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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트리

by 별사탕

"비행기 티켓 확인하고, 날짜 확인 다시 해봐"


아침부터 다니엘의 성화가 이어졌다. 하와이에 있는 그의 누나가 동생 가족을 초청했고, 정혜 역시 결혼 이후 처음으로 다니엘의 친지 방문이라는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거라는 지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가 구성한 가족을 저들의 가족에 합류시켜 안면을 트게 하겠다는 가문 의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새로운 가족의 구성을 위해 지난 가족의 구성을 끊을지 유지해 나가야 할지는 각자의 선택 사항이었고 의무는 아니란 생각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그들이 오케이 하자 바로 예약을 하고 티켓을 아이들이 살고 있는 시애틀과 캘리포니아 주소로 부쳐주었다.


"아이들한테도 연락해 봐, 플라잇 데잇하고 보딩 타임 확인시키고..."


우편으로 딜리버리 되는 티켓의 경우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확인을 두 번 세 번 하는 수밖에 없다는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이를 뒷좌석 싯벨트에 앉히고 버클을 채웠을 때, 정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대로 엘에이 공항에 도착해서 캐리어 두 개를 델타항공 출입구에 내려주고 다니엘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작은 캐리어를 큰 캐리어 위에 올려놓은 정혜는 자신의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캐리어를 비스듬히 기울여 입구의 자동문쪽으로 잡아끌었다.

정혜는 미국 생활 10년이 되어 가는 사이, 미국을 벗어난 여행이란 것은 처음인듯했다. 워낙 넓은 땅에 조금만 움직여도 서부해안이 모두 관광지라 특별히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던 정혜였다. 하지만, 이렇게 날을 잡고 비행기 티켓을 가족 수만큼 끊고, 정한 날 수만큼 모두 함께 그곳을 향해 갔다가, 모두 함께 일정시간을 머물고 돌아오는 가족 여행은 한 번도 없었던 듯했다. 철호와 살았던 지난 15년의 시간 속에서도 맘먹고 어딜 간다는 생각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와이라는 여행지를 방문한다는 즐거움보다, 시댁식구들과 함께 한다는 두근거림이 더 컸다. 한국여자의 숙명 같은 것인가 싶었다.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일, 그들에게 나도 역시 새로운 가족일 테니까, 쌍방의 예의를 차리는 일일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폭넓은 지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출발해서 같은 공간으로 모여 시간을 함께 한다는 일은, 멋진 일이었다. 다니엘과 정혜는 아침부터 서둘러 11시 30분 비행기를 엘에이에서 탔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하와이는 생각보다 먼바다에 있었다. 거의 6시간을 날아왔던 것이다.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 청사를 통과해 택시가 늘어서 있는 공항 진입 도로에 서자 몇몇 마우리 부족민 기사들이 말을 걸어왔다. '노 땡스'를 낮게 읊조리던 다니엘이 두리번거리면서 한쪽을 가리켰다. 상부도로가 하늘에 떠 있고, 애를 안고 가는 정혜나 카트를 끌고 가는 다니엘 일행은 그 아래 지하도를 걸어 나가야 했다. 사방이 꽉 막힌 구조물들로 에워싼 풍경이 이들을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미로 같은 답답한 심리에 빠지게 만들었다.


"저기 포스트 보이지? 저쪽으로 건너가면 렌트가 기다릴 거야. 호텔 서비스를 이용할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열흘 동안 있으려면 우리 이동수단이 따로 필요할 것 같아서 예약했어. 아이들도 태워야 하니까."


몇 장의 서류에 사인을 한 다니엘이 뒷좌석 카시트에 잠든 아이를 앉히고 벨트를 채워 주었다. 정혜는 트렁크를 끌어다가 트렁크 앞에 세워두었다. 다니엘이 와서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집어넣었다. 시동을 걸고, 네비화면이 밝아지자, 목적지를 검색했고, 차는 이내 출발했다.


"쉐라톤으로 숙소를 잡았어, 비수기라 베이컨시 상태인 룸이 좀 있었나 봐."

바다에 인접한 작은 호텔이었다. 평범한 로비에 들어서자 밝게 인사하는 직원들, 카운터에 다가가자 하얀 치열을 드러내고 웃어주는 유니폼을 입은 남녀가 피로에 지친 여행객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정혜는 다니엘과 바꾸어 아이를 어깨띠로 매서 안았고, 다니엘이 이번에는 캐리어를 끌었다.


"여기 호텔이 작지만 쏠쏠한 재미를 준다 그래, 리뷰가 엑셀런트급이었거든. 여러 이용팁들이 공유된 게 많았어. 좀 있다 애들 픽업해야 하니까 그동안 좀 쉬고 있어."


아이들을 픽업해서 누나의 집에 들어간 것은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였다. 공항에서 누나의 집 사이는 25분 정도의 짧은 거리였다. 하루 알뜰하게 돌면 섬 전부를 다 볼 수 있는 작은 섬이었다. 서울의 반의 반토막도 안 되는 사이즈였다. 하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는 다니엘의 설명을 듣고 다이아몬드 헤드산, 이롤라니 궁전, 과 동물원은 꼭 가보고 싶다는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이 밀려왔다.

누나의 집은 와이키키 비치 카나이나 애버뉴의 조지 스트리트에 중간에 길게 늘어선 집들 중 한 채였다. 작은 잔디정원이 있고, 주차장이 하나 달려 있는 자그마한 단독주택이었다.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두 개 화장실이 한 개, 그리고 작은 다락방 같은 공간이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있었다. 이 집에서 두 가족이 함께 지내는 건 무리였다.


"잘 왔어요, 잘 왔어"


다니엘의 누나는 정혜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인 활달한 여자였다. 그만큼 정혜의 나이는 다니엘의 가족으로 치면 집안의 큰 누나뻘인 셈이었다.

아이들을 하나씩 소개하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밝게 웃어 주었다. 누나의 아이들은 남자아이들만 둘이어서 정혜의 딸아이들과 서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서먹한 시간도 잠시 그들은 특유의 또래답게 금세 말을 편하게 하는 듯하더니 서로 깔깔 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오히려 어른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자 서로에게 할 말이 없어지는 듯했다.


"우리 다니엘이 미국서만 커서 한국 정서에 둔할 수 있어요. 올케가 이해해야 할 게 많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편하게 받아들인 일들이 더 많아요. 한국정서에 갇혀 있는 제가 다니엘에게 더 이해받아야 했는걸요."

"그러면 더없이 감사해야 할 일이죠. 어차피 아이들이 서로 각자 다 가지고 있으니 그 점도, 아쉬움 없이 이해되어야 했을 거고..."

"서로에게 모자란 것도 부족한 것도 없었어요. 그렇게 주고받은 걸 따지면 제가 더 미안해요."


정혜는 다니엘이 부엌을 오가며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걸 쳐다보았다. 이런저런 생활 얘기를 하면서, 아이들이 모두 함께 비치에 가자고 했고, 어른들은 배를 만지며 뭘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입을 모았다.


“빨리 가면 선셋을 볼 수 있을 거야. 비치 바가 있거든 거기 식사도 될 거야.”


정혜는 경숙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다니엘의 누나를 언니라 불렀고, 그녀는 정혜를 신디라고 불렀다. 아쉬움이 없는 호칭이었다. 예의와 친근함을 표시하기에 충분했다.


식탁 테이블 위에 맥주와 음료수 캔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상태로 모두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본 하늘은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11월 중순이면 겨울의 초입이었다. 하지만 호놀룰루에는 봄과 가을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반팔 반바지차림으로 거리를 다녔고, 햇살은 따가웠다. 거리는 한산했고, 백사장은 텅 빈 채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쉐라톤 앞 바 건물을 바라보며 일행은 차에서 내려 가든식 정원을 걸어 들어갔다.


“장사는 하는 거지? “


워낙 사람이 없는 풍경이라 다니엘이 경숙에게 물었다. 경숙이 웃으며 다니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긴 딱히 비수기가 없어. 요맘때 관광객이 신기하게도 딱 끊겨 날씨 탓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패턴 때문이라고 해. 놀러 다니는 사람도 쉬면서 놀아야지.”


야자수가 불꽃 터지듯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풍경 뒤로 붉은 바다와 하늘이 경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해변의 입구에는 알 수 없는 동 상이 단위에 높이 서 있고 그의 목과 팔에서 환영의 알로하 꽃목걸이가 주렁주렁 걸쳐져 있었다.


웨이터가 작은 주방에서 나와 테이블 두 개를 당겨 붙여 주었다. 두 가족은 붉은 바다의 백사장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마시고 떠드는 사이 아이들이 바다 쪽으로 뛰어 나갔다. 테이블에는 그들이 먹고 버린 랍스터의 잔해가 수북이 쌓였고, 유리컵들이 어지럽게 널렸다. 바의 조명이 켜지면서 주변에 어둠이 내렸다. 시간이 꽤 흘러갔다.


“나도 처음엔 다 어색하고 힘들었어.”


애들이 없어지자, 경숙이 술잔을 내려놓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신디도 힘든 시기는 지났다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남은 것들이 있을 거야. 특히 가족관계는 끊어질 수 없어. 그렇게 깊은 고리로 묶여 있는 줄 몰랐지. 모두 사람의 문제라는 걸 닥쳐서야 알게 되는 그런 문제였어.”


정혜는 경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밑에 그늘이 깔려 보였다. 자신보다 몇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니엘의 도움이 컸어요. 이 사람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둘이 함께 하는 건 힘을 모았기 때문일 거예요.”

“선택이란 것 뒤에 있던 연결고리들이 사람을 불편하게 했어요. 그 고리는 끊는다고 끊어지지 않더라고요.”

“이해해요. 사람일이란 게 그런가 싶어요.”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진통 같은 거라 봐요. “

“좋은 사람들과의 이별은 더 그런 것 같아요. 애들 아빠가 비행 중 삼정지가 왔어요. 하루아침에 겪은 날벼락같은 소식이었죠. 슬퍼할 틈도 무너져 내릴 시간도 없이 이 사람이 절 돌봐줬어요.”


경숙이 남편은 공군출신 대한항공 조종사였다. 사관학교시절부터 연애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남편의 생활이어서 남편의 죽음은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 남편의 동기생이었던 만길이 만사 제쳐두고 친구의 장례를 도맡아줬고, 경숙은 자연히 그를 신뢰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년이 다 되어 남편의 이 주기를 맞았을 때 친구들이 모였던 절의 선방 봉당마루에 앉아 만길이 고개 숙인 채 말했다.


“형석이보다는 더 못해도 그 녀석만큼은 할게요.”


그런 만길에게 경숙은 비행이 직업인 사람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만길은 3개월 만에 전역증명서를 떼서 경숙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경숙과 만길은 일 년을 살았고, 그 사이 남편과 연결된 관계들로 힘들어했다. 만길이 형석의 자리에 들어왔고, 그 자리와 연결되었던 모든 관계들이 껄끄러워졌던 것이다. 이전의 관계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가 중첩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부부관계에서조차도 그랬다. 경숙은 육체적인 결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길 앞에서 발가벗겨진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의 성기가 그녀의 몸에 닿아 들어온다는 생각 자체가 그녀를 몸서리치게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민이었다. 이미 온 식구들이 미국에 정착해 있었고 넘편의 직장과 고집으로 미국으로 가자 못해떤 이유도 있었다.

이민와서 하와이에 정착한 첫날부터 경숙의 모든 강박이 풀리가 시작했고, 남편의 죽음에서 왔던 심리적 압박과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맞는 말이었어요.”


정혜는 경숙과 정반대였다. 표면적으로는 상기가 있었고, 이승호가 있었고, 김철호가 있었다. 정혜가 다른 남자를 받아들인 행위는 어린 날의 끌림에서부터 이기적 처신, 반발에서 오는 외도까지 다양한 이유가 붙었다. 지금에 와서 정혜는 더욱 모를 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생각에 골몰했다.


“사람마다 다른 사정이 있겠죠.”

“여자기 때문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가족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모두 배우자와 헤어진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별, 종교적 관습, 서로에게 불충실한 원인으로 이혼했거나, 세상에는 다양한 이별이 존재했다.


“헤어짐은 늘, 또 다른 만남이 뒤따른다는 전제가 있죠.”


묵묵히 미소 띤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만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멀리 해변가 모래사장에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어둠에 잠긴 먼바다 끝을 향해 선 실루엣이 어른들의 시야 속에 멈추어 선 듯했다. 백사장 입구 쪽으로 걸어간 일행은 멀리서 거대한 숲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 몇 그루의 나무가 서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 나무는 나무기둥에서 뻗어나간 곁가지들이 땅으로 늘어져 다시 기둥이 되는 특이한 나무야. 모든 나무들이 태양을 향해 위로 자라지만, 이 나무만 옆으로 자라는 거지. 사실, 사람도 그렇고 다른 동물들도 다 그런 거 아닐까? 이 지상에 사는 생명이란 것들은 이 나무처럼 이렇게 자기의 영토를 옆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거지."


경숙의 이야기를 듣던 일행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무줄기를 어루만졌다. 나무는 여러 개의 기둥이 겹겹으로 싸여 거대한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 멀리서 보면 한 그루의 나무가 큰 숲처럼 보일만도 했다.


"반얀이란 말이 여기 원주민의 토속어인가 봐요?"


나무 옆에 영어로 쓰인 팻말을 보고 정혜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반얀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인도말이에요. 신디도 이미 잘 아는 말일 걸요? 반야심경이라고 들어봤죠? 그 반야와 같은 말이에요."

"예?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그 반야?"

"맞아요, 반얀은 지혜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예요. 지혜의 나무인 셈이죠. 우리가 가족을 자꾸 늘려며 옆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이 나무도 생존을 위해 그 방법을 선택한 거라고 해요."


정혜는 거대한 반얀 트리 기둥 위에 손을 얹고 잠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이 나무처럼 무한정 가족을 늘려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넉넉하고 포근한 자기만의 숲을 조성하고 그것을 정원으로 잘 가꾸는 일이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그만, 여기서 더 옆으로 자라는 일은 없도록 반얀 트리의 기둥에서 전해지는 반얀의 숨결을 호흡했다.

이제 그만 했으면 해, 넌 이미 충분히 널 키웠어. 내일에 대한 불안과 무너지는 자신을 위해 이미 넌 많은 시간을 버티고 싸운거야. 더 아프지 말자, 반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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