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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밤

by 별사탕

억지로 민지를 차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민지의 차가 마을 아래로 내려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철호는 돌아섰다. 민지의 아버지가? 만나서 주의와 경고 정도만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죽일 것처럼, 그것도 사람을 사서 이런 식의 테러를 가하는 건 다른 영역, 범죄였다.


"아빤 그런 사람이에요."


민지가 알고 있는 아빠의 방식이라고 했다. 자기가 사귀는 남자친구 뒷조사에서부터, 맘에 들지 않는 상대를 접근 금지시키는 방식까지 민지는 몇 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철호는 깨진 유리창을 쳐다보며 다시 방바닥을 쓸어냈다. 침대맡에 앉자,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면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어디선가 전화기 진동음이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은 거실 쪽이었다. 방을 나가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다. 핸드폰은 식탁 테이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부산스러운 가운데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는지도 몰랐던 것 같았다.


"여보, 나야..."


긴 전화번호 끝에 들린 목소리는 정혜였다. 드물게 한 번씩 주고받는 전화, 가장 최근의 통화가 아버지 상을 알리는 통화였다.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목소리가 났다. 그쪽은 아침이 밝아오고 있는 시간쯤일 거라 예측했다.


"난잡한 글은 이제 그만 쓸 수 없어?"


철호는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


"왜 전화했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목소리를 받아치는 무심한 음성이었다.


"그만 쓰라고..."

"뭘 그만 써?"

"말 돌리지 말고, 당신이 쓰고 있는 그 소설이라는 이름의 외설 말이야."


철호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고, 알았다고 할 만큼 지금의 상황이 고분고분할 상황도 아니었다.

순간, 철호는 생각했다. 그래, 소설. 문제의 발단은 소설이었다. 세미나장에서부터 따라온 사내와의 연결고리도 자신의 소설이었다. 외설적인 소설, 난잡하게 얽힌 남녀 관계, 그걸 통해 한국사회에서 변화된 가족관계, 너머에 있는 원초적 인간관계에까지 가 닿게 하고 싶었다. 비록 성적 묘사를 통한 말단적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는 소린 듣지만, 그 소재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주제였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목적지에 닿아 설득력을 호소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였다. 어떤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변보다 더 직감적으로 본질에 가닿을 수 있는 소재였고,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소설이었다. 거기서 벌어지는 오해는 부작용이거나 부산물이거나 오독의 산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안 끝났어."

"뭐가, 복수가? 당신의 고상한 취미가?"


자신이 숨긴 속이 정혜의 단 몇 마디로 꿰뚫려 버린 느낌이었다.


"뭐, 내가? 복수당할 일을 저지르긴 했다? 취미는 니가 더 고상했을 텐데..."

"당신답지 않게 또 말을 돌리네."


정혜는 철호의 소설을 다 읽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끝을 짐작해 보았다. 아무리 의식 있는 마무리로 잘 둘러댄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펼쳐놓은 에피소드들이 가지는 낯뜨거움은 가릴 수 없었다. 사실이었다. 오히려 누군가 이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사실이며 주인공들은 주변에 숨 쉬고 있는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들로부터 받을 눈총과 멸시, 비난들은 자신이 미국에서 다니엘과 겪어낸 시련을 초월할 것이라는 걸 훤히 알고 있는 정혜였다.

다니엘과 관계를 가지면서 남편이나 상기가 다녀가고 나면 다니엘이 들어와 살았던 날들이 있었다. 반대로, 다니엘과 살고 있는 자리에 철호와 상기가 드나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했다. 어쨌든 그건 시기를 조절한 다자간 연애였다. 그때 주변의 사람들은 밀프 호어(milf Whore)라는 비난의 말을 쏟아 냈다. 정혜는 다시는 구성원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삶의 연결고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고립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도 대를 이어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고, 그들까지도 온전하게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커뮤니티로부터의 박해는 고립을 뜻했고 고립은 곧 죽음이었다.


"당신은 날 죽이고 있어. 당신 자식들도 당신이 죽이고 있는 거야. 꼭 총으로 쏴야 죽는 줄 알아?"

"곧 스토리가 마무리될 거야."

"곧? 그게 언젤까? 내가 죽고 나서? 애들이 어디서 뛰어내렸다고 기사 뜨고 나서?"


미처 생각지 못한 반격이었다. 정혜가 공격하는 건 의도한 바가 있어 속으로 즐거움이 배가 될 일이었지만, 자식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 거란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애들을 왜 끌어들이시나?"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지? 이거 연락해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서연이야."


뒤통수에서 쿵 소리가 난 듯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파 과정을 듣고 있었다.


"지금 나 많이 복잡해."

"이런 일 말고 뭐가 또 복잡한 일이 있어?"


생각해 보면 다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한 가지 문제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문제 같기도 했다, 소설에서 촉발한 문제가 사람들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은 물리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딱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다.


"비슷해."

"다 당신 소설이 문제라는 뜻이야. 받아들여야 해."

"당신이 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 아는 사람은 몇 안 될 거야."

"너도 그 몇에 속하는 건가?"

"그렇다고 생각해."


철호는 오, 하는 감탄사를 핸드폰 화면에 퉁겨 주었다.


"고마워해야 하나?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긴 해, 워낙 난잡한 묘사가 많아서 말이지."


딸 서연이까지 읽어 볼 정도면, 독자층은 상당히 두텁게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이 든 또래의 아줌마들까지 파급되고 있다. 20세기 초에 시작한 성혁명의 정신을 물려받은 60년대의 자유연애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각종 섹스산업의 성행은 히피문화와 연동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이 약에 손에 손대면서 혁명은 중독이라는 병, 질환과 연결되었고 그 모든 변혁세력은 한순간에 저급한 정신병자들로 낙인찍혔다. 무정부 집단, 떠돌이, 자유, 정착하지 않았던 집시들의 문화는 그렇게 문명과 만나 한순간에 시들어갔다.

제도로서의 결혼을 반대한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제도와 사회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중요한 변화였다. 다시 성혁명을 통한 가족, 사회구성체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시점이 다가온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한국사회는 그럴 만한 정황을 맞았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는 가족의 붕괴가 있었고, 가족의 붕괴 전 단계에는 출산율의 저하라는 요인 기제가 자리했다. 그런데 출산율 저하는 사람들이 섹스를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섹스에만 탐닉할 수밖에 없는 사회현실 때문이라는 사실이 존재했다. 재미있는 순환이었다.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들이 유손한 것들과 마구 섞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가 빨리 정리되길 바라."

"노력은 해볼 거야. 만족스럽든 불만스럽든 내가 저지른 일이고 내가 수습하고 싶어."

"그래야 당신이지. 길어지면 안 돼. 더 이상 이슈가 되어서도 안 되고. 알지? 왜 그래야 하는지?"


철호는 다시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컴퓨터를 켰고, 윈도 바탕화면이 떴다. 본체 케이스 위에 있는 유에스비 단자에 캡슐의 반쪽을 꽂았다. 새로 인식된 디렉터리에 유에스비가 잡혔다. 동영상 하나와 몇 장의 사진들이 전부였다.

사진을 클릭하자 자동으로 저장된 사진이 슬라이드 넘어가듯 한 장씩 넘어갔다. 모니터 화면 전체에 민지와 철호가 찍혀 있었다. 민지가 처음 이 집에 온 날 커튼 틈으로 찍힌 민지의 굳은 얼굴, 민지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내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상의를 벗고 앉은 민지의 모습이 보였고, 둘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신림동 시네스퀘어 광장에서 둘이 만나는 장면, 둘이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장면들이 현장 르포 사진처럼 넘어갔다.

철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화면을 응시한 채 다음 파일 박스, 동영상을 클릭했다.


"당신과 뭐든 해보고 싶어."


대뜸, 상기된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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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