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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주

by 별사탕

"아빠가 플랫폼에 글을 쓰고 있었나 봐. 인터넷판 한국신문에 아빠 얼굴이 떴길래 봤거든. 근데..."

"근데?"

"그걸 내가 밤새 다 읽어 봤단 말이야."


여기서부터 서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가 속으로 숨을 삼켜 호흡을 조절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근데, 다니엘 아저씨랑 얘기가 거기 다 쓰여 있는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아, 이건. 그냥 야설이야. 엄마 야설 알아?"

"그게 누구 얘기라고?"

"엄마 얘기 같았어."

"지독한 섹스이야기, 그냥 적나라한, 있는 그대로 다 까발리는..."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글을 쓴다는데, 그게 내 이야기이고, 더구나 섹스이야기?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말을 딸의 입에서 격하게 튀어나왔다.


"아, 잘 모르겠고, 엄마가 읽어보면 알 거야. 읽고 판단해 봐. 주소 보내 줄 게."


대학을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나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당분간 알바생활을 하고 있다는 서연이었다. 급하게 의자를 찾아 앉은 내 다리 위로 다니엘이 엎드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씻을래?"


다니엘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핸드폰을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데, 이게 홍보는 한국사회 가족 패러다임의 혁신 뭐라고 났던데, 읽어 보니까 완전 섹스 이야기야. 그것도 사용한 단어들이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해. 이런 걸 아빠가 쓰고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 모르겠어, 하여튼 엄마가 읽고 판단해. 이건 마치 엄마를 죽이려고 일부러 쓴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오늘 오후에 공항에 도착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에 있었다. 수원의 가족들, 남편, 그리고 상기,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서로 대면할 수 없는 인과의 문제로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공항에 마중 나와서 작별을 고했던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사실, 그들은 모두 가족이었다.

내가 전화로 들은 이야기가 선뜻 와닿지 않은 것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점이었다. 일단 그게 어떤 일인지 실감으로 와닿지 않았다.

서둘러 서재로 들어가서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화면 아래 카카오 어플을 실행시켜 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긴 주소가 밑줄이 그어져 표시되어 있었다. 클릭하니 로그인화면과 함께 각종 광고 팝업이 떴다. 어지러운 만화체 그림들로 채운 소설의 표지가 몇 개 떴고, 다시 보지 않기를 눌러 지웠고, 바탕에 로그인 커서가 깜박거렸다.


"내 아이디 비번 줄 테니까, 그걸로 로그인해. 그리고 작가로 이름을 찾아, 별사탕이라고 쳐봐. 그럼 아빠가 쓴 글이 한꺼번에 다 뜰 거야."


서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첫회 연재물을 클릭했다. 첫 화면은 우수 어린 표정의 여자 초상화가 나타나면서 제목이 손글씨가 써지는 것처럼 이탤릭체로 떴다. '아내의 사랑'이었다. 스크롤하는 화면에 나타난 제목이 빠르게 위로 넘어갔다. 아래로부터 작은 제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첫 번째 글, '7년 만에 돌아온 아내'가 나타났다.

나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소설 속에서 그날 밤, 무더웠던 아파트 복도에서 심호흡을 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던 내가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림으로 꼼꼼하게 밑그림을 그리고 배경을 칠한 후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여린 색에서 강한 색으로 점점 밝기를 조절해 가며 생생하고 세세한 움직임까지 차분한 격정을 담고 묘사하고 있었다. 특히 베란다에서의 통화장면은 오늘의 나를 만든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밤의 장면이라는 점에서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사실감으로 충격적이었다.

철호의 감정은 내가 직접 알지 못했던 부분이라, 읽히는 속도가 빨랐고 상대의 감정을 경험한다는 면에서 묘한 감정상의 흥분을 만들어냈다. 기괴한 2개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이상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경험하면서 경험을 당하는, 이중의 행위 주체를 경험하는 것 같은 아주 묘한, 그렇지만 새롭고 신선한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남편이 쓰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켜 놓은 채, 다니엘에게로 갔다. 마치 숙제를 남겨두고 재워야 할 아이를 달래러 가는 엄마와 같은 심정이 되어 안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가 누운 침대 맡에 앉았다. 이내 나는 그의 손길에 쓰러져 그의 품으로 들어갔고, 몸을 감쌌던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몸에서 풀려나갔다. 그가 내게 올라왔고 나는 그의 허리를 두 다리로 묶었다. 뜨거운 그의 숨이 입술을 타고 입속으로 들어와 목구멍안 쪽을 채웠다. 우린 숨을 쉴 수없는 사람들처럼 숨이 막혀왔다. 들어 올린 다리를 침대 바닥에 찍어 누른 채 그는 천천히 내게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주 오랜 시간이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면서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흔들리는 기차에 앉아 어딘가로 무작정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는 완행열차에 올라앉아 나는 가끔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울었고, 밤새 내리는 비처럼 가을밤을 적시는 소리로 숨죽여 흐느끼듯 나는 울었다.

창 없는 불 꺼진 방, 미등이 희미하게 사물들의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심해 같은 방이었다. 어쩌면 우린 몸이 모든 걸 말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생은 비록 한 순간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한 순간이라는 것도 몸이 없으면 무용하다는 것, 내게 정신은 몸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던 정신이 나를 깨웠다. 상반신을 일으킨 나는 거실로 걸어 나왔다. 모래 같은 질감의 까끌한 새벽공기가 베란다 밖에서 거실을 타고 들어와 살갗을 푸석거리게 하는 질감을 주었다. 시간을 알 수 없는 새벽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새하얀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식탁과 전자레인지, 싱크대 이런 주방의 기물들이 한꺼번에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물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목에서 꿀꺽 끌꺽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물병을 다시 냉장고 포켓에 꽂아 넣으며 살아 있다는 것은 느낌이 이런 것쯤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서재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우스를 건드리자 화면이 환히 불이 들어오면서 얼굴에 조명을 받는 느낌이었다. 몇 번을 스크롤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L로 시작한 이니셜을 가진 그 남자는 분명 이승호였다. 그날 춘천으로 가기 전 그를 집으로 불러들인 마지막 장면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그 챕터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올라올 수 있으면, 나한테로 올라 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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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