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을 비우고 오라고 한 영숙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자, 우린 완전체로 재결합되었다.
"왔냐, 쌍년들아!"
등판했다는 신호를 날리며, 영숙이 활발히 웃어제꼈다.
"참, 나 요새 많이 조신해졌어. 오셨어요, 해봐, 어여!"
"오셨어요?"
영숙이 빈자리에 엉덩이를 내려 깔면서 좌중의 얼굴들에 눈을 맞추며 출석을 확인하듯 재촉한 말에 계나가 응대했다.
"오냐, 쌍년아~"
영숙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엣헴'하고 장난질을 치자 다들 웃겨 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졌다.
"미안하다, 정혜야, 엄마 장례에 못 갔어, 그놈의 사업이란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비행기 표도 갑작스럽고 해서..."
영숙은 일본에서 술집을 하고 있는 정혜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계나, 경화, 은희는 모두 길게는 정혜의 초등학교 때부터의 동창들이었다. 장례식 때는 연락이 닿았던 계숙이만 왔고, 나머진 오지 못했다. 워낙 갑자기 연락을 돌렸고, 서로 일정 조율이 힘들었거나,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 계나가 꾸역꾸역 한자리에 다 모아 놓은 것이다.
"젊은 애인 하고는 여전해?"
"여기 올 때도 그 친구가 데려주던데?"
"어머, 그 사람 아직도 만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은 더 애틋해진다잖아."
"참, 너도 꾸준하다, 벌써 30년은 된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남의 수다를 온통 쏟아내며 지난 시간의 소원함을 풀려는 친구들, 그들과도 30년의 세월이었다. 서로에 대해 모를 것이 없을 정도로 속속 비밀이 없는 사이였다. 미국에 있는 내 생활을 꿰차면서 전화를 걸어 남자관리하는 법을 코칭하던 영숙이었다.
"틈을 주지 마라 이기야, 남자란 것들은 도대체가 눈만 뜨면 한눈을 팔아버리거든, 그러니까 빨리 약 빨려서 재워야 하는 거야. 남자와 애들은 잘 때가 젤로 이뻐."
물론 영숙이가 말하는 남자에게 먹이라는 약은, 여자의 몸을 말했다. 한국에서 조달받은 젊은 여자애들을 몇 명 데리고 아가씨 사업을 하는 영숙이 남자를 다루는 기술을 말할 땐,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친구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스토리와 정보를 많이 제공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영숙이 주선한 남자에게 빠져 정신 못 차리는 계숙에게,
"이년아, 정신 차려. 즐기라고 했지, 내가 언제 니 인생을 수렁에 빠뜨리라고 했냐? 지랄하지 말고 전화번호 지워!"
라는 매몰찬 말을 뱉어내며 자신이 소개한 남자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해대는 계나를 그에게서 억지로 떼어낸 것도 영숙이었다.
"나 정말 어떡해, 나 정말 그 남자가 막 생각나고 그래, 그 사람 없이는 못 살겠어 정말이야."
이러면서 질질 짜던 계나였다. 그때도 영숙이 계숙의 목덜미를 후려치면서,
"야, 이 쌍년아, 너, 니 애들 다 버릴 거야? 니 불쌍한 남편은 뭔 죄야? 그래서 니덜이 쌍년소릴 듣는다 이기야!"
그날, 우린 초저녁부터 영동대교를 넘어 사거리의 카페거리를 돌아, 루프탑 바, 개그맨이 한다는 포차를 다녔다. 그리고 단체로 부킹을 들어간 리베라 나이트 룸에서 남자들의 머릿수를 맞춘 후 줄줄이 방 호수를 일련번호로 나란히 해서 방을 잡았다. 침대에 둘러앉은 우리들의 한복판에 아직도 로비의 스모킹 부스 속에서나, 호텔밖 어디선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남자들의 자동차 비상키를 영숙이 와르륵 쏟아 냈다. 새겨진 자동차 회사의 로고를 잠시 들여다보는 사이, 영숙이 맞은 편에 앉은 내게 자기 앞에 있는 키를 잡으라는 눈시늉을 했고, 그게 미리 약속된 영숙과 나의 계획이란 걸 바로 알아채는 순간 나는 영숙의 앞에 있는 제네시스 로고가 새겨진 키를 잡아 챘다. 곧바로 너도 나도 손을 뻗어 각자의 키를 하나씩 나꿔챘고 남자들은 순서없이 한명씩 배당되었다.
"이 선택이 맞다면 나도 인정할게."
이런 무작위 운에 따른 선택에도 그 남자가 걸린다면, 우리 모두 계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고, 반대로 그날밤 누군가는 계나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모두 합의한 게임이었다. 마흔 둘, 내가 미국에 간지 4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나온 그 주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공항에 내린 나는 단지 남편에게 돌아가기 싫어서 돌아갈 집이 없었고, 그렇다고 남의 집에 얹혀 지내기도 눈치 보여서 마치 가출후 갈 곳이 없는 청소년같은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렇고 그런 불시착한 하루하루를 언니네에서 하고 있던 때였다.
영숙의 방을 본부로 삼고, 주먹 안에 키를 하나씩 쥐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초야를 맞는 신부처럼 가슴을 두근대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때 남자의 얼굴이 복도에 있었다. 말끔히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반지르하게 윤이 흐르며 코끝이 오뚝하고 날이 제대로 서있는 이제 막 서른이 지났을 것 같은 젊은 애였다. 광대가 도드라져서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 전체적으로 다부진 인상을 풍겼다.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어치피 하룻밤이었다. 처음부터 영숙이 계획하고 주선한 부킹이었고, 계나로부터 그 남자를 떼어내는 유일한 수단에 우리 모두가 몸을 바치자고 합의한 일이었다.
"이 바닥에서 뒤끝 없는 애들이야. 그냥 놀라고 만들어진 애들이라고 생각해."
영숙의 말에 모두 자신의 운을 맡겼다. 계나로서는 누군가의 교통정리가 필요했고, 나머지는 색다른 일회성 자극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남자를 자리에 앉게 하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누웠다.
"누님, 잘 모시라고 연락을 주셔서 영광입니다."
마치 누군가 사주해서 권력자를 모시기 위해 동원되어 온 위안남들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럽지 못함, 강제로 접대받고 있다는 부자연스러움, 그런 감정으로 관계를 맺기에는 께름칙했다.
"계나를 못살게 군다면서요?"
남자는 살짝 놀라는 눈빛을 비치며 이내 속을 감추었다.
"제가요?"
"그럼 누구겠어요? 지금, 옆방에 있어요."
남자는 순간 입을 닫았다.
"억울합니다."
"제가 맘에 안 들면 계나한테 가도 돼요."
계나의 마음만큼이나, 이 남자의 마음을 알아내고 싶은 충동이 반사적으로 충동질했다.
"지금 계나한테 가면 오늘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천천히 일어난 남자는 셔츠를 벗고 멀치감치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불 끌까요?"
그래서 나는 계나의 남자와 잤고, 다음날 계나는 그녀의 남자가 나와 잤다는 걸 안 순간 양평 해장국집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훌쩍거렸다.
"잘 하긴 하더라."
헤어지면서 계나의 귀에 대고 내가 해 준 말이었다. 언제부턴가 비밀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서로를 대했고, 그런 친구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는 위안을 하며 우정과 인생을 맞바꾸었다.
"너, 내일 간다며? 몇 시야?"
"10시..."
"그런 달려볼까? 적어도 우리에겐 24시간이 있으니까."
"아침 10시야."
"뭐? 하 참내, 시간 없네, 뭣들 해. 나가자."
"어디 갈 데 있어?"
"그래도 발버둥은 쳐봐야지."
"정혜 피곤할 텐데, 그냥 방 잡고 회포나 풀자, 내일 아침 그 친구가 공항에 데려다 줄거지?"
경화의 말처럼 피곤하기도 했다.
"그래? 그럼 리베라에 방 잡는다? 5년 전 그때 생각나네."
영숙이 웃었다.
"그래, 술이나 좀 사들고 가서 날밤 새며 놀아보자."
10시간 넘어, 강남에 방을 잡는다는 건, 아무리 평일이라 하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vvip잖아, 예비로 비워두는 방이 있지 않겠어? 최후의 방법으로 자는 년 깨워서 니네집 델꼬가라고 하는 방법도 있고. 이건 영업비밀이다. 누설은 간첩들이나 하는 짓이라 이기야."
계나의 남편은 연구원이었다. 그것도 삼성의 반도체 연구실에서 근무한다면,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도체 용량이 한 등급씩 오를 때마다 그의 연봉도 함께 뛰었다. 딸 둘을 낳고 계나는 사는 게 재미 없어졌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따로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모든 게 불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고등학생 딸 둘이 매일 아빠와 부딪치며 싸워댔고, 나약한 남편은 딸들의 등쌀에 기가 죽어 갔고, 특히 아동학대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한 후부터 그녀는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영숙이 계나에게 남자를 붙여준 거였다.
"시든 꽃이 되살아나는 거 봤어? 시들면 끝이야, 그러다 너만 죽는 거야, 이 바보야."
가정을 지키고 중심을 잘 잡고 식구들을 잘 선사하라는 말은 옛말이었다. 우린 모두 영숙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우리에겐 공자나 맹자가 없었고, 남자라는 가치기준의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숙이 한국에 나올 때마다,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화 그룹의 계열사 직원으로 있으면서 기업에서 관리하는 강남의 백화점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입점도 시키고, 백화점 행사 기획에도 관여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고 수문이 난 사람이었다. 회장의 둘째 아들이 사고를 쳤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뒤처리를 해준 공이 컸다. 그런 사람이 영숙의 애인이었다, 한국 애인.
"나도 나이 들면 이 짓 더 못할 거 아니냐, 그래서 노년에 여기 백화점에 코너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려면 미리 손을 좀 써놔야 한다 이기야. 진짜 명품은 일제야, 한국명품관이 유럽일색인데, 그건 또 아니거든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래, 정권이 바뀌면 일본풍이 불거야, 그때를 대비해서 이 남잘 꽉 물고 있는 거야. 좀만 느슨하면 남자들은 다 도망가거든, 그래서 괄약근을 풀어주면 안 된다 이기야!"
계나가 죽고 못살던 그 남자로부터 풀려나고나서 영숙은 경화에게 그 남자를 돌렸다. 남자문제는 다시는 돌아볼 수 없도록 완전히 마침표를 찍어 두는 것이 좋다는 영숙의 생각이었다. 한동안 경화가 그 남자에게 빠져 인생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영숙이 한국애인과 있는 자리에 계나를 불렀고, 영숙의 한국 애인은 계나에게 아까운 미모라며 다리를 놓았다.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나이 든 사내였다. 소위 지방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재산가였고, 철강, 건자재, 특히 레미콘 쪽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야, 나 취직했어."
어느 날 계나가 미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기분 좋은 변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미국에 있는 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한국에까지는 절대로 넘어오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나의 원거리를 이발사의 대나무숲인 것처럼 활용했다. 그러나 내게 전화하는 사람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절대로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 긴 시간을 서로 이야기하면서도 태반이 남의 이야기인 이유가 그런데 있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끈을 한 가닥씩 풀어내는 끈풀기식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 나였다.
"너 이제 그 남자 잊었지?"
"아유, 그게 언제 적 얘기니?"
"난 가끔 그 남자 생각나더라. 니 생각도 하면서..."
이렇게 공통분모에 대한 여운을 주면 계나같은 애들은 이렇게 대꾸하게 된다.
"내 생각은 왜?"
"어떻게 이런 남잘 잊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이년이, 그러는 넌 어쩌구? 정말.. 너 죽을래?"
이 정도까지 오면 거의 풀린 거라 본다.
"생각 안 난다니까!"
"딴 남자 생겼구나?"
여기까지 오면 계나는, 목소리가 베베 꼬이면서 사실은... 이런 마음을 드려내는 말을 시작하며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적절한 맞장구는 그녀의 이야기에 속도감이 붙게 만들고, 그녀 스스로 흥분을 더하게 한다. 그래서 계나는 나이는 좀 들었지만, 자신이 까먹은 남편의 보험대출, 퇴직금 중간 정산, 이자놀이하다가 뜯긴 수억의 자산들, 삼성이라는 골리앗이 강요하는 조기퇴직에도 책상을 붙들고 버티는 남편의 비굴함에도 정갈하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았던 것이다.
“매일 서로 얼굴보고, 일부러 시간내려고 머리 쓰고 할 일이 없잖아. 사무실에서 늘 보는 직원이니까 의심살 일도 없을테고.“
그래서 계나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졌다고 다들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일색이었다.
“너 내가 까만애 얘기했었지? 롯데에서 미샤 매장하는? 걔 매장에 갔더니 양아치같은 놈이 하나 앉아 있는거야. 꼴에 변호사래. 그 날 같이 식사하고 전화번호를 달래서 줬지. 골프하냬? 한다고 하니까 같이 나가자는거야, 자기가 물린 돈 다 받아 준다고… 속셈이야 뻔하잖겠어?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아주 상양아치가 따로 없어. 그런 놈들이 직업 귀천 안 가려. 어떻게 날 그렇게 볼 수 있니?"
“선택권이 넓어져서 더 좋아진 거 아냐?”
“그래서 골라 드셔!”
회장이란 늙은이를 만나고 그의 왕성한 정력이 젊은 사람 셋 이상의 몫을 한다며 수영에 골프에 요가까지 다닌다는 계나의 근황이 즐거움으로 장황했다. 여자로 산다는 건 젊은 한 때, 전성기에 오른 자신의 몸을 갈아넣어 정확히 내 것을 확보할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에게는 대상이 누가 되었든 간에, 나이 고하를 떠나 있었고, 직업 위신도 역시 크게 관련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받아들여 삶을 평안하게 유지시켜주면 그만이었다. 계나에게 그것은 남편 모르게 산더미처럼 불어난 빚청산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그나마 젊음의 때를 한번 놓쳐버리면 남은 인생은 그야말로 회북불가의 나락이 기다린다는 불안을 가슴 한쪽에 눌 안고 살았다. 계나가 강조하는 요체는, 영숙이 늘 우리에게 강조하던 뒤웅박 팔자 여자 신세는 시들면 끝이라는 화초론의 핵심이었다.
그 와중에 은희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우리 중 가장 표가 나지 않는 외모와 말주변을 지닌 애였다. 공직생활을 오래 하면서 한 기관의 기관장으로 승진할 기회가 코앞에 닥친 유능한 남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에 발을 뻗어야 할지 잘 알고 처신하는 친구였다. 아이들도 다 컸고, 모든 게 완숙되어 가는 집안이었다. 자신의 무기력을 제외하고 무탈하고 건강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가 서로 공개된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 즉 겉보기가 그렇다는 얘기다. 한 번은 영숙이 나에게 전화해서 이런 놀라운 얘길 들려줬다.
"은희 있지, 고 얌전한 년, 부뚜막 같은 년."
한참을 깔깔대고 영숙이 웃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궁금하네."
나의 끈 풀기 식 대화법이 나왔다. 궁금한 것은 나도 못 참았다.
"고게 말이야, 딱 걸렸지 뭐야. 경화하고 쏙닥거려서 나 모르게 그 남자 있지? 계나 죽고 못살던 그 남자."
"나하고 잤던 그 남자? 지금도 계나가 생각난다던데?"
"아휴, 고 쌍년! 영감태기랑 잘 안 되나 보지?"
"말이 그렇단 거지, 그 남자가 왜? 경화가 또 죽자고 덤벼?"
"그게 아니고, 은희가 그 남잘 만났대지 뭐냐? 글세?"
"뭐? 그 남잘 은희가?"
나도 놀라웠다.
"뭐야, 남자 하나를 가지고 계나랑 나, 경화랑 은희 다 돌린 거야?"
"아이, 그게 아니고, 그 남자가 또 다른 남자를 은희에게 붙여줬다는 거야. 새끼쳤다는 거지. 해달라고 경화한테 애걸을 했다지 뭐야?"
"잉? 언제부터?"
"한 일 년 됐나 봐. 내가 한국 못 나간 사이에 그렇게 됐다니까."
은희는 조신하게 보이는 반면 질투가 심한 애였다. 이중성을 지녔다고 할 만큼 겉과 속이 달랐다. 영숙이도 나도 은희가 하는 말은 다 믿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말 속에는 분명 전혀 다른 의도나 사실이 들어 있기 일쑤였으니까. 아니라면 맞는 거고, 맞다면 아니라고 보는 게 맞을 정도로 겉과 속이 다른 아이였다.
대학에 막 입학해서 스무 살이 막 지나고 있을 때부터 우리 다섯은 나이트를 줄곧 함께 다녔다. 당시는 원나잇을 하기가 겁나고 두려워 서로 눈치를 보던 시절이었다. 새벽에 신촌사거리에서 각자 집으로 헤어질 때였다. 우린 뒤쫓아 나온 남자들을 모두 뿌리치고 버스정거장 쪽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유독 은희를 쫓아 나온 남자 하나만이 끈질기게 따라오며, 은희에게 추근거렸고, 영숙이 신경질을 내며 그 남자를 밀치며 그만 가라고 면박을 주었다.
결국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영숙이와 내가 같은 방향, 경화와 계나 그리고 은희가 같은 방향이라 두 패로 갈라졌다. 우리가 먼저 택시를 타고 신호를 막 건넜을 때, 택시기사가 자긴 그쪽으로 안 간다며 차를 세워 버렸다. 할 수 없이 우린 택시에서 내려 다른 택시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짜증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한 표정으로 로터리 건너편을 쳐다보았을 때, 놀랍게도 은희가 그 남자와 같이 서있는 게 아닌가. 영숙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동시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딴 애들은?"
놀라운 일이었다. 같이 있던 둘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낸 것이었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셋이 서 있으면 택시가 안 잡힌다고 같은 데서 내리는 너희들 둘이 붙어 있고 자기 혼자서 택시를 잡겠다며 아래로 내려갔다는 거였다.
어쨌든 영숙과 나는 논란 눈으로 조신한 은희로부터 그 남자를 퇴치시켜 주기 위해 신호등이 파란불이 되자마자 그 긴 사거리의 건널목을 뛰었다. 연세대학 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그들을 뒤 쫒아 달렸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달려간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은희는 순간 신촌 책방 골목 안으로 사라졌고, 우린 또 그녀를 따라 급히 골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은희를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한 그 남자가 모텔의 유리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걸 안타깝게 목격했다. 영숙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은희야!"
나는 순간적으로 영숙의 입을 틀어막았다.
"놔 둬, 하고 싶었나 봐."
동그란 눈을 뜬 영숙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눈을 껌벅이며 몸에 힘이 풀렸고, 분노와 놀람, 다급함에서부터 풀려나 평온하고 온화한 상태로 돌아왔다. 야생의 살쾡이 한 마리가 잘 길들여진 집고양이로 변해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린 모두에게 솔직해졌다. 최소한 남자와 자고 싶다는 의사소통은 자유롭게 하는 사이가 되었고, 우리의 20대가 다 지나가도록 켜켜이 내려 쌓인 시간의 먼지처럼 우리들의 비밀도 두텁게 쌓여갔다.
12시가 넘어가면서, 여섯 번째 맞는 밤이 되었다. 엊그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로 영숙이 원나잇 어드벤쳐에 대한 미련을 접고 두베드 룸을 잡았다. 나를 위로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 일정, 아침 8시까지 상기가 호텔주차장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가야할 곳이 있다고 마지막 날은 시간을 비워뒀으면 좋겠다고 상기가 요청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감당해야 할 마지막 일정이었다.
"우리 영감이 전같지 않아."
"코너 자리 하나 나서, 이번에 입점시켜 줄 수 있다는데 그냥 정리하고 들어올까?"
"걔가 자꾸 1박 하러 동해에 한번 가자는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네. 가는 건 문제가 없는데, 내가 조절이 안되면 어쩌지? 이런 걱정도 되고..."
"사실 그 사람이 사람만 좋았지, 힘을 별로 못 썼거든.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속만 썩었는데 그 사람이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요새 너무 좋아."
각자의 남자들에 대한 뒷말들을 풀어놓으면서, 나도 그들의 말 속에 한 마디 보태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이제 상기랑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철호씨랑은 한국 남편으로 지내기로 했고..."
네 명의 쌍년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진정한 쌍년의 얼굴을 우러르듯 이미 저 멀리 앞서 가고 있는 자신들의 미래를 쳐다보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경과 우수로 가득 차버려서 거짓말 할 수없는 그녀들의 착한 눈동자들이 내 눈에 모두 발각된 채로, 그녀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끝의 눈빛과 추파를 나에게 던져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