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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 사랑

by 별사탕

집에 오기로 한 여자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대신에 요일을 정하고 누군가 철호의 집에 드나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여자가 젊은 여자라는 사실은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30년이나 묵은 연하남이 있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을 되새겨 보았지만 마음에 위안을 주기에는 빈약했다.


"답이 없는 건, 그렇게 정한 거라 알고 있을게."


나는 철호의 제안에 딱히 답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내 대답은 내가 보여준 반응으로 충분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시작된 새벽까지의 시간이 문제였다. 내가 그에게 문을 연 것을 허락으로 보는 것일까, 정말 철호와 관계를 하긴 한 걸까?


"어젯밤엔 변명하자면, 술 때문이었던 같아. 착각하지 마. 우리 관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우리가 뭘 했다는 거지? 난 당신한테 명확한 답을 얻고 싶을 뿐이야."


그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 순간 나는 안도의 숨을 들이마셨다.


"여태 난, 여자를 그런 식으로 대하진 않았어. 당신답지 않게 날 상상했군."

"미안해."


나는 사과했다. 이제 모든 게 명쾌해졌다. 머릿속도 맑아지는 듯했다. 한편으로 철호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나를 어떻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과, 지난 결혼 기간 동안 그가 내게 보여준 무덤덤함의 신뢰, 그건 내 감정에 따라 왔다갔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바뀌어 갔다. 그는 늘 그 자리에 그런 모습으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내가 시험하고 의심한 일, 사랑이 없다고 믿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춘천에서 3일간 이승호와 지낸 일에 대해, 죄다 알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었던 남자였다.


"협탁 위에 놓였던 결혼사진이 엎어져 있었어."

"무슨 협탁? 사진?"


철호는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아, 그때 당신이 이승호를 만나던 때 말이야, 그 사람이 집에 다녀간 날들을 내가 체크하고 있었거든."

"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해장국 그릇에 담긴 선지덩어리를 숟가락을 저어가며 그릇 한 쪽으로 모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이승호가 아니고 상기였어. 그래야 앞뒤가 맞는 거였어."

"미안해."


다시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 위해 무겁게 입술을 뗐다.


"당신한텐 할 말이 없어."

"아냐, 내가 그런 말 듣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거든. 흔적은 그런 것 말고도 여러 가지였단 말이야."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국물을 입 속에 떠 넣었다.


"콘돔 박스가 열려 있다거나, 베개에 묻은 머리카락, 웃긴 건 체모가 나온다는 거야. 그건 누가 봐도 뭔지 알 수 있는 거란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숨길 수 없는 흔적들이었다. 사람이 남긴 흔적, 그건 아무리 감추어도 남아 있다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것들이었다. 한번은 상기의 팬티가 빨래대에 걸려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의도적인 흘림이었다.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분명한 물증들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이상하게 들뜨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공을 들이지 않아도 그냥 생활에서 보이는 상징같은 징표들, 상기가 내게 한 말이었다. 내가 없는 공간에서 날 찾아봐, 나는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 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주로 수요일, 목요일에 그런 일이 일어났고, 내가 그걸 증거 삼아 내 집을 드나드는 남자가 누구인지 밝혀 낸다면, 당신은 아마 무척 곤란한 지경에 빠질 거란 생각이 들었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 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단 말이지."

"그래 내가 놀랄까 봐 마누라 바람피우고 있는 것도 참고 지냈다고? 그게 말이 돼?"


이런 그의 태도가 너무 싫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걸 존중이랍시고 보여주는 이런 태도는 그가 나에게 더 이상 사랑이 없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내게 작용했으니까. 도대체가 내 남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철호였던 것이다.


"이제 모든 걸 다 알게 됐잖아, 어떻게 하고 싶은데?"

"뭐랄까, 그동안 여러 사람과 함께 산 느낌이 들었어. 내가 나타난 시간을 절묘하게 피해서 다른 남자들이 내 집을 출입하는 거지. 시간을 교차하면서,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되는 물질의 원자들이 전자의 보호를 받으며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피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물질의 운동 같은 거였단 말이야."


가게에는 아침 해장을 하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주방 안쪽에서 솥이 덜그륵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발자국 소리, 도구들이 작동되는 소리들이 빈 통 속을 밖에서 때리듯 가끔 가게안에 울렸고, 문밖에서는 서울 쪽을 향해 달리는 차들이 내는 바람소리가 대문 쪽을 스쳐 지나갔다.


"이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깨지면 그 물질은 파괴되거든, 균형을 잃고 터져나가는 거지, 이 우주로 분산되는 거란 말이지. 우리도 그런 거야, 이 법칙엔 예외가 없어."

"당신 그쪽 책을 너무 읽은 거 아냐? 좀 쉽게 말해."

"아, 그래, 미안. 그래서..."


철호가 순가락을 떠 선지를 한 덩어리 입속에 넣고 씹었다. 그의 양쪽 입가에 구물이 번지르하게 스며 나오자 통속의 휴지를 꺼내 우물거리는 입술을 닦았다. 다시 젓가락을 들어 깍두기를 한 점 집어 입속에 넣고 우걱우걱 소리가 나도록 씹었다.


"이 집 해장국은 이게 제 맛이란 말이지."


철호가 네모난 깍두기를 하나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보이며 다시 입속으로 가져갔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음 한쪽으로 식욕을 잃지 않고 있는 그에게 고마움이 밀려왔다. 잘 살아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그의 오물거리는 입술과 함께 되새겨졌다.


"잘 생각해 봐. 당신이 만났던 남자들과 지냈던 그 시간과 공간이 절대 통합될 일은 없었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시간과 공간을 계속 유지하는 거야. 그뿐이야. 이런 사회적 제도, 구속 이런 걸 걷어내잔 말이야. 이젠 그때가 된 것 같아."

"그래서 미국에선 다니엘이, 한국에선 김철호가, 그럼 이제 난, 남편이 둘이 되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바로 그거야, 정답!"

"가능해 그게?"

"그래서 잘 생각해 보라는 거야, 지금까지 우린 그렇게 살았어. 서로의 배우자 모르게 다른 이성을 두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졌지? 그게 결혼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었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단 말이야. 알아도 건드리지 않았잖아. 그랬더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내가 섣불리 그날 밤 당신 전화를 문제 삼지 않았더라면 서로 완벽했단 말이지."

"안 그래도, 당신과 정리하려고 들어온 나였어."

"뭐가 됐든, 그 후로 많은 생각을 했거든. 그래서 이게 결론이야. 이혼? 재혼? 그게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순 없다. 내가 만났던 사람이 번연히 저기 저렇게 살아 있는데 새로운 관계를 맺어 저쪽 사람을 버린다? 이런 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는 게 더 끔찍한 짓 아닐까? 어떻게 사람을 내쳐서 관계를 끊어 버릴 수 있냐고. 머리가 아무리 마음을 끊어버리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자신을 병들게 할 뿐이야. 당신이 날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있을 거 같아? 순간 순간, 문득 습관처럼 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지금 당신 남편을 부를 때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착각한 적 없어? 겉말과 속말이 다른 거 말이야. 아이들은 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니? 아빠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너무도 이상하지 않냔 말이야!"


그는 절대로 상대의 허락 없이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그랬다. 철저히 상대의 허락을 구했다. 그런 면에서 전아내였다고 예외는 아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여지를 주었던 만큼 내 행실이 문제면 문제였다. 어젯밤의 일은 그만큼 철호가 마음이 편한 상대이기도 했다는 걸 말해준 사건이었다.


"섹스 때문이야? 그게 그렇게 죄책감이 들 일이야? 남편이 모르면 그 사람과 해도 되고, 남편이 알면 그 사람과 하면 안 되는 거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뭐야? 결국 하는 건 똑같단 말이지. 이걸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부정이야, 외도가 결혼을 깬다고 생각하는데, 똑같이 결혼이 외도를 깬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럼, 외도와 결혼은 상극인가? 상대가 알거나 모르거나, 남편이 있거나 아내가 있거나, 그런 건 전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걸,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논리적으로 대꾸할 수 없었다. 그는 사실, 이미 벌어진 일을 근거로 나를 설득했다. 객관적으로 남에게 보이는 나는, 다니엘의 현아내면서 철호의 전아내란 사실, 그리고 이 관계를 이전의 관계와 다름없이 유지하고 싶다는 철호의 말이었다. 그리고 철호의 성격으로 보아 나에게 섹스를 의무적으로 요구하진 않을 것이다. 어젯밤의 일이 나를 안도시켰다. 내가 그에게 몸을 열지 않는 한 그가 딴마음을 절대 먹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상기에게 온 전화가 울렸다. 경의선 수색역 출구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걔는 왜, 오랜 세월을 당신 옆에 존재하는 것 같아?"


앞에서 통화를 들은 철호의 질문이었다.


"밥 먹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언제? 섹스하면서 할까? 이야기에 장소가 따로 있나?"


말 끝마다 섹스, 섹스하는 게 싫게 들렸다.


"역 주차장에 와 있대."

"여기서 5분 거리야, 금방 모셔다 드리지. 오래된 연인도 만나셔야지."

"그렇게 말하지 마. 당신 말 몇 마디로 무시당할 애 아냐."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걘 한번 보고 싶어서."

"왜?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니 말보다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이런 거지. 나보다 먼저 만났고, 나는 끊어졌지만,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사람, 쉽지 않잖아. 얼굴이 어렴풋해."

"기억은 그냥 그대로 놔둬. 그게 건강에 좋을 거야."


도로 가에 세워둔 차위로 햇살이 따사로웠다. 하늘에서 내려온 햇볕들이 차지붕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산란하면서 눈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철호가 열어준 문 안쪽으로 들어가 앉자 문이 닫햤고, 다시 반바퀴 차를 돌아 앞문을 열고 들어온 철호가 운전석에 앉았다.


"내가 한 약속이 우리가 한 약속이 되려면 당신 동의가 필요해."


시동을 걸면서 철호가 내 쪽을 힐끗 쳐다보곤, 출발하기 위해 차량상태를 점검했다.


"내가 미국 갈 일은 없을 거고, 다니엘이 한국에 나와 나를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어쩌면 좋은 환경이지. 공간이 분리되었다는 건 시간도 그렇다는 것이고, 그러니 절대로 의도하지 않는 한 서로 같은 공간 시간에서 통합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가장 안정적인 물질의 상태라고 할까? 파괴와 충돌은 더 이상 없을 거야."


내가 앉은 사이드 미러 뒤편으로 철호와 함께 내려온 산이 점점 멀어졌다. 그의 집이 저 산의 입구 어디쯤 있었다. 아이들이 어쩌면 여길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태워 올 수도 있어, 철호를 다시 만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나는 그에게 찾아온다는 젊은 여자가 신경 쓰일 뿐이다.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었지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철호도 예전에 나에 대한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제 완전히 손을 놔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시점에서 그의 젊은 여자가 성가신 이유를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에 오게 되면 여기서 잘게."


철호는 대로에서 차를 세웠고, 나에게 역 쪽의 방향을 가리켰다.


"저 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주차장 팻말이 보일 거야."


2층으로 된 역사 건물이 멀리 보였고, 인도가 역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다른 색의 보도를 깔아 놓은 것이 보였다. 나는 철호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철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해, 번호 그대로야."


상기의 차가 역사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진입 도로에서 큰 도로로 나가기 전 철호의 차가 그대로 저 위쪽에 깜빡이를 켜놓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철호가 차 옆에 서서 길게 담배연기를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를 외면한 상기의 차가 시내를 향해 본도로에 접어들었다.


"뭐 하고 지냈어?"

"누나 생각..."

"그 짧은 하룻밤에도 내 생각했어?"

"철호형이랑 뭐 하고 있을까 그 생각하느라..."

"남편이야, 남편이었던 사람이야."

"이젠 관계없는 사람이기도 하잖아."

"그렇지. 관계없지..."

"지금, 괜찮아?"

"난 뭐 항상 준비돼 있는 거 누나도 알잖아."

"좋아... 집에 맥주 좀 있니?"


나는 상기의 팔에 내 팔을 끼워 넣고 상가 마트에 같이 내려가 맥주 세 병을 사고, 땅콩과 버터를 한 봉지 샀다. 콘돔 박스를 집어든 나를 쳐다 보며 내려놓으라고 눈웃음으로 답하는 상기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집에 많아…"

"우리 집에도!"


둘은 깔깔 거리며 웃었다. 30년전의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써클실에서 술 마시고 그날 학관 지하에서의 일 기억하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첫입술을..."

"그때 니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

"사랑해...?"

"그래,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몸만 사랑하자..."

"그래, 지금도 그렇게 하자."


상기의 집에 들어와 둘이 맥주를 나눠 마시기 시작한 것이 오후 두 시 반쯤 된 시간이었다.


"우리, 참 길었다, 그치?"

"남들 같진 않았지."

"넌, 앞으로 어떡할거야?"

"뭘?"

"나 말이야, 날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거야."

"글쎄, 심난 하다, 누난 항상 나보다 결혼을 먼저 했으니까, 난 선택권이 없었던 거지."

"그랬구나, 내가 그랬었네."

"지금 선택권을 주는거야.

"내가 선택하면 나한테 올 수 있어?"

"좀 그렇지? 그래도 너 말을 듣고 싶어서..."

"뭐랄까, 우린 처음부터 선이 있었던 거 같아."

"계약 말하는거야?"

"그것도 그렇고, 그 전부터 누나가 날 변함없이 대한 것도 그렇고..."


술잔을 들고 바닥에 내려가 앉았던 내가 그의 다리 사이로 올라오면서 상기가 내게서 사라진 지난 5년동안의 그리움이라는 무형의 감정이 현실의 단단한 몸과 랑데뷰했다. 그가 내게로 내려오면서 우린 나란히 누워 서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가 널 어떻게 떠나보내겠니?"

"난 항상 이 자리에 있었어."

"그래, 알아, 내가 알지."


상기가 팔을 뻗어 담뱃갑을 찾았고, 불붙인 담배를 누워 있는 내 입에 물려주었다. 서로가 입에서 연기를 허공에 날리며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긴 시간이 흘렀고, 돌아보면 한 순간 같은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그의 몸위로 올라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나를 안았고,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손가락 사이의 답배를 받아쥐고 식탁위 접시 위로 던졌고, 우린 서로를 안고 왈츠를 추듯 거실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소파로 떨어진 내 위로 그가 올라왔다. 서로를 이기기위해 엎치락 뒤치락거리며 아이들이 놀듯 소녀같은 마음으로 웃었고 떠들었다. 마구잡이로 서로의 몸에 달라붙은 팔다리들이 옷을 헤집고 들어와 상대를 휘감았고 우린 그렇게 완전히 서로를 발가벗겼다.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끊어진 동작들이 일정한 리듬을 타며 반복적인 율동을 만들어 내면서 그도 나도 목구멍 안으로 숨을 삼키고 서로에게 집중했다. 눈은 눈을 응시했고, 손은 손을 맞잡았고, 가슴은 가슴끼리 맞닿아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하나에 하나씩 대응하듯 서로의 몸에 응답했다. 그렇게 상기는 헐거워진 내 몸의 빈 곳을 찾아 내 속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의 몸으로 내 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우린 하나로 맞춰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서로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었다. 그의 진득한 몸냄새가 스민 침대 위로 올라가 몸과 몸 사이의 빈 틈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당겼다가 놓아주기를 거듭했다. 아쉬움, 안타까움, 환희와 절망의 감정이 뒤섞였다. 뻗어 닿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떨림이 허공으로 들려올라간 발가락 끝으로 넘어오는 전율로, 몸부림치는 긴장과 이완의 순간순간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둘러쌓인 정점에 이르게 했다. 무질서하게 마구 두드려대는 난타 속에서 느낄수 있는 질서와 균형감으로 그는 나를 중력이 닿지 않는 아기집 속에서 둥둥 떠 있게 만들었고, 나는 그를 검은 어둠의 밑창 없는 늪 속에 가두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그렁거리면서, 내 작은 심장은 빠르게 할딱거렸다. 우린 서로에게 겨우 한 움큼만의 숨을 내쉬도록 허락해 주었다. 폐에 가득찬 숨이 턱밑까지 올랐을 때 그 숨조름의 내내 우리의 시간은 멈추었고, 공간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내가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호흡을 몰아올려 뱉으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베란다 창밖을 쳐다봤을 때, 세상은 그새 어둑하고 고요한, 완벽한 저녁으로 변해 있었다.


"상기야, 사랑했어. 내가 많이… 아주 많이…“


그는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의 손을 놓은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 보았다. 내 눈가의 주름 안 쪽에서, 안구를 데운 뜨거운 물이 한 줄기 주르륵 밖으로 흘러내렸다. 미간 아래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그대로 구겨진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와 무겁게 귀청 안에서 울려퍼졌다. 탁한 담배연기를 한 모금 빨아 당겨 깊은 가슴 속 어딘가로 밀어 넣었다가 더 이상 한 숨도 남아 있지 않도록 모조리 밖으로 뱉어 내고 싶어지는, 그런 슬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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