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둘리지 마。”
세상은 자기중심의 바다였다。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자아가 존재했고、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모두 자기중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그들을 피해 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역시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었다。 인간은 모두 자기를 위해 생존하는 거니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우리。감추고 빼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자존심도 창피함도 자신이 못나 보이는 것도 그냥 그대로 인정해 보자는 거야。”
다니엘은 다시 차분해졌다. 내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아 버린 이유도 있었다。감정에 휘둘린다는 건、아직도 감춰야 할 자아、숨겨야 할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여기까지 왔다는 우리 둘의 사실 관계로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뿐、그 무엇도 우리의 모습을 가리거나 덧씌워 미화하진 못할 것이다。 그게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라는 사실을 빨리 인정하는 것、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규정하고、그에 따라 우리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서울에서 상기와 잤어。”
나는 눈을 깔고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와인잔의 스템을 쥐고 있는 다니엘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고 다니엘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자지 않겠다고 약속은 할 수 없어。 그건 사실일 수 없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내가 장담은 할 수 없다는 얘기야。그렇다고 내가 당신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다는 얘기는 아니야。상기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왔으니까.”
“무슨 궤변이야? 결혼은 나하고 한 거지 그 사람이랑 한 게 아니잖아。”
"결혼이 서로의 성관계까지 규정짓는다고 생각해?"
"그래야지, 규정지어야 결혼이 성립하는 거 아니었어?"
"그건 법이 임의로, 법의 잣대로 인간이 만든 거에 지나지 않아."
"인간의 규칙이라는 거잖아? 그럼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난 그 규칙에 동의한 적이 없어? 당신은 동의했어? 언제?"
"결혼 서약에 포함된 사실 아냐?"
"아니지, 그런 건 법에 명시되어 있겠지, 배우자에 대한 의무조항 같은 거. 난 그 법에 내 이름을 걸고 동의한 적이 한번도, 단 한번도 없다는 거야."
"그럼, 동의하지 않은 당신은 사사건건 법을 죄다 무시하며 살아도 되는 거야?"
"나의 천부인권과도 같은 자유의지를 법이 막을 수는 없단 얘기니까, 법감정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봐. 법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보면 안 될까?"
"제발, 법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거야."
이야기가 헛돌았다.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가 괜히 복잡해졌고, 헤어날 길이 없는 평행선을 그리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외도에 대한 합리화거나 욕망이나 욕구에 대한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말싸움이었다. 누군가는 순결한 도덕군자이고, 누군가는 더러운 창녀가 되어버리는 꼴이었다.
"현실을 똑바로 보란 말이야. 내가 하는 말은 다 현실이야."
나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물체의 현존을 상기시켰다.
"여기, 그리고 여기! 저길 봐, 아름다운 노을, 이제 어두워질 하늘 이런 것들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란 말이지. 인간의 관계도 현실이 아닌 게 없어. 우리 현실은 여러 남자와 여러 여자들이 얽혀 있는 게 현실이고 사실이란 얘길 하고 있는 거야. 그걸 부정할 수 있어?"
"적어도 난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자고 오지는 않아!"
"그게 나 때문이야? 왜 그런 걸 지키는 것 같아? 내가 가정을 깨고 널 비난할 까봐서? 그게 무서워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당신은 진짜 당신 마음을 숨기고 싫다고 한 거야. 후한이 두려워서... 뭐가 두려워? 내가? 내가 할 말이? 당신이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머리에 각인될까 봐?"
다니엘은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잔에 철철 소리를 내며 술을 따랐다. 와인잔 속의 술이 출렁거리며 내 눈을 흔들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리고 세상엔 눈앞에 놓인 사실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야. 뭐가 두려워?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 내가 겁나는 건 딱 하나야, 내가 거짓말하는 것, 내가 내 감정을 감춰야 하는 것, 상대에게 나를 속이는 것. 난 제발 이 세상이 이런 사실을 인정했으면 좋겠어. 당신도 마찬가지야. 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당신은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할 뿐이야. 지금은 그게 맞다고 우기는 거에 지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알게 될 거야. 사랑은 오랜 시간 속에서 빛나는 거라구, 진흙에서 빛나는 진주 같은 거야. 난 그런 사랑을 당신에게 주고 싶은 거야."
"받고 싶은 게 아니고? 그건 위선이야, 지금의 감정과 사실을 무시한 채 즐거움만을 좇아 가는 거야."
"내가 쾌락에 빠진 거 같아? 내가 욕구해소가 필요한 거 같아? 날 그렇게 천박한 여자로 봤어?"
사실, 내가 하는 말들은 그런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실선 하나 차이로 안과 밖이 구분된다. 선을 긋고 여긴 안이고 저긴 밖이라고 구분 짓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경험에 매몰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였다. 선은 선에 불과한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원래 선은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안과 밖도 따로 없었던 것인 걸, 애초에 원래란 것도 없었을 수도 있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그것도 심하게 편협하게 만들어 놓은 규칙이었다. 그 테두리 속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다니엘 앞에서 그걸 부정했다. 그런 나를 다니엘은 부정하다고, 그래서 욕구로 가득 찬 천박한 여자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울어?"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 손등 위에 툭 떨어졌다. 커다란 바윗돌이 하늘에서 굴러 떨어져 지구 위에 쿵 하고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가슴을 울리고, 그렇게 울린 소리는 목구멍을 타고 또 다른 울음으로 밖으로 새어 나왔다.
쇠잔해진 느낌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숄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우린 이 간극을 채울 수없을 거 같아."
"아니! 채울 수 있어! 아니! 이건 간극이 아냐. 그냥 생각의 차이일 뿐이야. 무지개의 스펙트럼처럼 하나의 무지갠데 그 속에 색깔이 다를 뿐이라구. 당신과 난, 그저 색깔이 다를 뿐이야. 더 큰 그림을 봐, 아니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더 밑바닥의 무한한 땅덩어리를 느껴 보라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나, 땅 속에 숨 쉬는 한 마리 벌레나 다를 게 뭐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니엘은 또 한잔을 들이켰다. 이미 술병에 남은 술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그이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부어 주었다.
"상기와 자고 온 나와 오늘 밤 잘 수 있겠어?"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미 테라스 밖은 어둠이 내려 고요했고 멀리서 바닷가 파도 소리가 쓸쓸하게 어딘가를 향해 부딪치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나를 돌려세운 다니엘이 치마를 걷어 올렸다. 이내 그가 내 속을 찾아 들었다.
"이런 걸 원해?"
멀리 밤바다가 보였다. 저 바다를 건너, 뭍에 닿으면 내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땅이 나온다. 그들로부터 나는 얼마나 떨어져 나온 것인지 생각했다. 먼 거리였지만,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거리였고, 정확한 거리 또한 지도를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그런 명확한 지정학적 위치였다. 모든 게 또렷한 현실로 그려졌다. 지나간 시간이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허상이었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규명할 수 없는 환상이었다. 오로지 내게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뜨거운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밤새가 바다 쪽에서 어둠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 새들은 몸집이 크고, 드물게 원색을 가진 새들이었다. 그들도 이름이 있을 것이다. 단지 내가 모를 뿐, 그 누군가 그들에게 지어준 이름을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수세기 전에 이미 남들이 지어 놓은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싶었다. 골든 브리지 위에서 다니엘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 난간 위로 날아 오른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온몸으로 날개를 떨어대며 공중에 떠 있던 자그마한 새, 다니엘은 그 새를 벌새라고 했다. 벌 같은 몸통에 부리가 침처럼 생긴 걸 달고 있었다. 날개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날갯짓을 하던 새였다. 그렇게 작고 예쁜 새도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을 쳐다보며 알게 되었다. 그렇게도 예쁘게 보였던 다니엘이었다. 새롭게 다가와 귀여운 얼굴과 몸짓으로 신선했던 모든 것들,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선 여전히 다니엘은 한 마리 벌새였다.
난간에 기대 몸을 앞으로 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럴수록 그는 더 내게로 붙어왔다. 그가 더 쉽게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왼쪽 발을 난간 위에 올려 놓았다.
"나와 당신, 이게 현실이야. 당신과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지금 내겐 당신만 존재해. 감정이 의미를 가지는 건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만 그런 거야. 나머진 다 허상이야."
어깨의 숄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낮의 열기를 몰아낸 밤바다의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가슴골을 스쳐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하나의 점이 물속에 떨어져 번져갔다. 나중에 한 점 두 점 첨가된 점들은 뒤 섞여 전혀 새로운 물색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물은 물이요, 점은 점일 뿐이다. 미시의 세계와 거시의 세계가 그렇게 질적변화를 겪는다는 걸,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가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걸 시간 속에서 우리 인간은 반추하고 변화를 인지할 뿐이다. 이미 변화는 현실에서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떠나보내는 것, 그걸 과거라고 부른다면, 떠나간 그것들은 시간의 켜켜 속에 화석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상의 이미지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얽매임, 구속이라고 불러도 좋을 연연함에 매인 존재, 그래서 부자유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헤매야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한 마리 벌새만을 생각해야 해."
가볍고 경쾌한 것, 그리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 그것이 가지는 초월한 현실이 주는 즐거움을 우리는 따라가야한다는 걸, 나는 생각했다.
그의 팔이 배를 타고 들어와 가슴을 감싸며 쇄골로 올라와 목줄기를 잡았다. 테이블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르르 날개를 떠는 벌새처럼 그가 나를 품고 떨었다. 뒤로 돌아본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 화면에 사랑하는 딸이라는 발신자 표시가 떴다. 머릿속에선 벌새가 날개를 떨었고, 현실에선 핸드폰이 부르르 부르르 자신을 떨게했다. 내 팔도 뱃속에서부터 울리는 떨림을 타고 핸드폰을 향해 뻗어나갔다. 화면을 켜 올리자, 잠겼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지듯 핸드폰에서 소리가 터져나왔다.
"엄마, 아빠가 소설 쓴다는 거 알아? 혹시 그거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