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가 스폰서로 끼어들면서 세미나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대한 가족계획 협회가 주관하는 한국사회 가족 전망이라는 추상적이었던 주제가 여성단체가 끼어들면서 주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주제가 투쟁적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급기야 원인과 과제라는 뒷선으로 한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여성단체와 연동된 여가부가 참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민지의 회사로 패널 참가 가능한 작가를 섭외한다는 공문을 받은 것도 여성단체들이 중구난방으로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현실적이지 못한 가족계획을 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서 그 산하단체들이 시대현실을 몰각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자 각종 인터넷 매체들의 시선이 여가부로 쏠렸다. 여가부가 주제를 일반화시켜 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세미나 결과를 정리해서 정책에 반영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마민지는 발 빠르게 대처했다. 회사의 플랫폼을 대중화시킬 수 있는 홍보수단이 될 것은 분명했으므로, 이 세미나를 계기로 북토피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는 기안을 제출했다. 거기에 따라 새로운 사회구성의 패러다임을 리드하는 작가군을 선발했고, 20대부터 60대까지 각 나이대 별 대표주자를 등장시켰다. 이들을 띄우기 위해 주제와 소재별 독자 투표, 판매율, 댓글 호응, 호감 비호감 정도에 대한 분석 등에 주력하면서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중 김철호의 소설이 다큐픽션 장르에서 정점을 찍었다. 독자들은 초기에 주작이 심하다는 냉소에서 시작해서 하나 둘 진지한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니 사생활 까면 수위 넘는다',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자 누구? 너?', '사실 인정...', '정혜는 또 다른 내 이름', '등장인물들이 왜케 다 쿨해?', '실화가 아닌 게 더 이상해', '요즘 내 주변 그대로네.' '너 주변이 아니고 너겠지', 이런 동조와 동의의 댓글로 넘쳐났다.
마민지는 극구 만류하는 김철호를 세미나 패널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거예요. 한국 사회가 가진 전근대성을 극복하는 장면이 기록되는 역사적인 현장에 선생님이 계실 거니까요."
"난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아요. 단지 사실을 전해 주려고 했을 뿐..."
"그걸 말씀하시면 될 거예요. 도덕의 잣대가 무너진 현실에 계셨잖아요."
"그렇지만 이런 사건들은 일종의 부끄러운 스캔들에 지나지 않죠."
"그럼 선생님은 대한민국 전체가 스캔들에 빠져 있다고 보세요?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나가는 당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식없이 보여주고 싶다면서요?"
"그래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건 아니지..."
"애초부터 사람들에게 무얼 말하고 싶으신 거였어요? 그냥 아내의 외도를 까발리려고? 여성편력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줘서 그들의 사생활을 고발하려고?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자신의 치부를 그렇게 맘껏 드러내신 거였어요?"
"거기엔 분명, 문학적 현상이란 부분도 있었지."
"그깟 문학적 현상이 삶의 진실보다 더 소중한 건가요? 예술을 하시려는 거였으면 이런 삼류 외설 플랫폼에 발을 담그지 말았어야죠!"
"그런 건 아니야. 여긴 자유로움이 있었어, 그 자유로움이 내 속에 있는 모든 얘길 있는 그대로 뱉어 내게 만들어줬지. 난 그게 진짜 예술이라고 생각해. 어디에도 눈치 보지 않고, 말 그대로 자유롭게 어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익명 뒤에 숨었고요!"
"난, 그게 더 두려워. 내 이름이 공식적으로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나를 둘러싼 주변의 생활들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 그다음에 올 내 삶이 어떻게 될지 두렵기까지 해."
마민지는 여기서 김철호와 함께 벽에 부딪쳤다. 결국 마민지는 '회사가 감당할게요'라고 말하고 일체의 법적 책임을 회사가 진다는 서류에 연명으로 사인을 했다. 순전히 운에 맡기겠다는 모험심을 발동시켰다.
세미나 일정이 확정되었고, 김철호는 원고를 작성해서 마민지에게 주었다. 자신이 쓴 소설에 등장하는 두 여자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사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 그리고 둘 사이를 묘하게 넘나드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반영하는 관계가 가지는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분석했다. 여성 A, 여성 B, 여성 C, 이런 식으로 그는 정혜와 혜연, 그리고 변영주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관계 맺었던 남자들에 대한 언급도 피하지 않았다.
패널들의 명패가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었고, 시작 30분 전이 되자 벌써 테이블이 차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자신을 알아보는 청중을 대비해 테가 넓은 검은 선글라스도 준비했고, 여차하면 쓰고 있으리라 마음먹고 세미나 장에 들어섰다.
김철호는 굳은 얼굴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불륜관계를 공중 앞에서 한꺼번에 커밍아웃하는 낯 뜨거운 현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별사탕이라고 써 있는 자신의 명패를 내려다보면서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왜소해지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름과 자신의 실재 모습이 조화롭지 않은 이질적인 불균형감각에 휩싸였다.
입구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마민지로부터 받은 세미나 자료집을 펼쳤다. 가족계획 협회 총무, 여성문제 연구소 소장, 복지학 전공 교수, 심리학자, 가정문제 상담 전문가, 여성인권센터, 여가부 정책 실장, 이런 두서없는 명패들이 김철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과 옆에 도열해 올라가 있었고, 그들이 제출한 원고가 발제할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패널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단상 아래 일자로 줄을 맞춰 방청석 테이블을 놓았고, 거기에 의자를 좌우 두 개씩 방청객들이 앉을 좌석을 70여 석 만들어 놓았다. 단상의 벽 위에는 '한국사회 가족 문제 -새로운 가족 개념의 등장과 대안(구속력 약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런 긴 제목의 주제가 적혀있었고, 회의장 입구에도 역시 맞은편 벽 위에 같은 현수막을 걸어 둔 것이 보였다.
좌장을 맡은 한국사회문제 연구소 소장이라는 사람이 짧게 인사말을 하면서 세미나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앉은 순서가 발제 순서며, 사회자의 별도 언급 없이 1부는 온전히 발표를 우선하고, 15분간 쉬었다가 2부에서 방청객과 토론이 이어진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방청객은 각 단체가 엄선하여 초청한 인사들로 대학생에서부터 노인 중앙회 회원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계층이 함께 초청되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마민지가 입구 쪽에 서서 김철호를 향해 주먹을 쥔 팔을 내렸다 올리는 시늉을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마이크를 옮겨가며 자신들의 원고를 읽어 나가자 어수선했던 장내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점점 신중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잡혀갔다. 여성단체 활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40대 여성이 4자로 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지난 세기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의 정신구조를 신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지난 20년간 조금도 변함 없는 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직도 여성의 목소리와 지위를 지면을 뚫고 올라오지 못하는 새싹에 비유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자유롭게 떠다니며 각종 수단을 가진 한국 남성들의 행태와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힐난했다. 그녀가 한 말 중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들은 잠재적 범죄피해자, 불안, 피해, 약자, 소수, 평화와 해방, 대결, 갈등 이런 단어들이었다.
그녀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김철호는 소설에 등장하는 불륜 소재에 드러나는 한국 중년 여성들의 행태와 의식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과거의 소설들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여성 중심, 특히 여성의 자발적 불륜을 정당화하고 더 나가 여성의 불륜이 일상화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고 2000년에 접어들면서 그것이 영화로 제작되면서 대중적 파급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는 서두로 운을 뗐다. 하지만 서양에서의 불륜은 역사가 깊을 정도로 작품의 오랜 소재로 사용되어 왔고 불륜의 스토리를 따로 분류할만큼 유서 깊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서양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비교 고찰로 주제에 접근해 갔다. 그것은 현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적 바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사회구성의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역사를 창출해냈다고 말했다. 단순한 연결 고리식으로 말하자면 체제, 즉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핵심적인 사유의 바탕을 불륜이 만들어냈다고 강조했다. 특히 여성의 자발적 불륜은 여성의 독립적 사고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사고의 확장은 약자, 소수의 연대를 불러일으켜 전반적인 여권 신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불륜은 소설의 소재가 아니라, 생활이 된지 오래라는 실재 사회현상을 자기 소설에 담게 된 이유를 김철호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또한 마민지가 당부한 북토피아에 연재하고 있는 소설을 구독하면 그런 현상을 쉽고 빠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며 여성들이 가진 의식의 전반을 받아들이고 공감하게 될 거란 말도 잊지 않았다.
엉겁결에 시간에 쫓기듯 발표를 마친 김철호는 다른 발제자들의 발표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자신의 발표가 잘못된 점은 없었는지, 원고 외로 생각나는 부분을 즉흥적으로 말한 부분은 부족한 점이 없었는지 자신의 말을 머릿속으로 따라하며 복기했다. 100미터를 달린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기 루프탑이 있어요."
마민지가 김철호를 데리고 비상구가 있는 계단을 질러 올라갔다. 마민지의 힙라인을 따라 빨간색 스커트가 반사한 불빛이 반질거리며 빛났다. 높은 굽을 신은 그녀의 에나멜 힐 역시 강렬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바깥은 벌써 밤이었다. 그 사이 두 시간이 흘렀고, 시간은 9시를 행했다.
"8층에 작은 방을 잡았어요. 요즘 도심은 방 잡기 하늘에 별따기예요. 아쉽지만 비흡연룸이에요."
룸으로 올라가 쉬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김철호는 우선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김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프탑의 구석자리로 가서 건물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허름한 집들 옆에 현대식 호텔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격심한 대조를 이루는 풍경이었다.
"저 쪽이 광화문 쪽이에요. 저기 기와가 보이죠? 그 뒤가 인왕산 줄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김철호는 자신이 걸어 들어온 루프탑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허공에 걸린 전깃줄로 적은 전구 하나하나에 불이 들어왔고, 금세 옥상은 환하게 밝아졌다. 루프탑으로 들어오는 비상구 문을 통해 여자 한 명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얼굴을 알아볼만한 거리가 되자 김철호는 그녀가 단번에 누구라는 걸 알았다.
"작가님, 이제 작가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죠?"
그녀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곧장 김철호 쪽으로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김철호는 입에서 담배를 떼어 내고, 다시 왼손가락으로 담배를 옮기면서, 자신이 저 여자와 악수를 해야 하는지 목례를 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사이 그녀가 김철호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고, 김철호 또한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흔드는 대로 팔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