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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민지

by 별사탕

친환경적 요인을 적용시켜 발주해야 한다는 까다로움 때문에 경기 북부의 군청 직원들을 만나야 할 일이 빈번했고, 그러면서 공무원들을 만나 허가사항에 대해 적시해야 할 부분들을 꼼꼼히 체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춘천으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이기도 했고, 더 넘어서 화천으로 들어가 숨기에 좋은 기점이 청평사업소였다.

청평 사업소에 나와 있었다. 기술팀의 김천성 과장과 경리과 직원 박유라와 함께였다. 처음 예상은 3일간이었지만 지역민들과의 간담회가 갑자기 마련됐고, 그 때문에 군청직원들에 대한 접대가 길어지는 바람에 김 과장에게 일을 맡기고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일개 과장이 그것도 기술팀 업무를 보는 과장에게 정치를 시키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래서 김 과장을 먼저 본사로 돌려보냈고, 비용처리를 위해 박유라가 스스로 남겠다는 형식을 취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박유라는 자신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할지 늘 한 발 앞서 가는 아이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강원도 고성까지, 더 이상 갈 수 없는 오늘 이후의 일정을 벌써 머릿속에 다 넣고 한 말일 수도 있었다. 최소한 3일 걸리고, 돌아오는 것도 하루 만에 오지 못할 거란 계산, 영특한 아이였다. 한 번의 경험은 없던 길을 내고, 새로운 길까지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홍상수가 만든 영화 강원도의 힘도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일상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고 투박한 길, 없던 루틴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한번 만들기가 어려운 길은, 이후에 루틴으로 정착된다는, 계급장 다 떼어버리고 드러난 지극히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현실이었다.

박유라에게 숙소 1박을 연장하게 하고, 설명회 현장으로 오라고 한 뒤 나는 차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30분, 시동을 걸고 설명회가 있다는 마을 회관 쪽을 바라보며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단순한 길, 도로에 접어들어 우회전, 군청 쪽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마을 쪽으로 접어들면 멀리 을씨년스러운 산 밑에 모여 있는 집들이 보인다. 10분가량 걸리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박소장입니다. 보내드린 사진 몇 장 확인 바랍니다. 아직 신원 확인은 못했는데 김철호교수의 집에서 자고 나온 여자가 동영상에 찍혔습니다. 혹시 아는 분인지 해서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나는 박소장이 보낸 문자를 찍고 파일을 다운했다. 화면에 크게 사진이 뜨면서 여러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중년의 여자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무엇보다 올백으로 뒤로 묶은 노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단단한 내면을 가졌을 법하면서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우아함까지 갖춘 외모에서 풍기는 수준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였다. 거실에서, 마당 주차장에서 여러 장의 사진이 찍혔고, 그중에는 줌으로 당겨 클로즈업된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다른 여자가 한 장 찍혀 있었는데, 나는 그 사진에 시선이 갔다. 낯익은 모습이었다. 젊은 여자였는데, 버버리 깃을 올려 세우고 김철호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사진이었다. 그녀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두 다리를 완전히 덮은 브라운색 버버리를 입고 있었다. 얼굴이 작다는 건 선글라스 크기를 보아 알 수 있었고, 얼굴이 하얗다는 건 선글라스가 검은색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나이 든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고, 이 젊은 여자는 누구요?"

"예, 그날 아침에 찍힌 사진 중 하난데, 혹시나 해서 드린 겁니다. 그날로 김철호와 동해로 동행한 젊은 여자 있죠? 그 여자의 사진입니다."


박소장이 자료를 보내는 이유는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조사할 거리가 발생했고, 그 결과는 기대할 만한 수준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사진에 찍힌 이 여자들과 김철호, 나는 한참을 생각하면서 내가 김철호의 사생활을 밝혀 내서 내게 생기는 이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결국 김철호의 약점을 찾아낼 것이고, 그 약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또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미 이혼했다고 했고, 학교 또한 휴직중이라고 했으니, 즉각적인 보복이라든가 가해나 피해를 줄 수 있는 거리가 없었다.


"나이 든 여자는 관심 없고, 이 젊은 여자가 왠지 걸리는데..."

"차적조회만 하면 신원 확인은 금방 될 겁니다. 아시겠지만 그게 건당 비용이 발생을 합니다만..."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에게 200을송금하고 문자를 전송했다.


'비용 신경 쓰지 말고, 조사 후 일단락된 결과 중심으로 보고 할 것!'


박소장은 짧은 문자로 답했다.


"넵!"


마을회관에서 오전 일정을 소화했고, 오후에는 박유라와 호텔방에서 소일하다가, 저녁이 되어 군청직원들의 모임에 얼굴을 비추고 몇 잔 술을 마시고 어두워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유라에게 자리 계산을 시키고 팀장을 내차로 데리고 들어가 봉투를 건넸다.


"성공여부와 관계없습니다. 이건 남들 다하는 인사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은밀한 거래, 이런 것은 이득을 서로 분배하는 행위다. 비용에 추가한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일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으로 지출된 비용이든 모든 비용은 원가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상대가 하는 방식에 따라, 예를 들면 투여된 기계에서 발생하는 에이에스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건 자잘한 글자로 계약서 세부사항에 적시되어 있고, 담당 직원의 성실한 답변과 과감한 시행으로 사후 경비의 형태로 빠짐없이 정당하게 청구되는 것이다. 모든 게 계약에 의한 합법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의 법제도를 철저히 믿는다. 법이 보호하는 계약은 신용을 낳고, 따라서 신용은 법이 만들어 주는 보증서와도 같은 것이다.


"사장님..."


박유라는 밖에 나오면 날 사장이라고 불렀다. 특히 남들 앞에서 부르는 호칭은 내 위신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하는 사람들의 지위까지 높여준다. 그래서 특별한 관계임을 스스로 과시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처세 호칭인 셈이었다. 영특한 박유라였다.


"차에서 기다릴게요. 체크아웃 끝났어요."


이제부터 박유라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말했다. 술을 마신 나를 대신해 운전하겠다는 뜻이었고, 이제 춘천으로 넘어갈 시간이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자기와 놀아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의지를 실눈 속에 감춘 채 박유라가 맞은편에서 일어섰다. 박유라와 동행한다는 건, 일사천리를 뜻했다. 모든 일정이 거침없이 매끄러웠고, 그런 스타일은 나를 안심시켰고 편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속의 혀가 된다는 말은 아마 박유라를 두고 한 말인 듯싶었다.


"오늘은 춘천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기 전에 우선 강변? 아니, 어디보다 어떻게?"


그녀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장소가 정해지는 건 방법이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벽 위에 서있는 모텔, 모텔촌을 내려다보는 높이의 모텔, 바닷가 호수 같은 물가의 모텔, 무인지경의 산속에 자리한 휴양텔까지 장소가 달라지면 방법도 달라야 한 다는 걸, 그녀가 제공하는 일종의 룸서비스 같은 이벤트들이 심장을 박동케 했다.


"한 3일 푹 담그고 오자... 피곤하네."


생각할 게 몇 가지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아까 본 사진의 여자가 자꾸 걸렸다. 나는 박유라의 스커트 사이로 드러난 다리 위를 쓰다듬으며 조수석의 등받이를 뒤로 내렸다.


"알았어요, 고성으로 바로 쏠게요. 막 잡은 오징어에 고등어 회 한 판 뜨자고요."


올라오는 술기운에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으로 꿈속을 헤맸는지 박유라가 나를 흔들었다.


"전화 왔어요."


눈을 뜨자,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는 박유라의 손이 보였다.


"그 젊은 여자 신원조회서 보내드렸습니다. 지금 바로 보셔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전화드렸습니다."


박소장이 보낸 서류를 다운로드하자 이력서 같은 양식의 pdf파일이 하나 뜨고, 거기엔 내가 잘 아는 여자아이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누구야?"


순식간에 박유라가 내 손의 핸드폰을 나꿔채 갔다. 박유라의손안에서 내 딸, 민지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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