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연인 잘 지내요."
마음연구소 소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넨 건 성희경이었다. 혜연보다 다섯 살이 많았으니, 김철호보다는 여섯 살이 많은 여자였다. 여전히 티 없이 밝고 생생한 얼굴로 그의 앞에 단단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과천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그럭저럭 학교나 교육청의 심리상담 업무를 맡고 있고, 방문 개인상담 일로 꽤나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근황 토크를 풀어놓았다.
"댓글을 아직도 달고 있는 걸 보니, 미련이 남았는지..."
"아,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새 친구가 생겼거든요. 어차피 산다는 게 만남의 연속이니까요."
"새 음식도 기대할 게 없다는 걸 알 나이도 된 것 같은데..."
"어머, 식도락은 아니더라도, 맛있는 음식엔 금방 빠져들죠, 누구나."
"비유치곤 좀 저렴하군요."
"금방 와닿죠, 공감도 빠르고요. 세상이 싸구려란 걸 인정하면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길 거구요."
혜연이 완전히 자신과 연을 끊었다는 걸 확인한 김철호는 루프탑 담자락의 저쪽으로 자리를 피한 민지 쪽을 쳐다보았다. 민지는 밤하늘의 어둠 속에 반짝거리는 광화문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굉장히 낯이 익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지만 좀처럼 그녀가 누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보는 없었다.
"오, 젊은 아가씨를 만나시는군요. 트렌드를 타시고..."
희경이 입술을 동그랗고 모으고 저쪽 구석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지를 의식했다.
"오해는? 제 전담 MD라고, 웹플랫폼 직원입니다. 오늘 세미나도 저 직원의 권유로 참가하게 된 겁니다. 아무래도 회사의 이익에 일조해야 되는 입장이다 보니..."
"아, 그렇군요. 작가님 글을 올리기 전에 샅샅이 검토하시는 분이라... 호기심이 발전하면 현실이 되는 거랍니다."
"소개시켜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빠르게 전달하고 전 가보려고요."
"뭘?"
희경이 빠르게 김철호에게 몸을 붙여 왔다. 고개를 꺾어 김철호의 한 쪽 어깨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김철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이 들어오도록 어깨를 내주면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희경의 입술이 김철호의 귀에 바짝 붙었다.
"세미나가 있는 밤, 그러니까 오늘 밤을 조심하래요. 절대로 혼자 있지 말라고 했어요."
김철호는 놀란 눈으로 머리를 들어 성희경을 내려다보았다. 희경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것처럼, 김철호 역시 낮은 소리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혜연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저도 자세힌 몰라요, 그렇게만 전하래요."
김철호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는 희연을 내려다 보며 가만히 입이 벌어졌다.
"전 그만 가볼게요. 저도 열렬한 독자예요. 댓글은 안 달지만..."
희경이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입모양으로 만들어 열었다 닫았다 하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김철호는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며 하얗게 변해갔다. 마민지가 저쪽에서 천천히 김철호에게로 다가왔다.
"누구예요?"
"응, 아는 사람 절친이라 소식 듣고 왔나 봐."
"초청자만 올수 있는 리밋 인비테이션이었는데, 근데, 왜?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괜찮아요."
김철호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자신을 옥죄고 있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확 느껴졌다. 애초에 이런 류의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복수심이었다. 아주 지질하고 소심한 저급한 약자의 복수. 그런 종류의 보복을 하면서 늘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소심한 처세에 불안했다. 김철호에 대해 조금이라도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야기가 비록 이니셜이긴 하지만 실명과 같은 이름으로 대중에게 그들의 사생활이 사실 그대로 공개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꾸며낸 픽션이 아니었고, 사실에 픽션을 가미해 현실을 변조한 사이비 소설도 아니었다.
김철호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이야기로 인해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순위를 매겨보았다. 첫 번째가 정혜였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다행히 이런 이야기가 한국에서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의 그놈, 그놈 역시 정혜와 마찬가지. 그쪽의 경우는 모두 제외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혜연쪽이다. 희경의 전언도 혜연 쪽에서 온 것이다. 혜연은 이러한 사실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쪽이고 경고 메시지를 김철호에게 전해 준 것이니 그녀일 리 없다. 그럼, 그녀의 남편은?
여기서 걸렸다. 김철호는 순간, 뒤통수에서 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혜연의 남편, 그가 만든 외도의 상황이 혜연을 남자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혜연의 남자에 대해 서로 인정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정리했다고 했다. 일종의 정전선언을 한 셈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철호는 점점 까맣게 변하는 공중에 걸린 전구 너머의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왜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뭔가 예감이 안 좋아서..."
"어렵게 잡았는데, 저도 함께 가요?"
아쉬운 마음에 사로잡힌 마민지는 그와 함께 있지 못한다는 텅 빈 마음으로 자신이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로 가득 채워질 밤을 기대했던 마민지의 눈동자는 김철호의 얼굴에 하염없이 머물렀다.
"차는?"
"선생님도 차 가져오셨어요?"
"아니, 난 지하철로 왔어요."
"잘 됐네요. 제 차로 모실게요."
혼자 있지 말라는 희경의 전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럴까?"
미민지는 금방 표정이 밝아지며 김철호의 팔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선생님, 커피 하실래요? 아니면 여기 베헤로프카라고 체코산 위스키를 섞은 커피가 인기 있어요. 허브향이 나서 여자들도 홀짝거리며 마셔요."
김철호는 마민지가 권하는 대로 바비카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다시 세미나 장으로 내려가 1시간 남짓 질의응답시간을 치렀다. 특별한 질문은 없었고,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정비에 국가정책보다는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방향을 시의적절하게 잘 살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그러기 위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의식의 전환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했다. 그 점에서 비록 외설적 성향은 짙지만 김철호의 소설이 가지는 의미는 크며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 사회의 가족과 성이라는 기본 질서의 두 축이 더 이상 기만적이어서는 안되며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것이 사회학 교수이자 좌장인 호스트의 결론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무리 단계에서 마지막 질문이라며 방청객 한 명이 일어나 김철호 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실명에 가까운 이름을 사용하며 등장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성생활을 가감 없이 까발린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작가의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건 익히 알겠지만, 관련 인물들을 끌어들여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해 먹는 건 진정한 작가로서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생활을 돈벌이 수단으로 써먹는 건 어느 나라 상도덕인가요? 이런 사람을 우리가 작가라고 불러야 하나요?"
사회학 교수가 마이크를 들고 발언을 제지했다. 더 이상 나갔다가는 김철호 개인을 성토하는 자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에니 아르노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죠, 예, 프랑스 여류 작가입니다. 그녀가 쓴 모든 글이, 그녀가 직접 겪은 사실을 그대로 쓴 것들입니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좋은 전범이 되는 작품이라 생각이 들구요. 그분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그녀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 포인트에서 문제는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태도와 자세, 예, 문학적 풍토, 문화적 토양 이런 게 필요하다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적하신 문제가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우려 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가가 아프로 이루어 낼 문학적 예술적 성취 부분에 더 초점을 가지고 보시면 불편하신 점이 조금이나마 해소 도리라 봅니다. 이미 시간이 다 되어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면서, 오늘 세미나, 토론을 마치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관계자 방청객들께 유익한 시간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여성부 관계자들께서도 유익한 점을 정책에 녹여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하며 오늘 이 자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김철호는 떨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 덩이 숨을 삼켰다. 동시에 사회자에 의해 안정적으로 마무리되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이었다. 성희경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혼자 있지 마세요.' 속으로 이 말을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 방척객 너머로 마민지가 손가락을 바닥을 찍으며 입모양으로 뭔가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다시 검지를 들어 보이며 김철호에게 손가락을 내밀듯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일어나는 사람들 속에서 회사에서 만든 팸플릿을 챙겨 들고, 핸드백 끈을 한 손으로 잡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1층에서 내렸고, 그중 몇 명이 지하로 내려갔다. 김철호도 그 몇 명 중에 끼어 있었다. 좀 전에 마민지가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낸 지하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앞에 마민지가 웃으며 김철호를 맞아 주었다.
둘은 곧장 마민지의 붉은색 차로 걸었다. 김철호는 자신들의 구둣소리를 의식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불안하세요?"
"뭔가 예감이 안 좋아. 아까 그 마지막 질문자..."
"왜요? 안면이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불길한 인상이야."
짧은 머리의 그 사내는 아래위 한벌의 슈트를 입었고, 그 속에 든 체격은 단단해 보일 정도로 다부지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만만찮은 상대라는 뜻의 눈빛도 가지고 있었다.
"걸리네, 자꾸..."
차에 타면서도 김철호는 그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그 눈빛은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자신에 찬 눈빛이었다.
지하주차장을 벗어나 광화문 도로에 오른 차는 금화터널을 지나 연세대학 앞으로 내려갔다. 모래내 고가에 오른 차는 금방 수색역을 통과해 김철호가 사는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올랐다.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차 몇 대가 갓길에 주차된 것을 뒤로하며 마민지의 차는 김철호의 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김철의 차가 마을을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안쪽에 주차되어 있고, 그 옆에 마민지는 그녀의 차를 갖다 댔다. 마당이 꽉 찼고 비좁은 차들 간의 간격 사이로 마민지가 나오는 사이 김철호는 내려 마당 앞으로 나와 마을 쪽을 내려다보았다.
'CCTV를 달아야 하나'
왠지 모를 불길한 생각에 잠긴 김철호의 눈에 멀리 아랫마을이 유난히도 고즈넉하게 보였다. 그 사이 마민지가 대문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생님, 문..."
김철호는 마민지 쪽을 돌아보았다.
"참, 내 정신..."
김철호는 대문 쪽으로 걸어가 마민지 앞에서 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기계음을 내며 문이 열리자 마민지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며 뒤 따라 들어간 김철호가 벽체에 붙은 스위치를 올리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이 밝아졌다. 식탁과 의자들 싱크대 2인용 작은 소파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모든 게 그대로인 안정된 모양새들이었다. 김철호에게 변함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58분, 거의 열 시였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마민지가 식탁 위에 백을 올려놓고 앉아 김철호를 올려다보았다.
"민지 씨가 없었으면 이런 일을 할 수나 있었겠어요?"
"선생님, 언제까지 저한테 존대하실 거예요? 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 그래, 그랬지. 습관이 돼서 말이야."
마민지는 웃으며 일어났다.
"먼저 씻을게요."
마민지가 건너편 욕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김철호의 집에 온 것은 두 번 째였다. 처음에 당돌하게도 밀고 들어온 그의 집은 낯선 만큼 무서웠다. MD로서의 업무적 한계를 넘어선 요구를 김철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요구가 육체적 관계에 대한 요구였다는 점에서 마민지는 심각한 장애를 상대방에게 내비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인격적으로 치명적인 사건을 저지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이로보나 연륜으로 보나 큰 격차가 있는 관계였다. 어쩌면 일면식도 없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몸을 바친 셈이었다. 그만큼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세상은 마민지가 알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었다. 단지 그걸 알고 싶었다는 호기심이 작용했고, 그쪽으로 넘어가고 깊은 충동이 커지면서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도 깊어갔다. 그리고 뭣도 모를 어릴 때 경험한 성적 이질감이 지금에 와서 남자친구에 대한 이질감으로 작용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건 심각한 질병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고, 그걸 이겨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신의 욕욕망이 클수록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은 더욱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그때 김철호의 소설을 맡게 되었고, 그의 판타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마민지는 샤워기를 틀어 물의 온도를 맞추어 놓고 옷을 벗었다. 겉에서부터 하나씩 벗어 수건걸이에 빨래 널듯 걸어두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얼굴을 샤위물 속으로 들였다. 따듯한 물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얼굴을 때린 물들이 그녀의 목을 타고 몸으로 흘렀다. 세찬 물줄기는 가슴골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가슴이 앞으로 솟구치며 물을 받으며 사방으로 물방울들이 튀어나갔다. 등을 돌려 목으로 물을 받았고, 다시 앞으로 몸을 숙여 등으로 물을 받았다. 자신이 벗어놓은 옷들이 수건걸이에 차곡차곡 쌓인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열린 욕실 문 밖으로 김철호가 거실 통창을 통해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거실의 불빛 때문에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창에 비친 자기의 모습만 보이리라고 마민지는 생각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묶은 뒤 마민지는 샤워물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내려치는 샤위기의 물줄기에 얼굴을 갖다 대고 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눈앞이 까맣게 변하면서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팔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물을 받았다. 마민지의 목표물은 김철호였다. 어떻게 하든 그와 하룻밤을 온전히 보내고 싶은 것이 마민지의 전부였다. 그날도, 그날도, 문무대왕릉 앞에서부터 토지 문학관까지 이어진 여정, 그 후 통영 순천 여수 목포를 이어 서해안을 타고 올라온 그 여정까지 마민지는 김철호를 잊을 수 없었다. 너무도 편안한 요람과도 같은 시간들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그 밀폐된 요람은 그래서 더 강렬한 기억으로 마민지의 정신에 녹아들었다. 어떤 것도 그 이상의 강렬한 인상은 더 이상 없었다.
마민지가 김철호의 생각으로 온몸을 적시고 있을 때, 김철호가 성희경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 바로 그때였다. 와장창, 잔잔한 빗소리 같은 샤워기 물소리가 배음으로 깔리는 백색 소음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귀청을 찢었다.
"뭐예요?"
두 사람은 발작하듯 동시에 연쇄적으로 움직였다. 마민지는 소리에 놀라 벌거벗은 채 욕실 안에 붙어 김철호가 있는 거실 안을 내다봤고, 김철호는 소리가 난 방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침실 방의 창문이 깨졌고, 침대 턱에 맞아떨어진 물체가 바닥에 고스란히 놓인 것이 보였다. 마동도 없이 멈춘 그것은 어떤 생명체도 아니었다. 달걀 모양의 금속갭슐이었다.
김철호는 깨진 유리 밖을 내다보았다.
"뭐야? 누구야?"
다급한 절규 같은 목소리가 김철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밖은 깜깜한 어둠뿐, 어떤 형체도 없었다.
창문에서 떨어진 김철호는 깨진 유리를 피하며 바닥에 떨어진 회색 알루미늄 캡슐을 집어 들었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사이즈였다. 손 안으로 묵직한 무게감이 드는, 군대에서 던져본 세열형 수류탄 같다는 느낌이었다.
이미 바깥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걸 안 김철호는 재빠르게 거실 불을 껐다.
"욕실!"
욕실 앞에 서서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서있는 마민지를 향해 김철호가 소리쳤다. 얼른 몸을 돌린 마민지가 스위치를 눌렀고, 이내 집안은 적막에 싸여 깜깜하게 변했다. 두 사람이 벌린 입속에서 고요가 멈추어 선 것 같았다.
김철호는 한 손에 쥐고 있던 캡슐을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고, 현관 입구에 서 있던 야구배트를 두 손을 모아 힘껏 거머쥐었다. 그리고 스마트키를 풀고 천천히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나가지 마세요!"
마민지가 낮게 소리쳤다. 얼른 마민지 쪽을 돌아본 김철호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갖다 대고 입 다물라는 시늉을 했다.
조금씩 열린 현관문 밖의 어둠이 눈에 익으면서 시야에 들어왔다. 주차된 두대의 차 보닛이 커다랗게 보였고, 한번 더 열어젖힌 문 사이로 두 대의 차가 전모를 드러냈을 때, 차와 차 사이에 어떤 물체가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김철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냐? 어떤 새끼야?"
김철호는 속에 있는 두려움을 끌어올려 악을 썼다.
어둠이 말하듯, 하나의 목소리가 천천히 어둠 속에서 흘러 나왔다.
"그 여자와 자면 내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단지 이 말을 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