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는 동안, 다니엘이 책상 주변을 기웃거리다 나갔고, 서연의 문자가 몇 통 수신되었다. 마지막 챕터에서 스크롤이 끝나자 서재엔 정적이 흘렀고 어디선가 째깍대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뭇한 어둠에 회색과 갈색의 탄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새벽공기가 창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몇 개비의 담배가 노트북 옆 커피를 담은 컵에 던져졌고, 거기에 꽂혀있는 필터들은 죽음의 신호처럼 빼곡하게 꽁초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철호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읽으면서 이 글이 분명 철호가 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금방 그가 쓴 글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이빨 빠지듯 빠져나간 기억들이 하나씩 짝을 찾듯 합이 맞춰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불렀던 이빨 빠진 동그라미, 하던 그 노랫말처럼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며 내 행적뿐 아니라, 내와 함께 돌아갔던 그의 행적들까지 떨어져 나간 조각들이 맞춰지듯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내가 함께 하지 않았던 시간의 행적, 함께한 시간 중에서도 풀리지 않고 엉켜있던 의문들이 한 번에 풀려나왔다. 그가 독특하고 절묘하게 시점을 전환하는 서술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결혼 전의 삶에서, 결혼 후 이어진 여자 관계들, 남편이 유일하게 예고없이 외박 했던 그날 밤의 행적은 그가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손끝에 와닿는 감각으로 그는 나의 의문을 해소시켰다. 결혼생활 내내 궁금증과 불안증에 시달리게 했던 사라진 그날의 하룻밤, 일방에서 사라진 기억이 생생하게 매꿔졌다.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던 당시의 불안이, 이런 식으로 조명을 받아 내게는 오히려 속 시원하고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날 밤의 스트레스는 컸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나는 그 사건 이후 제한 없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 넘고 다니며 그것이 남편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이라 생각했다. 이승호와 자고 들어온 날 밤, 침대 머리 맡에 와서 우두커니 내려다 보던 철호의 존재가 지금도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얼마나 심장이 뛰었던 밤이었던가. 자는 척하느라 억지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나를 남편은 알고 있었다. 그날의 일을 그는 이렇게 썼다.
아내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다. 내게서 아내를 가져간 사내라고만 기억할 것이다. 우습게도 아내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빌려줄 수도, 뺏어 갈 수도 없는 몸이라는 걸 그 때 명백히 알게 되었다. 아내의 몸은 단지 그녀 자신의 것이므로, 내게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는 애초부터 없다. 내가 이 여자를 깨워서 어떤 질문이나 힐난을 한들, 이미 달라질 것은 추호도 없었고, 오히려 상황은 전복적으로 악화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이건 내게 더함 없는 즐거운 상상을 유발하는 기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 사랑스런 샛여자와 함께 나눌 즐김거리 쯤으로 저장해 둬야 할 소재로 유용할 뿐이라고, 나는 자위 아닌 자위를 할 뿐이다. 나는 그저 즐겁게 처용의 춤을 추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갈까봐, 입 속에 고인 침덩이가 목구멍 속으로 꿀꺽 소리를 내며 넘어갈까봐 겁먹고 누웠던 새벽이었다. 눈을 뜨는 순간 죽음보다 더한 지옥같은 상황이 눈 앞을 덮쳐올 것 같았다. 새벽 두시가 넘어갈 때까지도 이승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도 그는 내 몸을 요구했다. 남편이 아파트 현관 난간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워 문 것이 멀리 보였다. 이승호는 앞좌석을 눕히고 뒤로 옮겨가 나를 불렀다. 넒은 주차장을 비추는 오래된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들이 군데군데 무성하게 자란 조경수의 이파리와 가지들 위를 밝혔다. 화단 구석의 어둠 속에 차를 대놓고 이승호는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우겼다. 모두가 잠들어 고요와 정적만이 그득 담겨있던 아파트 주자장의 새벽이었다.
남편이 담배를 입에 물고 아파트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의 옆 모습이 초조한 걸음으로 부산 스러워 보였다. 이 새벽에 전화를 하지 않고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결정을 한 그의 생각이 무서웠다. 정문 쪽인지 후문 쪽인지 어느 한쪽을 택해 남편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서둘러, 남편이 큰 길로 나갔어.“
이승호가 서두른 것인지 타이밍이 맞아서인지 그날밤의 정사를 마무리한 나는 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뛰다시피 현관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차에서부터 신지 않고 있던 힐을 두 손에 꼭 쥐고 혹시나 발소리가 날까 맨발로 고양이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현관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탔고 부모 몰래 가출한 아이처럼 소리죽여 대문을 들어섰다. 불꺼진 침실에서 외투를 벗어 걸고 슬립을 걸쳤다.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목까지 뒤집어썼다. 시간이 갑자기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 불이 켜지고 남편이 곧장 내게로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멈추어 섰다. 장터에 누워 있는 기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뜨거운 것이 내게로 왔다가 그 열덩어리가 내게서 멀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입 속에 고인 한 덩이 침을 꿀꺽 삼켰고,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위에 손을 올리며 옆으로 몸을 뉘었다. 그 순간 난 팬티를 입지 않고 뛰어 올라왔다는 걸 알아 차렸고, 엉덩이 아래로 차갑게 질척이는 무언가가 흐른다는 걸 그 때야 알아차렸다. 놀라웠다. 그날 밤의 일, 남편의 행동과 생각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었다. 내 모습, 내 표정, 감추고 숨겼던 내 마음이 어떻게 보였는지 그는 상세하게 써서 내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소설의 내용은 철호의 자기 폭로가 반을 차지했다. 그리고 7년에 걸친, 그도 나도 감내한 혼자만의 시간들, 내가 그를 피해 여기까지 온 것도 불안이 자초한 그런 이유였던 만큼, 그 역시 나를 회피할 이유가 충분했다는 걸 그가 쓴 이야기를 통해 속속들이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런 이유 위에 존재했다는 것, 나의 죄를 고백할 때 타인은 자신들의 죄로 번민해야 한다는 것을,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던 예수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디테일은 성적 묘사로 가득차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포르노물이었다. 사람들이 그런 표현에 호응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에 이렇게 독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조회수와 판매자 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구독자 수가 백만이 넘었다. 한 편을 보는데 지불하는 금액이 10 코인, 1회를 백만 명이 본다고 치면 천만 원이었고, 그게 80회를 넘어가고 있으니, 천만 원의 80 배면 8억이었다. 회사와 5:5로 나눈다 하여도 4억에 세금을 제한다 하더라고 3억은 가져가는 수입이었다. 이런 난잡한 소설을 써서 3억을 벌 수 있다고? 그것도 연재 시작한 지 단 세 달 만에?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이런 포르노물을 써서 그렇게 큰 돈을 일시에 벌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동원된 사람들이 딸의 말대로 실존인물들, 특히 내가 주인공이라는 데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다니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상기와의 관계 심지어 이승호, 대학원의 황교수까지도 마치 평소에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친숙하게 그들의 생활을 기록했다. 모르면 쓸 수 없는 장면들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질 일이었다.
소설은 99.9프로, 외설이었다. 딸의 말처럼 야설, 그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런 게 사회미풍양속을 해치지 않으면 무엇이 해치겠는가, 그러면서 그는 '작가 노트'에 이렇게 쓰고 있었다. 한국에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 내용보다 형식, 사용된 언어의 문제였다. 원색적인 어휘들이 그대로 쓰였고, 절정의 정점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하고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여자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로 가득 차 있어, 그런 면에선 확실히 한국에 없는 소설임에 틀림은 없었다.
왜? 왜, 그는 이런 걸 썼을까. 작가 노트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괴로움과 고통의 시간들을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환락에 겨운 분들, 혹은 그 반대인 분들도 봤으면 한다. 이 둘은 결국 자웅동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웅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고통받는 사람이나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결국 같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 같았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의 의도가 다분히 교훈에 몸담고 있다고 보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 또 그를 둘러싼 관계들, 이런 관계는 서로 거울을 비춰보듯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나의 남자들과 그의 여자들, 이 쪽의 세계와 저 쪽의 세계는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너와 나의 실존들이었다. 나는 그를 통해, 그는 나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알지 못 했던 또 다른 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거기선 그놈의 아내가, 여기선 김철호의 아내가 되어 줘."
김철호의 말이 이제야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왜 그가 그런 무리수를 둔 말을 내게 할 수 있었는지 이제 온전히, 그가 한 사람의 남자로 이해가 됐고, 나 역시 한 사람의 여자로 그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니엘에게 다하지 못한 말들이 자판 치듯 머릿속에 글자들이 계속 나타났다. 감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해석이 되어야 했다. 몸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체화되기 위해선 머릿속에서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쌍방에 대한 인식, 양방향의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모든 지식과 삶은 주관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문제였다. 몰이해가 가져오는 갈등은 바로 이 주관이라는 놈이 주관하는 주관의 세계가 만들어낸 독단의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도 간단한 방법, 남을 이해하기 위해선 나를 죽여야 한다는 것, 완전한 객관에 이르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가져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한다, 그러면 타인이 보일 것이다. 거기서 이해는 출발한다. 그렇게 가져온 타인을 내 속에 들여보내면, 그것이 다름 아닌 나의 주관이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이 모여 객관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게 세계는 타인의 세계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건 물질이나 문명과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었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절정의 순간에 맛보는 황홀경과 다를 바 없는 깨달음에 속하는 문제였다.
철호가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는 것, 혹은 나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몸을 나누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가 되는 것'에 건 자신의 생이었다. 이제 중반을 넘어서기 사작한 그의 소설은 아직 가야 할 길이 좀 더 남은 듯했다. 그가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읽은 나, 그는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는 듯했다. 이제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나를 썼듯이, 나도 그를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럴 재주가 내겐 없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응원하면서 그의 옆에 있어주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그를 쓰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헐뜯고 끌어내리고, 찢어 발기는 그런 종류의 고발이나, 적어도 추한 일기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아무리 이런 이야기가 나와 그, 두 사람에 관련된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알아보는 생활 속의 관련자들, 독자와 관객들이, 심하게는 구경꾼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김철호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뜻을 훼손시킬 수는 없다는 확신. 내가 다니엘에게 내 목소리로 하고자 했던 말을 철호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엘에게 말하고자 했던,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했던,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를 설득하고자 했던 중요 개념은 다자 연애, 폴리 아모리였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 서재의 자욱한 담배연기 위로 투명한 빛줄기가 서광처럼 뚫고 들어와 내 몸을 둘러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