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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드-헤이플릭 리밋

by 별사탕

결혼에 실패한 게 아니에요. 인생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요. 사는 게 원래 이런 거예요. 그냥 그런 거라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빨리 벗어나요.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쉽거든요.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는 거죠. 내 탓이 아닌 거죠. 내가 만든 이유도 그들이 만든 수 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해봐요. 백사장의 모래알 같은 걸, 찾으려고 공들이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올 것이 왜 두려운가요?무엇이 올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에 지나지 않아요. 오직 눈앞에 있는 것만이 현실이에요. 전 그것만 봐요. 그것만 믿기로 해요, 우리. 우리, 그렇게 살도록 해요.


정혜는 경숙의 위로를 귀기울여 들었다. 경숙은 조곤조곤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듯 차근차근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다니엘, 형석의 목소리도 간간이 섞여 들었다. 정혜는 그들의 말속에서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긋난 운명 같은 것도 아니었고, 오해와 진실처럼 게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 네 사람이 살고 있는 분명한 현실을 정혜는 마음 속에 붙들고 싶었다. 경숙과 다니엘 사이 어딘가, 경숙과 형석 사이 어딘가, 그리고 정혜와 다니엘 사이 어딘가에 그들 각자는 숨 쉬며 살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울어지듯 의존했고, 기댄 만큼 일어설 수 있는 반작용의 힘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숨겨진 밑바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의 바깥을 향해 조금씩 차올라왔다. 그 에너지는 꿈처럼 그들은 서로의 몸을 파고들어 교합의 접점을 만들었다. 흔들리는 그들의 발신을 단단하고 확고한 아늑함으로 서로 감싸 주었다. 서로가 기댄 만큼 버티는 힘이 작용했다. 그렇게 밀려 들어왔고 밀려들어가는 행위가 반복됐다.

그것은 마치 창문너머 아득히 먼 데서 태평양이 한 번씩 몸을 뒤챌 때마다 한 번, 두 번 숨을 고른 하얀 거품이 일어나 일제히 정혜의 가슴을 향해 밀려들어오는 듯했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여기에 없지만 같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그래서 한 몸이기도 했고 따로의 몸이기도 했다.


다니엘의 허리를 감고 파고드는 정혜의 눈꺼풀 안에서 부감으로 이중노출된 상기의 얼굴이 흔들렸다.


내가 누날 가질 수 없다면, 내 지난 시간들은 너무 허망할 거야. 지난 시간들 속에서 단 한 번도 누날 잊은 적이 없었어. 친구들이 그래, 받아 놓은 술잔 입술 위로 손가락 끝을 돌리는 버릇이 있다고, 머릿속이 텅 비워지는 매 순간마다 누나를 생각하고 있단 걸 알게 됐어. 일할 때도 멍청해지는 때가 있었거든. 어깨를 툭 치는 사람들은 그때마다 의미 없이 씩 웃는 게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라고들 했어. 생각해 보면 없던 감정이 새로 생긴 것 같았지만, 그건 형체가 녹아내리고 없는 오래 묵은 그림자 같은 관념이었어. 주인 잃은 헛 것이었지. 그런 거 있지? 분명 있는데, 여기 이 마음속에 가슴속에 분명히 뭔가 있긴 한데 보여줄 수 없는 것들... 이제 그게 뭔지 누나에게는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엘에이 공항에 내려 핸드폰을 켜자 한 문단씩 올라온 상기의 문장이었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저렇게 저런 표정과 저런 말투로 머리칼 한 올 끝에서도 저 사람이 내 앞에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나는 왜 저 사람 옆에 있지 못할까, 저렇게 저런 모습으로 저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 서둘러 가야만 하는 것일까.

비행기가 뜨고, 멀리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누난 떠나고 있어. 늘, 누나는 내게 그런 존재였어. 떠날 준비가 된 여행자, 짐을 꾸려놓고 짐꾸러미를 메면 어디든 훌쩍 떠나가는 존재. 거긴 내가 없는 곳이었어. 누난 결국 내가 없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 같아. 하지만 난 알아. 내가 없는 곳을 누나는 찾아다녔겠지만, 누나가 없는 곳에서는 내가 살 수 없다는 사실. 이건 그리움도 아니고, 애정도 우정도 아닌 거야. 말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내 속에 27년의 세월로 쌓여 있는 것 같아. 그걸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어.


슬픔이 복받쳐 목청이 쉬고 두개골 끝까지 파고드는 고통으로 아파서 목구멍 끝에서 쉰소리만 꺽꺽 터져 나올 때, 정혜는 심장이 무겁게 아렸다. 그 아픔은 멀리 27년의 시간을 타고 과거에서부터 건너오는 고통이었다. 지나간 시간의 무게만큼의 힘으로 그녀를 누르고 있는 것, 그것은 다니엘을 안고 있는 무게 위에 더해진 상기의 몸이었다.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열감으로 번져나가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자궁일 지도 모른다는 몸속 자리의 감각을 가졌다. 몸속에서 일어난 불이 자신을 태울 수도 있다는 실재감이 커지면서 겁에 질린 그녀는 다니엘 위로 올라 붙어 한 마리 애벌레처럼 한껏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그의 몸이 시키는 대로 돌돌 말린 그녀의 몸은 공벌레처럼 둥글게 그에게 달라붙은 채 허공을 허우적댔다. 잃어버린 목청을 되찾기라도 하듯 어둠 속 허공을 향해 헛팔질을 해댔다. 정혜가 허공을 허우적 댈 때마다, 히터에서 불려 나오는 열풍을 배출하기 위해 잠시 열어둔 창틀의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바깥바람에 커튼자락이 나풀거렸다.


바닷가 백사장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숙의 아들 둘이 정혜의 딸 둘과 어울려 내는 소리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데이빗의 걸음걸이가 좁은 보폭으로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더 놀고 온다는 아이들을 두고 부모들은 벌써 집으로 돌아간 터였다.

아이들도 즐거움에 지쳤고, 어른들 역시 진득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음에 흡족한 하루가 저물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멀리 떨어진 서로를 향해 소리치며 내일은 비치 끝까지 올라가 보자고 소리쳤고, 다이아몬드헤드에 올라가 봐야한다고 맞받아 치는 소리들을 질러대는 사이 불이 꺼지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낮게 깔리다가 다시 깔깔 대다가 누군가 코를 고는 소리를 내는가 싶다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푹푹 숨을 내쉬며 이내 숨소리들이 잦아들었다.


밝고 빛나는 것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어둡고 축축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혜는 침대 시트 속으로 꺼져 내리며 다니엘이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율동에 맞춰 흔들렸다. 그의 턱 끝에 매달려 달랑대던 땅방울이 망울져 정혜의 깊게 파인 인중 골 안으로 떨어졌다. 꽃이 피는 것이다. 이파리가 있는 힘껏 자신을 펼쳐 내듯 허리를 꺾어 접혔던 자신의 살들을 활짝 펼쳤다. 합죽선의 댓살들이 반원을 그으며 화선지에 그려진 난초를 펼쳐내듯 정혜의 몸은 한계 없이 활짝 피어났다. 화제 없는 수묵이 고상한 향을 저며내듯 접힌 살의 사이사이 골에서부터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향이 만져질 것 같은 물씬한 질감으로 공기 속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뒤채는 대양이 일으키는 하얀 포말들이 거대한 파도를 따라 일제히 솟구쳤다. 성난 파도는 해변의 바위 끝을 힘껏 때렸다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들은 육지에 오르기 전에 스스로 사라져 가는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생성과 소멸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존재, 눈에 들었다가, 귀에 나타났다가, 향기로 머물다가 사라져 가는 것, 물들의 알갱이들이 마찰하면서 만들어낸 새하얀 포말들이 진득한 욕망처럼 파도 끝에 들러붙어있다가 위로 아래로 밀리고 밀려서 뭍으로 다시 밀려 올라와 산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정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속숨이 애절하게 울려 퍼지며 이글거리듯 포말화되어 허무하게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갈 뿐이었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는, 이승의 절정을 넘어갔다가 죽지 않고 다시 파도를 따고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살아나는 것을, 정혜는 다시없을 고통과 환희를 한꺼번에 느끼는 합일의 지점에 그녀 자신이 와 있음을 찰나의 순간 맛보았을 따름이었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시간, 그것은 바이탈 사인이 멈추어선 순간 같은 것이었다.

디지털 탁상시계의 붉은 숫자로 정혜의 시야에 들어온 물리적 시간이란,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다. 영원의 시간으로 느낀 이승의 시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영원이 짧게 끊어지며 휙휙 지나가는 사이,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순간의 연속들이었다. 그것이 인간이 닥친 실존하는 삶이었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그런 종류였다. 인간의 삶은 그만큼 허접하고 비루한 것, 순간을 짜깁기한 삶을 살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와이키키의 밤은 깊어갔고, 눈썹 같은 초승달이 떴다. 웃고 떠들어대며 세상없이 저희들끼리 돌아다니던 아이들도 모두 거실과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곯아떨어진 다니엘로부터 떨어져 나와 끈적해진 몸을 일으킨 정혜는 간단히 샤워를 할까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들고 방을 나왔다. 작게 코골이를 하며 곤히 자는 경숙의 남자아이들이 누워 있는 소파와 테이블 바닥을 돌아 나와 샌들을 발에 뀄다. 미등만큼 희미한 숨소리가 호텔 거실에 가득했다. 문을 밀자 안과는 다른 바깥공기가 에어커튼을 밀고 들어오듯 훅 끼쳐 들었다. 소리를 죽여 문을 닫은 정혜는 닫힌 문에 잠시 등을 기댔다. 비상등이 발밑으로 켜진 긴 복도가 숨 막히듯 고요했다. 온 세상이 잠든 듯했다.

한발 한발, 정혜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른 공기로 숨 쉴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가는 듯했다. 야간 조명으로 환한 호텔 정원에 선 정혜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카운터의 직원이 정혜를 향해 볼 가득 웃음을 머금고 웃어주었다. 구운 벽돌을 깔아놓은 바닥을 걸어 나가자, 공연을 하기 위한 로비의 단상이 보였다. 정면 테이블 위엔 하얀 꽃으로 장식한 화관이 하나 놓여 있었고 정혜는 곧장 그쪽으로 걸어가 화관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겉이 하얗고 속은 샛노란 색의 꽃이었다. 머리에 써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정혜는 화관을 직원 쪽으로 들어 보이며 '메이 아이?"라고 물었고,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오프 코스! 포유!"라고 응답해 주었다. 정혜는 "리얼리?"라고 소리 내며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정혜는 화관을 손에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호텔 앞으로 들쑥날쑥한 야자수들이 해변에 늘어서서 키 큰 그림자처럼 시야를 가렸다. 나무들을 지나 해변으로 걸었다. 멀리 수평선이 검은 칠을 한 것처럼 고요한 모양새로 있었다. 정혜는 저 거대한 물을 담고 있는 웅덩이를 생각했다. 언제나 큰 것은 항상 어디에 담겨있거나 어디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만물이란 것도 어딘가에 담겨있을 거란 뜻이었다. 정혜 자신도, 김철호도, 상기도 다니엘도 모두 어딘가 더 큰 것에 담겨있는 존재라는 것이 왠지 모를 위안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이 와서야 비로소 눈 뜨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결코 밝은 세상의 것이 아닌, 깊고 깊은 어둠 속에 묻혀있어 전혀 볼 수 없는 세상에 속한 것, 본능, 욕정, 욕구 같은 생명과 관련된 그 무엇일 거란 생각에 미쳤다. 이 세상을 유지하고 존재하도록 밑받침하고 있는, 떠 언고 있는 그 무엇이 저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 그것이 자신이 지탱해 온 힘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눈썹달이 바다 끝에 걸려 예쁘고 아름답게 빛났다. 달의 위쪽 뾰족한 끝에서 손가락 마디만큼의 거리에 별이 하나 반짝거렸다. 그 별은 뭇별보다 더 밝고 크게 새벽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정혜는 샌들을 벗어 모래 위에 던져두었다. 모래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발을 뻗고 몸을 뒤로 뉘었다. 깔개라도 가져 나올걸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그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에 움푹 패인 모래턱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모든 것이 편안했다. 고요한 파도소리가 귓전을 적시고 이 큰 바다가 온몸으로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는 감흥에 빠졌다. 밤새가 바다를 가로질러 어둠 속을 날아갔다. 그리고 바다 끝 수평선 너머에서 섬광처럼 하나의 빛이 명멸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다. 옆에 놓아둔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린 것은 그렇게 고요가 3분, 5분, 10분, 마치 그 시간은 순간의 연속이 계속되는 것 같은 시간들 속에 놓여 있는 듯했다. 일정 간격을 두고 영원의 시간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현실과 몽상이 교차하는 시간이 흐르는 중간 어디 쯤인 것 같았다.


“여보세요?”


정혜는 침대 빈자리를 확인한 다니엘의 전화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여자였다, 젊은 여자. 순간 정혜는 긴장한 목소리로 변했다.


"정혜 씨?"


이 새벽, 누굴까? 아니다, 거긴 새벽이 아니지, 그래 한국은... 정혜는 핸드폰을 내려 화면을 쳐다봤다. 발신자는 상기였다.


"누구세요?"

"맞군요, 정혜 씨..."

"그쪽은 누구세요?"


여자는 휴대폰 너머 밀폐된 어딘가에서 끈적이는 침과 엉킨 혀가 미끌어지며 한 어절씩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상기 씨가 죽었어요. 이틀 전이었어요."


정혜는 그 순간 왜 머릿속에서 붉은 난초, 블러드 오키드의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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