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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제안

by 별사탕

새벽부터 서두른 발인제가 어디 구석에서 자고 있는 식구들을 불러 모으느라 지체되었고, 상조회사의 젯상 차리는 의식에서부터 언니가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전날 입관식에서 보았던 고인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얼굴이라며 가족들이 돌아가며 엄마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쓸어안고 고개를 떨구었다. 영정사진을 안고 나가는 큰조카를 오빠와 언니 내외 그 중간중간에 조카들이 끼어 뒤를 따라나갔다. 철호가 내 옆에 서서 묵묵히 들려나가는 관을 바라보았다.

관을 실은 검은색 리무진의 앞자리에 영정사진을 안은 큰조카가 앉았고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내가 끼어 앉았다. 차는 천천히 굴러갔고, 차 안에 앉은 누구도 미동 없이 조용했다.

부평가족공원은 큰 산 줄기를 깎아 계단식으로 묘원을 조성한 사방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화장장은 묘지의 가장 안쪽에 자리했고, 돌아서 나오면서 매장지와 납골당이 산과 평지로 나누어 조성된 곳이었다.


"여기가 가장 가까웠다. 연고는 정혜네가 사는 곳이었고..."


오빠가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연세가 있으셔서, 그냥 노환이었어. 그렇게 가실 줄 어떻게 알았냐?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딱 맞아."

"전날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랑 얘기하고 피곤하다며 잔다고 들어가신 거야."


시골서 올라온 엄마는 초저녁부터 서연이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고 했다. 그리고 서연이가 새벽에 울면서 자기 엄마를 불렀다. 할머니가 흔들어도 안 일어난다고, 그렇게 돌아가신 엄마였다.


"큰 병 없이 편안히 가신 거야."


검은 창유리로 빗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오전 내내 흐린 하늘에서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엄마가 들어간 용광로 번호가 전광판에 뜨고, 식구들이 모두 그쪽으로 달려가서 엄마의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창밖에서 지켜보았다. 언니가 울었고, 나도 울었다. 형부가 언니의 어깨를 감쌌고, 누군가 내 어깨를 감쌌다. 철호였다. 그의 품에 안겨 나는 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의 유골이 납골당 안에 안치되고, 엄마의 사진이 그 속에 들어갔다.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좁은 납골당의 통로에 서서 가족들은 눈물을 훔쳤고, 나는 유골이 든 유리창을 두손으로 짚고 울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고생만 하시다가 갔네. 맛난 거 한번 제대로 못 먹어보고 그냥 갔네. 편한 자리 한번 제대로 못 누워보고 아주 그대로 누워버렸네."


언니의 사설 섞인 울음에 어른들이 목놓아 울었고 아이들이 낮은 숨을 삼키며 울었다.


문상객들은 영구차로 개인차로 작별을 하고 헤어졌다. 오빠네 집으로 모실 여유가 되지 않아 식당을 예약했다고 했다. 가족공원 앞에 한식불고기집이었다. 넓은 홀에 자리한 사람들이 30명은 되어 보였다. 시골에서 온 친척들이 대부분이었고, 주무셔야 할 연로한 분들도 계셨지만, 각자 바쁘다며 오늘 차로 내려가려고 기차표를 끊어두었다고 답을 했다.

철호가 한 테이블 건너 대각선 쪽에 앉은 것이 보였다. 형부와 이모들에 섞여 있었다. 우리가 이혼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형부뿐인지, 그들은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거리낌 없이 평소처럼 대화하는 듯 보였다.


"뭐라? 그런 일이 있었나?"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내쪽으로 넘어왔다. 막내이모였다. 오빠와는 다섯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고, 나와 오빠가 5살 차이가 났으니 막내이모와 나는 십 년 터울이 졌다. 그만큼 젊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목소리가 셌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전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서서 건물밖으로 나갔다. 리무진과 영구차가 주차장에 서있고, 오빠의 차도 보였다. 언니가 몰고 온 것 같았다. 아마도 돌아갈 땐 여기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모양인 것 같았다.


"왜, 식사 좀 하지 않고?"


어느새 상기가 옆에 와서 섰다. 나는 건물 안쪽으로 돌아들어가서 그에게 담배를 한 대 얻었다. 상기가 불을 붙여준 담배를 깊이 빨아 당겼다. 연기가 빨려 들어와 가슴을 지났고 바로 위장이 부풀어 올랐다. 다시 천천히 숨을 내쉬며 연기를 흘려냈다. 하늘은 끝까지 흐렸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조용히 겅물을 적셨다. 차양 처마지붕의 선을 따라 빗방울이 눈물처럼 신발 위로 똑똑 떨어졌다.


"여기까지 따라왔네?"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1번 사위가 와야지."


그럼 2번은, 3번은? 이런 생각을 하며 마셨던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뱉어냈다.


"오늘 저녁은 집안에서?"

"아직 특별한 말은 안 나왔는데, 잘 데도 마땅찮고, 너네 집으로 가야 할 거 같아."

"알았어, 그러려고 내가 있는 거니까."


다시 연기를 입 밖으로 흩어내며 서 있는 사이 건물 안쪽으로 철호가 쑥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상기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상기는 철호 쪽을 돌아보지 않은 것처럼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빳빳하게 고개를 세운 채로 철호가 들어오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철호가 내 옆에 와서 섰다.


"궂은 날씨네. 우리 결혼식 때도 이런 비가 내린 거 기억해?"

"그랬나?"


나는 얼떨결에 철호의 말에 응답했다.


"저 사람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지?"


철호는 상기가 나간 쪽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말했다.


"응, 서클 후배잖아, 우리 결혼 전인가 후인가 자기도 몇 번 봤을 걸? 그래서 기억하는 거겠지."


그러면서 서클 모임이 있을 때 자기도 같이 몇 번 갔었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 아, 그때 호프집에서, 구석자리!"


그랬다. 상기는 모임 때마다 늘 내 옆에 앉았었다. 그랬던 상기는 철호의 등장으로 맨 구석자리로 스스로 나가 앉았던 것이다. 그렇게 두세 번 모임을 했고, 그 자리에 철호도 결혼상대자의 자격으로 내 옆에 앉았다.


"맞아, 그 친구, 야 진짜 오랜만에 보네. 30년? 그쯤 된 것 같은데?"


철호는 신기하다는 듯 상기가 사라진 쪽을 계속 응시했다. 그러면서 담뱃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몇 번 연기를 뿜어낸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근데, 오늘 말이야. 이렇게 다 흩어지는 건가?"

"응, 그럴 거 같아."

"당신은?"

"난, 아직..."


철호가 몇 번 담배를 빨았다가 연기를 뱉어내는 사이, 나는 담배의 필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비가 떨어지는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할 말이 좀 있을 거 같아. 갑자기 생각난 것도 있고, 그리 오래 걸릴 거 같지 않은데, 저녁에 술이든 식사든 했으면 좋겠어. 남 눈치 보이면 그냥 우리 집으로 가도 좋고."


순간, 우리 집이라면 어떤 집을 가리키는지 헷갈렸지만 금방 갈피를 잡았다. 말할 때마다 연기가 조금씩 입 밖으로 새 나왔다. 나 역시 필터를 입술에 갖다 대고 짧게 연기를 마셨다가 이내 뱉어내며 말했다.


"벌써 3년이 지났어. 다른 가족들은 우리 사이 아무도 몰라."

"그러니 내 차로 같이 이동하기도 좋잖아. 자연스럽게… 이게 이제 마지막 기회 같단 생각이 들어서..."


내 마음이 흔들린 건 마지막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마지막', 그 말은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다. 엄마에겐 금기어에 해당하는 몇 가지 말 중 하나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 마지막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 올라왔다. 그래서 이유는 묻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상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상기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영구차 뒤편에서 상기의 SUV가 돌아 나왔다. 그리고 나와 철호가 있는 골목을 들여다보듯 천천히 건물을 지나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우린 여기서 바로 들어가야겠다."


오빠가 식당입구에 모인 식구들을 향해 말했다. 언니가 나를 쳐다보았다.


"넌, 어떡할거야?"

"집으로 가야죠."


철호가 나를 대신해 대답을 했고, 나는 고개 숙인채 그대로 신발등을 내려다 보았다.


"먼저 들어가, 다음 주 수요일에 비행기 타야하니까, 그전에 다 같이 식사 하자."


내가 언니를 쳐다보며 말하자 오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라는 말을 이젠 못하겠네."


오빠가 철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철호도 손을 맞잡고 오빠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일 수 있었다. 내게 집중하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딱히 나를 배척한 것도 없었고, 모든 생활이 순조롭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다. 그 2프로의 관심을 내게 쏟아주지 못한 잘못이 철호에게 있다면 있었다. 내게 2프로는 거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철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말을 내게 했는지도 몰랐다. 원래 성격이 그랬으니까, 내게 나쁘게 할, 나를 배신할 그런 성격의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길을 가며 손을 잡아 주지 얺는다고 투정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가라는 거지? 하는 말로 들렸고, 나는 그래서 내 마음이 가는대로 걸어 나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각자의 부부가 각자의 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가는 엔딩, 그건 모든 것을 덮는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나도 각자의 집으로 가는 데 동의했고, 상기를 뒤로 한 채 철호의 차에 올라탔다.


"재혼했다며?"

"안 했어, 당신은?"

"난 했어."

"누구? 그 사람이랑?"


철호가 말하는 그 사람은 누굴 말하는 것일까. 철호가 이메일을 통해 언급했던 남자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중 어느 누구보다 다니엘을 가리킬 확률이 높았다.


"응, 그 사람... 당신은 왜?"

"그 사람이 날 떠났어. 아버지 장례끝나고... 그래야 온전한 삶을 살수 있다면서 말이야."


그랬구나, 그는 아직도 혼자구나, 그도 옆에 사람이 있었구나, 행복하길 바랐는데, 미안하다, 내가 즐거운 것이 너에겐 고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 끊지 않았어?"


기어박스 앞 콘솔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들며 물었다.


"다시 피게 됐어. 글을 쓰면서 담배를 다시 피고 있어."

"글을 쓴다고? 어떤 글?"

"응 별 거 없어, 웹소설..."

"아, 그렇구나, 잘 돼?"

"그럭저럭..."


그가 말하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은 명맥을 유지할 정도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가 뭔가 새로운 일을 할 때,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에 사로 잡혀있다는 뜻이었다. 돈이 되든, 글이 되든, 그게 뭐든 간에 그를 붙들고 있는 게 있다는 의미였다.


"할 말이 있다며?"


내가 연기를 뱉어내자 철호가 선루프의 지붕을 살짝 열었다. 조금이지만 비가 새들어왔다. 천장을 닫고 다시 내쪽의 창문을 찔끔 열어주었다. 실내의 담배연기가 한쪽으로 쏠리며 일제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 그런 것들이 남기는 아름답다운 장면 같은 것이었다. 이것도 역시 일종의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그 얘긴 집에 들어가서 하지."


나는 말없이 담배를 빨았다. 등받이에 기대 내 뱃속에서 나온 가늘고 희미한 연기와 담배끝에서 타오르는 파란색의 연기가 뒤섞여 창틀을 넘어 사라져가는 모양을 응시했다.

인간은 어쩌면 타인을 보면서 자신을 정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철호를 보면서 그의 복잡한 마음을 통해 나를 짐작하듯, 내 복잡한 마음을 이해 할 수있다. 과묵한 오빠를 쳐다보면서 오빠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오빠의 일거수일투족 속에는 나를 이해한 것들이 묻어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언니 역시 말할 필요 없이 언니 속에 내가 들어 있다. 내가 나를 쳐다보지 못하므로 나는 남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들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철호가 하는 말 속에도 분명 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오해든 착각이든, 몰이해에서 오는 오식이든 그 어떤 것도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일 거라 믿고 싶었다.


"처형 전화를 받았어."

"그랬을 거야."

"고맙고 미안하더라."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철호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건너편에 족발이라고 씌어진 가게로 비를 피하듯 뛰어 들어갔다. 집에 가서 먹을 안줏거리를 사는 모양이었다. 나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창을 타고 내렸다. 그렇게 방울방울의 빗방울들이 둘 셋씩 합쳐지면서 구불구불한 물길을 내며 유리창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배가 불룩한 검은 비닐봉지를 뒷좌석 위에 올려 놓고 철호는 다시 운전을 했다.


"여기가 이 동네 가게들이 밀집한 곳이야. 고속도로 마지막 휴게소 같은 곳이지."


고르지 못한 산길을 따라 차가 움직일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제 이 사람이 이런 데 사는구나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나 때문에 그가 몰락한 건 아닌가 싶었다.


"조용한 데 찾다가 여기까지 왔다. 알 지 모르겠지만, 학교는 휴직했어."

"왜?"

"그냥 이런저런 구설수가 많았어."

"학교에?"


나는 다시 내 문제로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모든 문제가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무겁게 나를 눌렀다.

차가 언덕 위로 올라서자 저만치 100미터 정도 앞에 집이 한 채 나타났고, 그 집은 산으로 올라가는 깊 옆으로 이삼십미터 정도 더 들어간 막다른 길 끝에 있었다. 파란 지붕을 얹고 단정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곱상한 할머니같은 집이었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고 온세상이 빗소리로 가득찬 것 같았다. 파란 지붕 위에서 솨하는 소리를 내며 옥구슬이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철호가 차문을 열고 양복 상의를 벗어 내 머리 위로 씌웠다. 내리는 비가 양복 자켓에 떨어졌다. 그리고 스며드는 느낌이 자켓 안으로 울려 퍼졌다. 따뜻한 향이 콧속으로 스몄다.

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은 아늑했다. 철호가 커튼을 걷어내자 거실이 환한 빛 속에 드러났다. 식탁이 놓였고, 의자가 두개, 그 뒤편으로 달을 바라보는 뒷골목 강아지 그림의 액자가 걸렸고, 양쪽으로 방이 하나씩 그리고 맞은 편엔 화장실이 문이 열린 채로 안이 드러나 보였다. 대체로 깔끔하고 무난한 정리 상태였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사네."


철호가 거실의 통창을 열어젖혔다.


"이 길이 등산로라 사람들이 잘 쳐다보거든, 여기까지 들어와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야.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 사람은 없을 거야."


나는 철호의 자켓을 식탁 의자 위에 걸었다.


"앉아. 거기..."


식탁 위에 가지고 들어온 포장을 풀어 헤쳤다. 평소 같으면 내가 하던 일이었다.


"출출할 때 이집 족발을 먹는데 맛있어. 불족이라고 훈제향이 나면서 식감이 촉촉해."


이런 말도 내가 허던 말이었다. 사람은 약자가 되어서야 사람다워지는 것인가 보다. 이제 눈높이가 맞추어진 것같아 나는 훨씬 편해진 기분이 되었다.

철호가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며 내게 물었다.


"아직도 맥주?"

"응, 요즘은 와인으로 바꿨지만... 소주는 아직..."


철호가 식탁위에 소주 한 병을 올려놓고 , 찬장을 열어 술잔을 가져왔다. 그 중에 와인잔도 있었다. 입이 좁은 중간 사이즈의 보르도잔이었다. 철호는 스템이 길게 빠진 보르도 잔을 다리 긴 여자에 비유하곤 했다. 그의 말에 다르면 가장 이상적인 비율의 잔이었다.

참기름병 뚜껑을 열듯 와인병에 박혀있던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고 내. 앞에 놓인 보르도 잔에 술을 따랐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은색 액체가 잔 속에서 찰랑거렸다. 그리고 역시 소주병도 따서 스스로 잔에 술을 채웠다.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마찬가지야."


철호가 소주잔을 들어 올려 내 쪽으로 가져 왔다. 나도 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가져다 댔다. 가볍게 소리를 내며 술잔은 각자의 입술에 가서 닿았고 찝질하고 떨뜨름한 맛이 혀를 감싸 돌았다. 차가운 액체의 질감이 혀밑에서부터 입천장을 한바퀴 돌아 입속을 휘감았다. 그리고 목구멍을 타고 조금씩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뱃속에 차가운 것으로 젖어들었다.


"좋네."

"좋아?"

"응."


자신의 소줏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철호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3년이네."

"그러네, 모든 게 빨라."

"아직 내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아."


나는 순간 멈칫했다. 즐거운 시간과 고통스런 시간을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일 거란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느 것일까? 그가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면 그 속엔 나의 과로움도 분명 들어 있을 것이다. 그 괴로움은 나로 안한 것이었다. 타인 속에서 나를 보는 거니까.


"애들은?"

"준희는 졸업반이라 레주메 쓰느라 정신 없어."

"그래, 벌써 그렇겠구나."

"애들은 당신 원망 안 해. 나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겠지만 잘 받아줬어."

"다행이네, 트라블이 없어서."


나는 처음부터 애들이 다니엘을 수긍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었다. 철호가 아이들에게까지 배신감을 느낄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삶은 다른 공간에서 온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으니 각자의 공간에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아이들은 우리보다 적응이 빨랐다. 아이들은 다니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서로의 생활과 근황을 물으며 술이 한 순배 돌자, 나는 한잔을 다 마셨고, 철호는 반 병을 다 마신 상태였다.


"우리, 이렇게... 조금이라도 전처럼, 이렇게만이라도..."


철호가 말을 돌리고 있었다. 하기 어려운 말을 할 때 그가 말하는 습관같은 것이었다.


"전처럼, 이렇게?"

"그래, 전처럼 이렇게만이라도..."

"나 그 사람 애를 낳았어. 이제 세살이야."


철호가 술잔을 담숨에 들이켰다.


"알고 있어, 미국에서 출산한 사실."


내가 잔에 입술을 대는 사이 다시 그가 말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혼전에 배우자의 이성관계를 알게 된 거나, 혼인 중에 배우자의 복잡한 이성관계를 안 거나, 뭐가 달라질 게 있을까? 하는 생각."


나는 기울어진 와인잔 옆으로 철호를 쳐다보았다. 두 손가락을 깍지 끼고 맞잡은 채로 자신의 소줏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둘은 똑같은 거였어. 단지 결혼 유무에 차이가 있을 뿐, 정작 당사자에겐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거야."


그가 다시 소줏잔을 꺾었다.


"생각해봐, 아까 상기라는 애도 당신이 나와 결혼 전에 만났던 사람이었잖아. 그 사람이 어머니 장례에 다시 나타난 건, 지금도 그 관계과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일 거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도 상기를 만나고 있는거야. 30거의 25년전 사람을 말이야."

"그건 드문 오랜 우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텐데?"

"당연히 드물지, 남녀관계라면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그런 거였어?"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다시 속으로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답답해서 화가 날 지경이 되었다. 왜 날 한번도 제대로 다그치지 못하는 못한 철호였다. 그날, 역전 모텔에서 단 한번 그는 나를 제어했다. 과감하게 나를 제압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웠다. 그런 그이 모습은 처음이었고, 그 일 이후 나는 왠지 그 모습에 끌렸다. 나를 압도 하던 그의 목소리와 손끝에서 느껴지던 단호한 권력의 느낌, 나는 그런 철호를 원했던 것 같았다.


"이제와서 쟁쟁거리는 그런 투정을 내게 다시 하는 거야?"

"난 단지 당신이 내 생각을 이해해 줬으면 해서 그래."

"무슨 생각을? 내가 혼전이나 혼후에 여러 만자들과 관계를 했다는 걸 당신이 내게 왜 이해를 구해야하는데? 그건 내가 할 말 아냐? 물론 난 그걸 당신이 이해해 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알아 들어?"

"알고 있어, 알고 있지. 지금 내 생각은 말이야, 내 깨달음에는 전에 몰랐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는 사사실을 알아냈다는 거야."

"뭘? 어떤?"

"처음엔 내가, 배반감에 분노하고 치를 떨었어, 살인충동까지 느꼈다면 이해하겠어?"

"뭐, 누가? 당신이? 나를?"

"그건 나만이 느꼈던 감정이었어. 당신은 몰라도 되는 그런 감정."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있어?"

"그건 생각이 아니었어, 나도 어쩔 수없는 충동이고 감정이었어.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어? 그것도 가족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갑자기 무서워 졌다. 나는 일어서야 할 것같은 충동을 느꼈다. 이 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 충동, 그런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철호가 갑자기 무서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를 따라 나선 것이 후회스러웠다.


"생각해봐, 당신이 남자들을 만나고 있을 때, 나는 뭘 했겠는지. 그리고 모르면 그만이겠지만 알고 났을 때의 그 더러운 기분, 이런 이기적인 뇌의 구조 말이야."


그는 나를 자신이 가진 어떤 주제를 가지고 나를 설득하여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야. 당신은 미국에서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결혼 생활 중이다. 당신이 그랬지, 이혼 후에도 전남편 전부인의 관계로 서로의 배우자에게 소개하며 서로 잘 지내는 그런 관계가 되면 좋겠다고 했었지?"

"그랬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바로 그거야, 서로 분노, 적개심, 배반자 감정, 이런 감정들을 없애보자는 거야.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 같지 않아?"

"나는 당신한테 그런 감정이 없어."

"당연히 그렇겠지, 당신이 유책 배우자니까,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봐. 이렇게 결혼이 파탄나게 된 이유가 당신은 내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건 정말 그랬다. 결과적으로 철호는 결혼생활에서 유책이 있는 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는 내게 다르게 말하겠지만, 그의 말을 통해 받아들인 것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그것 하나였다.


"모든 게 터무니 없는 이기심이야. 나 역시도! 그랬다는 걸 나도 인정하는 거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다는 게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봐."

"그래서?"

"그래서..."


철호가 다시 소주잔을 꺾었다. 목덜미속에 목젖이 철렁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내 목젖도 따라서 움직였다.


"미국에서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해, 그리고 한국에 나올 때는..."

"그 때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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