하다고 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 후 아내는 골방에 틀어박혔다. 그때가 벌써 4년 전이었다.

1년 남짓 우울증과 소화불량에 거식증을 겪은 아내는 조금씩 회복했고, 다시 바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의 옆에는 동네 친구로 만났다는 희경이라는 여자가 붙어 있었다. 집에도 놀러 오고 같이 밥도 먹으면서 얼굴색이 좋아졌고, 표정도 밝아진 아내였다. 그녀를 만나면서 좋아졌다고 생각하니 내겐 그지없이 고마운 여자였다.


"같이 만나는 분들 프로필입니다."


박흥선이 가져온 파일에 희경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성남에서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학교에도 출강하고 있다는 이력이 세세히 적혀있었다. 물론 김철호의 파일도 함께 들어 있었다.


"성희경 씨와는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김철호교수와는 백화점 문화센터 인문강좌에서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매주 목요일이었다. 납득이 됐다. 그런데도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둘이 지난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라면 중국출장 때문에 내가 집에 없었던 주였다.


"얼마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입니다."


내가 아내의 동정을 살피는 것은 부정을 잡아 그걸로 뭘 어쩌자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나중에 할 말이 있어야겠기에 아내의 뒤를 캐고, 그걸 빌미로 내 생활이 자유롭고 싶은 상호 안전을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4년 전, 내 머릿속에 각인된 김철호였다. 그러나 그 사이 김철호는 아내에게 정리당한 듯보였다.


"아무래도, 사모님이 새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박흥선이 다시 연락을 해온 건 김철호와의 밀회가 1년가량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의뢰하지도 않았던 일을 박흥선이 들고 왔다. 그런 그를 다시 룸으로 불러 술을 먹이고, 여자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당좌로 500을 끊어 봉투에 넣었다.


"이번엔 누구던가?"

"그게, 그, 성희경이라는 센터운영하던 여자분 있었죠? 그분을 통해 소개를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명색이 심리상담센터 소장이라는 여자가?"

"그 성남에 있다는 센터가 본업 부업이 다른 것 같습니다."

"본업? 부업?"

"상담을 하긴 하는데, 그건 극히 미미한 활동인 것 같고, 진짜는 남자를 공급하는..."

"뭐? 남자를 여자들에게 공급한다고? 무슨 호스트 같은 건가?"

"정확히 정체를 파악해 보면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성희경이라는 여자가 아내에게 남자를 제공한다고? 묘한 일이었다. 여자를 제공하는 매춘은 흔한 일이었지만 남자를 제공한다는 건 뜬금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아내가 엮여 있다는 사실은 더 놀라웠다.

아내는 이미 내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밖에서 하는 행위들 역시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죄책감은 들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그로 인해 고통스럽다거나,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 사이에 있는 건, 가정이었다. 그 가정엔 우리 둘 부부와 아이들 둘이 존재했다. 그들이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가정이 될 수 없었다. 나는 그걸 유지해야 할 사명이 있는 가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만 했다. 그러고 싶었다.

성희경이 여자들을 상대로 남자를 공급하는 중개인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이렇게 잘 살고 있고, 우리의 가정은 문제없이 잘 유지되고 있으니까.


"일단 성희경은 킵해 두시고, 새로운 남자든 뭐든 깊게는 하지 마시고 그저 프로필 정도? 개략적인 신상파악만으로도 좋습니다. 아직까지 크게 문제될 게 없으니까..."


그렇게 접어두었던 일이었다. 문제는, 아내방에 들어가 읽은 글이 문제였다. 아내는 늘 노트북을 켜 놓은 채 다녔고, 그 방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일요일 아침잠에서 깬 나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에 30초면 충분했다. 인기척이 없는 정밀한 공간감이 나를 둘러쌌다. 거실에서 화장실로 각방의 문을 열어보면서 돌아다니는 데 딱 30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 듯했다. 곧장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 화면을 들어 올렸다. 거기엔 30회 가량 연재되고 있는 웹소설이 떠 있었고, 아내는 매번 댓글을 다는 구독자였다.

처음엔 심심해서 조금씩 읽었던 게, 남도여행과 재실 중 전화 장면에서 정신이 번쩍 들만큼 현실감이 들었다. 스토리의 이니셜로 나오는 H는 다른 아닌 아내 혜연의 이니셜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꾸준히 혜연은 댓글을 남기고 있었다.

별사탕의 '아내의 사랑', 1화부터 정신을 다잡고 읽어나갔다. 그의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의 이름이 '김철호'라는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길래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기재하며 자신의 아내와의 일, 아내의 불륜 행각에 얽힌 남자들의 이야기, 거기에 자신의 여자들까지 낱낱히 밝히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한편으론 묘한 수긍에 고개를 끄덕이게도 만들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도 따지고 보면, 김철호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내와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심장의 피가 빨리 돌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목을 지긋이 누르며 차근차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문화센터에서 H를 만나, 여관 프린스에서 첫 관계를 한 사이, 그리고 남도여행을 통해 회복되는 몸과 마음, 그리고 목요일마다 사무실에서 반복되는 섹스, H의 각성과 엑스타시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는 이 소설은, 없는 사실을 꾸며댄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는 이야기였다. 전부 사실이었다. 그건 내 스케줄에서도 확인할 수있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출장과 업무,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들은 어김없이 김철호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완벽한 이중생활 같은 것이었다.

김철호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도 의심이 확신으로 분명해졌다. 이 이야기속에 언급되고 있는 H의 히스토리에 등장하는 K선생, 혜연이 점점 횟수가 늘어가던 과외선생 픽업 시기와 과정이 일치했다. 그리고 혜연이 그렇게 된 이유도 나의 여자편력 때문이란 것도, 너무도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힌트는 H의 남편에 대한 언급 중 그의 직업을 말한 부분이었다. 정확히 일치했다. 중고기계 수입상!


'이 새끼는 도대체 이걸 왜 여기다 쓰고 있는 거지?'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한 모멸감이 밀려왔다. 박흥선에게 연락했다. 김철호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달라고 요구했다.


"커튼을 치고 있어 얼굴은 식별 불가하지만, 새 여자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학교는 휴직상태로 1년이 넘어가고 있고, 그 후 수색 봉산이라고 동네 작은 야산 밑에 개인 주택 겸 사무실을 하나 얻어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이혼하고 혼자 지낸 지 3년이 되어간다고 하더군요. 기러기로 미국에 건너간 마누라가 거기서 가정을 꾸렸나 봅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셈이죠."


차분하게 정황을 묘사하던 박흥선이 카메라의 엘시디 창을 넘겼다. 시골집 마당을 끼고 전면이 유리로 된 거실의 안쪽 커튼이 살짝 열린 사이로 젊은 여자가 보였다. 브라만 입은 여자가 희미하게 찍혀있는 사진이었다.


"이건 뒷모습들인데 뭐 보나 마나 신원파악이 안 되는 사진들이고요, 나머진 야간촬영이라 화소가 좋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와 만나는진 중요하지 않아요. 일정을 체크해 주세요, 몇 시에 일어나고 어디로 나가서 누구와 만나서 무슨 일을 하는지, 집에는 몇 시에 들어오는지, 가급적 반복되는 일과를 중심으로 체크해 주세요."


그 이후, 박흥선은 김철호가 다시 남도 여행을 갔다고 알려왔고, 그 젊은 여자와 동행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박흥선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면서 별사탕, 아니 김철호가 쓰고 있는 소설을 회차 빠짐없이 읽어 나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댓글을 적어나갔다.


'주작 냄새가..., 거짓말, 이런 여자가 실존함?,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또 거짓말...'


이런 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김철호에 대한 대응은 시종일관 거짓말이라고 외쳐대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반응을 살폈고,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글을 통해 더 정확한 사실을 쓸 것이라고 믿었다. 거짓말이라는 댓글에 대해 최대한 사실을 쓰고자 하는 감정을 솟구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오늘 아침 박흥선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 마포 사무실로 막 출근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출근 인사를 하고 1층 카페로 내려와 박흥선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 이런저런 방문객들을 만나고, 영업팀 실적을 체크하고 아침회의를 소집해서 늘 반복되는 일과를 소화했다. 오후에 구리 쪽 공장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새로 설치한 라인은 정상 작동하는지 애로사항, 기계 결함은 없는지 체크하러 가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부사장이 체크하는 것과 과장 대리 급이 체크하는 건 신뢰가 달랐다. 그렇게 초기 대여 공장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간부 중심으로 관리해서 매출 유지를 해야 하는 게 사업지표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사이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딸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응, 민지야..."

"아빠, 나 아침에 갑자기 출장 오게 됐어, 한 일주일 걸릴 거 같아."


나는 딸의 안부를 묻고 객지에서도 몸조심하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딸의 목소리 너머로 바닷바람 소리가 쏴하고 들렸다. 멈춤 없이 계속 불어오는 바람 앞에 민지가 서있는 것 같았다. 빨리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훈훈한 바람이 부는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무실은 불이 꺼져있었고, 직원들은 모두 공석 중이었다.


"이거 왜 이래? 아무도 없어? 벌써 퇴근할 시간은 안 됐는데?"


나는 사무실 안쪽 중앙 통로로 걸어 들어가며 시계를 봤다. 8시 15분, 7시면 다 퇴근하라고 직원들에게 엄포를 놓고 있지만, 이 시간에 이렇게 아무도 없었던 적은 없었다. 불을 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반대편 벽 쪽의 전등 스위치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스위치에 손을 올리는 순간, 안쪽 사무실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플래시 터지듯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한 떼의 직원들이 몰려나왔다. 그들 중앙에는 하얀 케이크를 받쳐든 김 과장의 얼굴이 보였고, 가느다란 형형색색의 초들이 한데 모여 따뜻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부사장님, 생신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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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