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나는 의심하고 있다. 둘째를 가지고 열 달을 두근거리는 근심 속에 보냈다. 애가 세상에 나온 순간 아기를 거꾸로 들고 서있는 의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상있는 덴 없죠?"
"건강합니다. 똥구멍도 다 제자리에 뚫렸고요."
아들을 낳았다고 시댁 식구들의 얼굴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철호는 주름 덩어리의 아들을 옆에 끼고 미소 지으며 잠들었다. 병원에서 퇴원해 돌아온 날부터 시댁식구들의 요람 방문은 그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삼칠일 금기도 없는 듯했다. 내가 나서서 문지방에 금줄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둘째는 축복 속에 태어났고, 키울 때도 정성을 들였다.
비번이었던 어느 여름의 정오였다. 상기가 대문 앞에 서 있었던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앞집과 마주 보는 대문의 중간에 그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땀에 젖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감추고 친숙한 표정과 몸동작으로 자연스럽게 그를 맞아들였다. 큰 애가 다섯 살, 둘째가 세 살 되던 해였다.
"어떻게 여길 왔어?"
나는 문을 닫자마자 그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했다. 큰 애가 문 앞으로 뛰어나와 내 손을 잡았다.
"응, 엄마 학교 후배 아저씨야."
"후배가 뭔데?"
"엄마 나온 학교를 이 아저씨도 같이 나왔다는 거..."
큰 애를 따라 방에 있던 둘째가 게걸음을 하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나는 빠르게 티브이를 켜고 애니메이션 채널을 플레이한 후, 티브이 앞에 아이들을 앉혔다. 그리고 상기를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까 티브이 보고 있어. 아저씨 금방 가실 거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야 돼."
여름이었다. 전기를 아낀다고 거실에 켜놓은 선풍기의 날개가 바람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소리를 냈다. 서재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우두커니 서있는 상기의 등 뒤에 대고 낮게 말했다.
"뭐, 시원한 거 줄까?"
"얼음물..."
그가 여름 내내 얼음물을 마신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아는 사람은 다들 알고 있는 캠퍼스 내, 이름난 커플로 2년을 같이 지냈다. 상기를 끊어 낸 것이 철호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철호를 데리고 동창 모임에도 나갔고 동아리 모임에도 함께 나가면서 철호의 존재를 공개했다.
선후배 동아리 모임에서 어느 중국집 홀의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떨군 상기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 정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을 했었다. 중간중간 여자 애들끼리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울 때 상기가 끼어 있었다. 한 대 더 피고 들어간다는 나를 남겨놓고 여자애들이 모두 중국집으로 들어가고 쓸쓸한 표정의 상기가 홀로 남았던 밤, 차량들의 어지러운 헤드라이트 불빛이 도로를 질주했고, 건너편 몽블랑 제과점의 네온이 따뜻하게 깜박거렸다. 나와 상기 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이 불빛들 사이에서 나와서 또 다른 불빛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늘이 꼭, 마지막 날 같아."
"그런 말 싫어. 마지막이란 말..."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 중국집 옆으로 난 샛골목으로 몸을 숨기듯 들어갔고, 상기가 따라 들어오며 골목의 입구를 지키듯 다리를 벌리고 섰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벽과 바닥엔 에어컨 송풍기의 팬이 바람을 뽑아내는 소리가 위윙거렸다.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상기의 입에서 훅 하고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도로의 불빛을 등지고 선 상기를 바라보는 나는 역광 상태인 그의 얼굴 주변으로 하얀 연기가 천지창조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퍼져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결혼한다는 말 믿기지 않아."
"내가 빨리 사회생활을 해야 돼서..."
"늘 씩씩하게 잘 해왔었잖아."
"함께 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해."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됐어?"
"미안해 상기야, 돌이킬 수가 없게 됐어. 나 임신했어"
상기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맞은편 벽을 쳐다보며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누나, 정말 시간이 없다.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가 담배를 땅에 던졌고, 나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을 때, 상기가 내 앞을 질러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골목 끝에 보이는 검게 선팅 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얼키설키 얽힌 전깃줄과 도시가스배관 가스통들이 늘어선 골목 안의 풍경이었다. 유리문 앞에 선 나는 천천히 유리문 앞에까지 걸어가서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며 건물 사이로 내려온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답답하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흐르는 흐리고 우울한 날씨였다.
오늘이 그런 날씨였다. 하루종일 창밖은 흐렸고, 곧 여름비가 시작될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우리, 얼마만이지?"
"5년?"
"그 정도 된 거 같아."
창문을 열까, 서재 에어컨을 켤까 망설이다가 책상 위에 올려진 에어컨 리모컨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방문을 닫고, 에어컨 전원 버튼을 눌렀다. 커버가 열리고 바람이 나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 다음 달에 미국가, 지사 발령이 났어."
"들었어."
"마지막으로 누나 얼굴 보려고."
"그런 말 싫다고 했지?"
상기는 한국에 지사를 내주지 않는다는 브랜드의 자동차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몇 다리를 건너 나는 그의 소식을 끊지 않고 듣고 있었다. 지난 시간이 5년이라고 해도 우린 금방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계속 이어져 오던 관계로 착각을 할 정도로 서로의 소식에 대해 친숙했다. 그런 느낌을 서로에게 받으면서 우린 마주 앉아 있었다.
"이제 과장 달았어."
"응 알고 있어. 늦었지만 축하해."
"누나가 모르는 일을 내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는 것마다 누나가 다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어."
물컵을 내려놓는 상기의 입술을 타고 차가운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 내였다. 책상 위에 얼음물을 담은 컵이 탁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위로 올라왔다. 나는 책상 위를 더듬어 컵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손가락은 떨렸고, 그의 입술은 열렸다.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났다. 낮 시간, 그는 내가 사는 인천으로 출장을 나오면서, 이른 시간에 내 집에 들렀다. 결혼 전 그와 생리 주기를 체크하듯 나의 데이오프인 날을 체크했다. 결혼하기 전보다 더 깊이 서로에게 빠져들어갔다.
"매일 출장 와도 되는 거야?"
"그런 누난 매일 이렇게 쉬어도 돼?"
"나야, 주당 근무가 돌아가니까, 일 있다고 누구랑 돌아가며 바꾸면 오히려 그쪽에서 더 좋아할 수 있지."
"남들 안 가려는 인천 공단, 내가 대신 가 준다니까 다들 술 산다고 난리던데?"
우린 깔깔대며 다시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벌써 한 달이 되어 가고 있었는지 몰랐다. 어느 날 상기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가방을 열고 한 장 짜리 종이를 들고 왔다.
"계약서야."
"무슨?"
"우리 둘 동거 계약서."
"동거?"
"응, 결혼은 누나가 다른 사람하고 했지만, 이제 내가 누날 놔줄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누나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싶어."
"아쭈, 내가 무슨 물건이야, 소유하게? 건방지다. 누나한테!"
상기가 담배를 피워 물고 천장을 향해 누워 종이를 읽었다.
"여기 우리 신상정보를 썼고, 생년월일 맞지? 여기 우리가 지켜야 할 동거 조건들이 있어."
나는 그가 애들 장난 같은 문서를 한 장 써가지고 날 가지고 노는 일에 재미가 들렸나 하는 생각으로 그의 옆에 누워 흥미롭게 종이를 올려다보았다.
"계약 1번, 쌍방이 원할 때만 섹스한다."
"뭐? 이런 외설스런 내용이 1번이야?"
"잘 들어봐, 우린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고 각자 지켜야 할 것, 예를 들어 누난 가정이 있고, 난 직장이 있고 이런 거 있지? 그걸 지키려면 먼저 안전해야 하니까 이런 게 필요한 거고, 또 섹스란 게 일방이 요구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건 폭행이야, 성폭행. 안 그래? 반드시 둘의 욕구가 일치해야 한다는 ‘그 때’를 존중하고 받아들인다, 둘이 입을 맞추어야하니 약속이지."
"입을 맞춘다고?"
나는 그의 말이 온통 장난같다는 색각에 킥킥대며 웃었다. 한편으론 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뉘었다.
"그래서 넌 내 생리날을 꿰차고 있니?"
"그건 존중의 기본이지, 둘이 만나도 섹스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자 하는 말이야. 괜한 일로 서로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무슨 오해?"
"일테면, 내가 싫어졌나? 다른 사람이 생겼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서로를 쳐다볼 수도 있으니까."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다?"
"누나에 대한 내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 누난 궁금하지 않아? 안 불안해?"
"그래서 내가 먼저 널 끊어준 걸거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담백해 질 거 같거든."
"그런 걸 꼭 말로 해야돼? 오늘 섹스할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좀 웃기긴 하다 그치?"
"웃기다 뿐이야? 민망하기까지 하구만. 섹스 걸신도 아니고."
"섹스걸신? 그거 무슨 신생 걸그룹이야?"
"그럼 누가 먼저 동의라고 문자하면, 상대방도 동의라고 답신오는 순간부터 가능한 날이라고 알자."
"만날 수 있는 날이란 말이지?"
"그렇지!"
"근데 너, 생각해봐. 지금까지 나 만나서 안 한 적 있어?"
"그건 누나가 더 원했던 것 같은데?"
상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내가 늘 살인 미소라고 말하던 그 평화롭고 따뜻한 소년의 미소였다.
"이걸 완전한 동의 조건이라고 부르자."
완전한 동의, 그것은 우리들의 동거 계약 1번이었다.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밝은 벌판 같은 공항 주차장이었다. 아직도 차가운 공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한국의 날씨였다. 상기의 SUV 트렁크에 등을 기댄 채 엉덩이 안으로 들어온 손아귀의 힘을 느끼며 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동거 계약 조건 1번, 완전한 동의. 아직도 유효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