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순이야."
철호는 이 문장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만의 말이었다.
"시간은 인간만이 감지하는 기준이거든, 다른 동물들에게는 시간개념이 없어. 특히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식으로 일직선으로 어딘가로 나가고 있다는 식의 선형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 그냥 시간이란 것은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야. 어디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그런 게 아니란 거지."
처음에는 그가 술을 좀 빠르게 마시는가 싶었다. 그렇게 반 병을 마시고, 내게 한국의 아내로 남아 달라고 한 다음 다시 반 병을 다 마시고, 냉장고에서 새로 한 병을 꺼내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수 없이 말을 주절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있니?"
고개를 꺾을 때마다 한 잔 만큼의 술이 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성관계를 감출까? 아니 감추어야만 할까? 원숭이나 개나, 말이나 소나, 이런 짐승들은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지? 그런데 인간만은 왜, 그게 유독 남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행위일까? 나는 최근에 이 근본 이유가 자신의 성기노출과 관련이 깊다는 걸 알게 됐어."
"무슨 말이야? 겨우 그 딴 걸 말하려고, 날 오라고 한 거야?"
"잘 들어와, 결코 그 딴 게 아닐테니까. 조금만 참고, 끝까지 들어보란 말이지."
"내가 소설을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인간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알게 된 거란 말이야. 이게 당신하고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잘 들어둬."
그리고, 다시 한 잔을 들이켰다.
"아마도..., 부끄러움 때문이겠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암, 부끄러움. 근데 왜 성기가 타인 앞에 노출되면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거 생각해 봤어?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심할 거야? 어때? 왜 그런다고 생각해?"
"글쎄... 본능 아닐까?"
"본능, 그렇지 본능이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니까, 본능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내가 본능을 의학 사전에서 찾아봤단 말이야."
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서, 두꺼운 책을 한 권 들고 나타났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그 책을 펼쳐놓고 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해당 페이지를 펼치고 손가락을 뻗어 항목의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 말이야, 내가 줄을 쳐놨거든, 조금만 들어봐. 내가 읽어 볼 테니까."
철호가 사전의 내용를 읽기 시작했다. 정의를 내리고 예까지 든 쉬운 설명이었다.
"어떤 생물 조직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작이나 운동. 즉, 경험과 학습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갖춘 성능이나 반응의 복합체를 말한다. 아기가 젖을 빤다든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행동 따위이다. 본능은 경험으로 습득할 수 없는 능력으로서 학습과 대립하여 논의되지만 실제 행동에서 본능과 학습을 구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동물의 발전단계가 고등화됨에 따라서 성숙에서 오는 본능행동과 학습에서 오는 행동은 구별하기 어렵다. 꿀벌이나 비둘기가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귀소본능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행동도 여러 번 횟수를 거듭하여 촉진된다는 것이 알려졌다."
읽기를 마친 철호가 다시 술잔을 들어 팔목에 스냅을 주며 빠르게 들이켰다.
"이거, 경험이나 학습하지 않은 선천적 동작, 자신의 성기를 감추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았으니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겠지? 사전에서 본능과 학습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고 했지? 그런데 이 전제가 잘못된 거란 말이야. 학습을 우린 당한 거란 말이지.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고 있는 그 이전의 의식에 파묻힌 기억 속에 지지, 에비... 데끼... 이런 말들로 우린 이미 학습된 거였단 말이야."
한번 흐린 그의 눈은 다시 초점을 잡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학습은 그런 거야, 무의식적이란 말이야. 그게 정신적인 것이면 문화라고 하고, 물질적인 것이면 문명이 되는 거거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나는 그가 내 문란한 사생활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3년전 그와 같이 보낸 모텔에서의 마지막 관계가 떠올랐다. 강제적이었던 만큼 내게 수동적인 자세를 요구했던 굴욕적 관계였다. 그리고 그가 내게 보낸 이메일들을 떠올렸다. 그 편지에는 끊임없이 나의 남자들에 대한 욕설과 성적 쾌락을 비하하는 묘사들이 한 문단 간격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즐거웠냐, 그놈의 성기 아래 황홀한 몇 날의 밤낮을 보냈을까, 네가 어느 모텔에서 질러댄 교성에 한 집안은 박살나고 있었다는 등등의 원색적 묘사와 외설적 표현으로 가득찬 편지였다.
당시 나는 그의 이메일을 읽으며 순간, 화면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마치 정사현장에서 그에게 발각된 것 처럼 볼이 뜨거워졌다. 남에게 보이면 안되는 현장을 들켜버린 심정, 철호가 말하고 있는 부끄러움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감이 잡혔다.
"그래서, 지금 와서 내가 부끄러워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그렇지. 들켜버린 사람의 심리는 오히려 뻔뻔해진다는 게 예상 못한 특징이라는 걸, 당신이 지금 증명하고 있는 거야. 그 감정의 이면에 부끄러움이 숨겨져 있는 거야.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화를 내는 거란 말이지. 좋아, 아주 적절하게 좋은 반응이야. 지금 내가 제기하는 이 문제와 적절히 합이 맞는 상황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쪽 방향이 아니야."
등받이로 상체가 물러나며 그는 고개를 뒤로 꺾고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듯 했다.
"이걸 상상해 보자고, 어디까지나 상상이란 걸 명심하고..."
그는 팔을 뻗어 큰 뼈가 드러나있는 돼지 발의 살점을 하나 집어 새우젓 종지에 찍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나무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는 내게도 한 점 먹어보란 듯이 손바닥을 펴 안주 접시 쪽을 가리켰다. 대신에 나는 남은 와인을 입속에 흘려 넣었다. 그가 남은 술을 탈탈 털듯 내 잔에 부어 주었다.
그는 학교에서 강의하듯 한 텀 한 텀 호흡을 끊어가며 설명했다. 나는 그의 학생이었고 그는 나의 선생이 되어 있었다. 그의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학습이 없었다면?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과 같은 거야. 도덕이란 게 뭐 거창하게 무슨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 이런 게 아니고, 아주 단순한 거거든. 에비, 데끼, 무시라, 지지... 이런 게 윤리 도덕을 만들어 내거든."
"그 금지어가 왜 생겼는지는 사회학에서 따로 이야기해야 할거야. 지금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런 게 없는 자연상태를 상정해 보자는 거야. 그럼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게 크게 없어. 인간이 동물과 달라지기 위해서 윤리도덕을 만들었고, 그게 인간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완성해 낸 거거든. 이런 인간의 사고 능력에 따른 물리적 전파능력이 개발 유전되면서 인간은 동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라..."
"근데 말이야, 여기서 재밌는 건, 애초에 그걸, 그 도덕과 윤리라는 주입을 왜? 인간이 하기 시작했겠냐 하는 거야. 여기에서 인간은 선택을 한 거지. 잃을 것을 감수한 것은, 얻는게 더 컸기 때문이야. 무엇을 얻고 무엇을 얻었겠어? 동물의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걸 우린 인간이 되라고 강요받으면서 모두 포기해 버리고 살고 있는 거야. 그게 뭔지 알겠어? 그리고 위대한 혜택처럼 인간이 받게 된 것, 그게 뭐였을 거 같아?"
여기서 철호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술잔을 내밀었다. 내 잔에는 마지막 남은 와인의 붉은색이 찰랑거렸다. 작은 잔과 큰 잔이 마주치며 가볍고 둔한 소리가 어우러졌다.
"너도 나도, 우리 인간이 그 때 잃어버렸던 걸, 다시 찾는 거라고 생각해봐. 그걸 지금 다시 찾는다고, 인간에게 닥칠 불이익이나 재앙은 없어. 그걸 빨리 깨달은 사람이 따갈 수 있는 열매라고 생각하면 더 즐거워질거야. 이게 어려워? 아주, 간단한 일이야. 그냥 예전처럼 여기서 살고, 거기 가선 거기 식대로 살고, 뭐 하나도 이상한 게 없을 거야. 자연스러운 거라구, 자연의 섭리, 현실에 충실하면 그게 자연선택이 되는 거라고. 진화하는거야, 너도 나도 더 나은 인간으 로 살아가게 되는 거라고. 단지 내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밀려났을 뿐이야, 넌 정규와 비정규 둘 다 꿰 차서 그 운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란 말이지."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술에 젖은 입술을 검지와 엄지로 닦아 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무슨 명목으로? 우린 이미 끝난 관계야!"
"명목? 당신이 내게 한 말인데 벌써 잊었어? 이혼하고도 서로 왕래하며 허물없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말..."
"그건, 서로 원한질 일 없이 편안한 관계로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는 뜻이었지."
"그게 그거 같은데? 같은 말 아닐까?"
그가 빈 잔에 소주를 따랐고, 내 와인잔에도 소주를 부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란 말이지. 인간이 잃어버린 것, 도덕 윤리라는 가면을 쓰는 순간, 인간이라는 품격이 탄생했지만, 그 품격도 지배자의 품격이지 우리같은 보잘 것 없는 하층의 인격들은 애당초 춤격같은 건 해당 없는 일이야. 어때, 버렸던 걸, 그 때 잃어버린 걸 되찾고 싶지 않아? 아마 당신은 그걸 모두 찾았을 거야. 최소한 내가 보기엔 그래.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이말은 전적으로 나의 각성에 의한 나를 위한 말이라고 볼 수있어. 버려야 했던 것, 쾌락, 자유, 동물, 본능 이런 것들, 다른 남자를, 다른 여자를 왜 만나는 거 같아? 당신은 잘 알지? 당신은 왜 이승호를 만나러 간 것 같아?"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가 이승호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가? 술이 깨는 것 같았다.
"말해봐. 그날부터 3일간 당신은 이승호와 춘천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었지. 그때부터 당신은 내가 모르는 남자를 두고 살았어. 아니다, 아니야, 오늘 만났던 그 후배, 그 녀석이 이승호보다 더 먼저라는 생각을 오늘 하게 된 건 정말 뜻밖이었어. 나보다 도 더!"
나는 와인잔의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의자 뒤로 물러나 철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손바닥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소주잔의 테두리를 왼손의 손가락으로 빙빙 돌려가며 쓰다듬고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이게 정말 재밌는 사실이거든. 선형구조를 가진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기를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것은 본능이 아니다, 완벽하게 전세계적으로 학습된 거지. 인류전체가 동시에 약속한 것처럼, 이게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거든. 그래서 불륜이나 외도 같은 것들이 발각되면 안되는 거거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렸어. 누가? 법과 제도, 시스템이. 그걸 만들 수있는 사람이 누구겠어? 불행하게도 우리같은 밑바닥 것들이 아니야. 우린 그렇게 시스템에 속고 있었던 거지. 충실히 복무하면서 그 시스템을 사랑하고 있었던 게야. 그건 완전한 허구야!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만든거! 그게 정치란 말이지. 지배자의 정치. 이제 감이 와야 할 걸? 법밖에 있는 사람들을이 있을거라 어렴풋이 생각한 적이 있을거야.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해 진 걸까, 그 자리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정점에 가 있는 자리일 거야. 상상 해봤어?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이런 일은 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 망상이지. 그 망상을 누가 심어준거지? 놀랍게도 시스템이야.
그걸 만들 수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없어. 최소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는 없다는 뜻이야. 우리가 모르는 차원이 다른 곳일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제 3의 공간이 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모두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누구로부터 감추어야 할 이유가 없겠지. 나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오히려, 성기를 보여주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행위에 속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는 따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란 말이지."
"그래서?"
감정이 가라앉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말의 갈피가 조금씩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홍상수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에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뭐 그런 영화가 있어. 내가 그 사람 기사를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참 재밌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추측건데 이 사람은 끊임없이 제도를 벗어나려는 일을 보기하지 않는 사람같단 말이지. 그가 만든 영화가 모두 그래, 문법에서 벗어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아, 오히려 일탈에서 새로운 법칙을 찾아들어가는 사람 같단 말이야. 그런 영화를, 이 사람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단 말이지."
나도 홍상수와 김민희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감독과 배우로 불륜관계를 맺고 당당히 커밍아웃해 버린 커플, 한국의 모든 여성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끌리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어때? 이들에겐 자신들이 치욕적이게도 불륜남과 불륜녀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세기의 로맨스 커플로 존재할 것이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거든. 당신도 그렇지 않겠어? 우리 애들에게만이라도 말이야."
갑자기 그의 말이 심장을 후벼 파며 훅 들어왔다.
"홍상수와 김민희는 그래서 스마트한 거야. 사생활은 최소한으로 자연스럽게, 공적 생활은 외국에서! 어때? 미국에서는 즐거운 사생활, 한국에서는 최소한의 공적인 생활을. 아니, 미국을 공적 생활로 할까? 어찌 되든 아무 관계없어, 두 개를 다 누리니까. 어느 것 하나를 소홀히 할 수없지."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그가 제안하려고 하는 요점은 한국에서의 부부생활을 중단없이 계속하자고 이야기하려는 듯 보였다.
"당신이 다른 여자를 밖에 두고, 두 집 살림을 허용하라고 나한테 제안하면, 내가 허락할 거 같아서 지금 그런 얘길 나한테 하는 거야?"
"왜, 안돼? 남자가 여자를 바깥에 두고 산 건 불과 50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삶의 형태였다고. 아니 같은 집에서 아랫채에 여자를 두고 사는 집안도 많았단 말이야. 한 동네에 첩을 두고 산 것이 먼 조선시대 얘기가 아니란 말이지. 이건 한국사회만 그런 게 아냐. 지금도 중동이나 인도에서는 일부다처가 공식적인 혼인 풍습이란 건 다 아는 사실이란 말이지. 결혼은 제도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환경에 맞게 만들어 낸 거란 알이지. 어때?"
"뭐가 어때?"
"인간의 삶은 그만큼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거야. 시간으로 따지면, 그때는 틀렸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지금은 또 맞다는 거야, 그게 홍상수의 영화야. 법과 제도는 사회가 만드는 거거든, 그래서 인간이 모순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지."
"인정 못하겠어. 아니, 난 모르겠어."
그가 웃었다. 시원하게 소리 내며 목구멍에 사레가 들린 듯 웃어댔다.
"넌, 그 상기라는 놈과도 자는 사이지? 그리고 미국에 있는 그 다니엘이라는 놈과도 그렇지. 한 놈은 후배고, 한 놈은 법적인 남편, 그리고 지금 니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전남편, 이 셋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아, 거기에 이승호까지 끼워 넣어 주지. 맞추면 내가 오늘 밤 너와 자주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함께, 그러나, 머릿속의 어떤 감정의 신경망 아래에서부터 정답을 맞히고 싶은 충동이 함께 일었다. 강압을 담은 그의 말들이 나를 눌렀고, 흐린 눈동자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내 심장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호는 지금와서 자신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너의 자유 의지에 맡긴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내게 재차 강조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담배에 불을 당겼다. 담배연기가 식탁 위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가 말하고 있는 시간의 동시성이라는 말과 함께 나와 관계한 모든 남자들의 모습들이 눈을 감은 망막 뒤편에 성냥불이 한 개씩 켜졌다 꺼지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난 너와 충분히 살을 섞고 산 남편이었단 말이야, 그것도 20년동안. 네 머리 속에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면, 생각해 보란 말이야.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옷을 벗지 못하는 이유, 그 부끄러움이, 그것을 도덕 윤리라고 부른다면, 그 윤리 도덕이 너를 얼마나 모순 덩어리로 만들고 있는지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지? 아니면 지금이 틀렸다고 할까? 인간은 너만큼이나 모순이야."
그는 3년전의 얼굴, 사태를 제어하는 콘트롤 타워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한번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입술이 미묘하게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나는 곁눈질로 알 수 있었다. 철호가 뭔가를 마음 속으로 깊고 강하게 각성하고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철호는 사라졌고, 나는 침대로 넘어졌고, 쓰러진채로 옷을 벗고, 고개를 모로 꺾었다가, 한쪽 다리를 올렸다가, 다시 다른 쪽 다리를 올리기도 하면서 어딘가로 깊이 빠져들어가 버렸다. 시간은 멈추어 흐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묶여 깊고 푸른 바닥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꿈결처럼 철호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시간은 형태가 없어. 그래서 길이도 없어서 짧은 지 긴 지도 알 수없어. 여기에 시간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없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너와 난 모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