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색 커튼이 밖에서부터 희미하게 밝아 올 때까지 마영길은 박유라를 괴롭혔다. 마영길의 움직임에 따라 박유라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그 때마다 박유라는 있는 힘을 다 해 마영길을 끌어 안았다. 박유라의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압력의 무게는 그녀 자신이 바닷가 거대한 바위에 붙어사는 조개껍데기 같은 존재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그만큼, 마영길은 박유라의 어떤 위로로도 달래지지 않는 철갑같이 단단한 육질을 가지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덤벼드는 마영길을 응대하며 조금씩 지쳐가던 박유라는 머리밑이 흥근하게 땀에 젖어 온 몸이 축 늘어졌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마영길의 배 위를 미끌어져 내린 그녀는 그의 옆으로 허물어졌다.
"오늘따라, 왜 이래요?"
'날것의 생선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있지, 그걸 너에게서 듣는 거야. 그 소린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거든'
마영길은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걸어 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인 마영길이 베란다 문을 열자 춘천의 밤바람이 솨하는 소리를 내며 번드르하게 땀으로 젖은 마영길의 몸을 스쳤다.
"물 마실래요? 얼음물?"
박유라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커튼을 젖히고 발코니 밖으로 나간 마영길에게 물었다. 창밖의 검은 밤 배경 위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자신의 상반신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 너머로 마영길의 벗은 몸이 창문 하나 전체를 차지했다. 마영길은 팔을 뻗어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서서 도시의 어딘가를 내려다 보는 듯했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공지천 개발을 타고 들어선 강변의 아파트며 산책로들이 야간 조명을 밝히고 있었고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적과 고요가 눈앞에 펼쳐졌다. 멀리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불빛을 내지르며 도시외곽을 가로질러 아련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박유라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담고 그 위로 생수를 부었다. 욕실 문에 걸린 자신의 샤워 가운을 걸쳤다. 마영길의 가운을 팔에 걸고 한 손에는 방금 따라놓은 물컵을 들고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여기, 물..."
말없이 컵을 받아 든 마영길이 단숨에 들이켜자 빈 컵 속에서 얼음들이 부딪치며 달그락 거렸다. 컵을 받아 든 박유라가 팔에 걸린 샤워 가운을 내밀었다.
"됐어, 시원하고 좋아."
"감기 걸려요, 강원도 밤공기예요."
멀리 아래 쪽에서 벌써 산책하는 사람이 한 둘씩 점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다시 내민 가운을 마영길이 받아서 팔을 꿰며 입는 시늉을 했다. 박유라가 컵을 방 안쪽 바닥에 들여놓고, 그의 가운을 뒤에서 잡아 주며 팔을 넣을 수 있도록 가운의 어깨를 내려주었다. 마영길은 손에 쥔 담배를 바꿔 들며 가운에 팔을 끼워 넣고 옷을 바로 입었다. 그의 뒤에서 박유라가 허리를 감으며 안았다.
"나, 임신하면 안 돼?"
마영길은 생각 중이었다. 혜연과 민지, 아내와의 관계는 지금이 최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파트너가 있고, 그것에 서로 터치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 인해 혜연이 2년을 앓았고, 지금 거의 완치된 상태에서 일탈을 일삼고 있다는 것, 사실 그건 남자들이 2년에 한 번 여자를 갈아 치는 것과 다름없는 흔한 일이라고 접어두었다. 성격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들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것도 마영길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데는 생활의 유지를 바탕으로 했다. 그걸 깬다면 가정이 깨지는 것이고, 가정이 깨지면 가족 역시 깨진다. 그렇게 가정과 가족이 깨지면, 마영길이 누리고 있는 이런 안정된 사치 또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건 마영길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혜원 역시 그럴 것이다. 현재의 모든 걸 그대로 놔두고, 최대한 각자의 삶을 향유한다는 동의, 거기에 어떤 마도 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지막 과정을 겪어냈고, 지금 최상의 상태와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했고, 그걸 변함없도록 유지하는 것만이 마영길이 생각하는 행복을 이어나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딸아이의 남자관계가 가족의 문제와 엮이게 된다면, 그건 지금까지의 노정에서 생긴 문제를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영길 자신도 두 번이나 그런 꼴을 용납하지 않으리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허락받기 위해 내준 이기적인 합의 조건이었다. 균형 잡힌 최소한의 허용, 너도 남자를 가져라, 그래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내에 대해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들 엄마로서도 마영길이 품은 존중과 사랑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여성편력을 합법화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내 아내를 가져간 놈이라는 분노와 질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것을 가져간 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신념을 마영길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영길은 그런 면에서 옹졸함을 드러내기 싫었다. 서로 대등한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베풀어주는 관대함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두 번이나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딸 민지에게였다. 이건 마영길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리는 일이었다. 한 남자에게 두 번이나 당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자신감이 넘치는 마영길이라 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사건이었다.
"안 돼!"
마영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단호한 말투가 튀어나와버렸다.
"나 데리고 살란 말은 안 할 테니까, 당신 닮은 아들하고 살고 싶어."
마영길은 뱃속 깊은 곳에서 숨을 끌어올려 밖으로 내뱉었다. 등을 돌려 난간에 기대자 박유라가 그의 품에 안겨들어왔다.
"아들 데리고 외국 나가서 살게."
마영길은 담배를 입에 물고 베란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그러다, 아예 사라진다."
박유라는 그럴수록 마영길의 품을 파고들었다.
"기다릴게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스물다섯이었던 지난 10년 전부터 박유라는 마영길의 여자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여자가 가진 직감으로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들의 정보를 수집했고 예상 수위에 도달했을 때 마영길의 주변에서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때마다 마영길 부인의 이름을 팔았다. 마영길은 지금도 그의 아내가 자신의 여자를 정리한 줄로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해외에 있는 현지처들을 정리하는 일이 시간적인 측면에서 공이 들어갔다. 통화내역 조회는 쉬웠다. 마영길은 현지에 내린 순간부터 회사에서 지급한 해외 통화폰을 전적으로 사용했다. 현지에서 붙은 통역이나 접대를 통한 유흥 정도는 다반사였지만,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번호를 체크했고 그들이 마영길의 현지 숙소를 제공했다. 해외에 나가도 돌아가서 쉴 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아지트 하나씩을 현지에 숨겨두는 사람이었다.
"이제 곧 서른다섯이야. 내년부터 난임기야. 건강한 아이를 갖고 싶단 말이야."
박유라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있었지만 똑똑 끊어지는 발음이었다.
"좀 자둬. 내일 휴게소에서 아침 먹고 바로 올라갈 거니까."
박유라가 시계를 보기 위해 반사적으로 팔목을 들었지만 거기엔 시계가 없었다. 방 안쪽에 어질어진 침대 위로 마구잡이로 뭉쳐 구겨진 이불이 보였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이 보였다. 이불속 어딘가에 속옷이 숨겨져 있을 거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고, 협탁 위에 두 사람의 핸드폰이 올려져 있고 한쪽에 그녀의 핑크컬러의 베르사체 시계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방 어디에도 시간을 알 수있는 시계가 없었다.
발코니 문을 닫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끈 마영길은 다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내일 일정을 확인하고, 눈을 좀 붙이려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짧은 진동 알림이 울렸다. 다시 핸드폰을 얼굴 위로 올리자 화면이 나타났다. 김철호가 연재하고 있는 웹플랫폼의 알림이었다. 찜해놓은 작가가 글을 올렸을 때 울리는 알림이었다.
마영길은 반사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김철호가 올린 글을 읽었다. 그가 새벽에 올린 소설의 첫 챕터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헤어져 사무치게 그리운 여자를 다시 안는 기쁨은 내 모든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가 내게 그랬다. 잃었던 감각을 다시 깨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포항의 바닷가에서 처음 그녀를 안았을 때, 들창 너머로 끊임없이 들려오던 파도소리만큼이나 나를 집요하고도 반복적으로 흥분시켰다. 늙은 그녀와 어린 그녀가 이십육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마영길은 순간, 핸드폰을 쥐어짜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누운 그대로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자신을 안고 누운 박유라를 옆으로 밀어 이불 속으로 밀어넣었다. 마영길은 다시 박유라의 몸 위로 올라갔다. 박유라가 잠결에 마영길을 끌어안자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충동이 무섭게 마영길의 피를 돌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