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

by 별사탕

데이빗을 다시 본다는 건 경계 없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공항에서부터 천사를 품에 안고 , 조수석에 앉아 다니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느낌, 안도감, 현실감은 엄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더욱 증폭시켰다. 늘 뒤에서 미소 지으며 바라봐 주신 분이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삶, 선택과 결정에 어머니는 나를 존중했고, 그 마음은 믿음과 사랑으로 보여 주신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안겨드린 것이 이혼과 결별이라는 절망의 심정을 안겨드렸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뜨거운 무엇으로 짓눌러지듯 먹먹했다.


"울어?"


다니엘이 손을 뻗어 어깨를 쓸었다.


"아니,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공항에서 프리웨이를 타고 서쪽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쪽 어딘가에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우리 집에 있을 것이다. 환경은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앞 뒤 벽으로 탁탁하게 막혔던 서울과 수원 인천의 집과 건물들 사이를 오갔던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여기선 철호에게 막히고, 저기선 상기에게 막히고, 한국에서의 삶은 여기저기 막혔다 부딪혔다 상처를 받았고 그걸 여기서 봉합을 하고 저기서 어루만져지고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있지 않은 삶, 나는 보살펴지고 품어지고 관심 속에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먼저 내어준 사랑에 그들은 욕망을 드러내 보였고, 어떤 이는 욕구를 해소하려고 했다. 나는 그들의 본능에 맞춰 내 몸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환락을 느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늘 내 마음만은 그 몸 밖 어딘가에 있었다. 그 어딘가를 찾지 못해 방황했던 시절이었다. 내 마음을 둘 곳이 내 몸도 같이 있을 곳이란 걸 나는 잘 알았다. 철호도 아니었고, 이승호도 아니었다. 상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 마저도 현실적 여건이 여의치 않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상한 빈틈이 그에게 있었다.


자는 아이를 요람에 내려놓고 나니 시간은 저녁 7시가 되어 있었다. 나가서 먹자는 다니엘에게 좀 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간단히 와인을 한잔하고 싶다고 했다. 테라스로 나가자 온통 붉은 노을빛이었다. 해가 지면 서늘하게 기온이 떨어질 것이다. 어깨 숄을 걸치고 자리에 앉아서 다니엘이 화이트 와인 한 병과 잔을 세팅하는 걸 보았다. 과일을 깎아 오고, 치즈와 토르티에, 비스킷 몇 개를 가져왔다.


"스파게티를 좀 할까?"

"배는 고프지 않아."


첫 잔을 부딪치고 서로의 건강을 빌었다. 석양 얘기를 하다가 병원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비난을 하는 이유가 부러움을 감추려고 그러는 듯하다는 말을 했다. 병원 관계자들이 나눴던 이야기들이 주로 그랬다.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추문들이었다. 유부녀인 나를 가지기 위해, 그들이 하는 식의 표현으로 하면, 어떻게 한번 맛 좀 보려고 접근했다고 말을 돌리면서 뒤에서 비웃었다는 이야기, 옆에 여자가 많이 꼬이는 건 그만큼 윙크를 많이 보내서 그렇다는 이야기 등은 다니엘로서는 견디기 힘든 말이었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사이를 노려 여자에게 접근해 유혹하는 여자를 밝히는 간악한 성격의 남자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주로 교회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들은 다니엘의 친구들의 입에서 다니엘의 귀로 들어갔고 그걸 전부 견뎌내며 내게 왔던 남자였다. 내게도, 나를 위한답시고 전해주던 말이 많았다. 아이들을 팽개치고 쾌락에 빠진 여자, 남과 밤이 다른 여자, 심지어 한국에서 바람나서 미국으로 도망쳐 온 여자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데, 곰곰이 그 소문이란 것들의 진위를 따져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순간 난, 알았다. 모든 소문에는 이유가 있었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맞는 말이었다는 사실.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황교수와의 관계를 보면, 나는 분명 쾌락적이었다. 쾌락적이라는 말은 상기나 철호의 경우처럼 마음과 함께 몸이 움직이는 경우가 아니란 뜻이었다. 식사를 했고, 논문의 방향에 대해 이런 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 관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교수님 다른 여자랑 안 자봤죠?"


황교수는 빙긋이 웃었지만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여자만이 알 수 있는 남자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 그에겐 손가락 끝에서 그것이 보였다. 아주 잠깐 바르르하고 떨린 그 순간,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내가 그렇다는 걸 어떻게 알죠?"

"교수님은 그런 것 같아요."


여자의 도발은 무한한 변신이 가능하다. 그래서 항상 머리 속에는 방향을 틀어버릴 변수를 간직하고 있다. 오해 하시면 안돼요라거나, 어머 진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라거나, 잠시 그런 생각에 빠졌었어요, 결국 저 혼자였지만 말이죠 라는 말로 빠져나오거나 이벤트를 딜레이 시키는 플랜비쯤은 준비하고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잘못 덥썩 미끼를 물었다간 직은 물론이고 폐가망신할 수있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거기엔 발을 뺄 수도 더 들여놓을 수도 없는 일방통행만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자의 도발은 발을 들여다가 슬쩍 다시 빼버리거나 아니면 한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릴 수있는 기회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당당히 들여다 보았고,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훔쳐 보아야 했다.


"내가 샌님처럼 보여 그런가요?"

"그런 스타일이실 것 같아서요. 좋아해도 좋아한다고 말 못 하는, 그래서 혼자서 외로워하는 성격이요."

"그렇게 보이나요?"

"말 안 해도 다 보여요, 교수님 저 좋아하죠?"


나는 황교수의 손을 잡았다. 추위에 떨고 있는 병아리 같은 손가락들이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논문학기에 그와 함께 주제를 탐구했고 그에 따라 과제를 했고 황교수는 충실하게 검토해주었다. 피드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나날들이었다. 순전히 한 주를 그를 위해 보냈고, 하루 동안 그는 나를 위해 봉사했다. 세 달 동안벌어진 즐거운 데이트였다.


"제가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논문 심사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을 모시고 논문을 제출한 학생들이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1차를 마치고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나중에 황교수는 그가 사는 지역 국회의원으로 출마했고 어렵지 않게 당선됐다. 청렴하고 결백한 이미지로 가정적인 면모와 학자적 자질을 무기로 지역 사회의 현안을 복지 차원에서 문제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치인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세상이 우스웠다. 모든 것의 이면엔 뭔가 다른 것들이 존재했다. 겉보기와는 다른 모습들을 사람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황교수에게는 그게 나였기를 바랐다. 인생에 있어 딱 한 번의 실수이거나, 진짜 사랑이거나.


"박사과정 들어 와요."

"병리나 임상 쪽으로 가려고요."

"이 쪽에 자리 하나 쯤은 봐 줄수 있어요."

"사실은 저 유학 준비하고 있었어요,"


황교수는 못내 아쉬워하며 내 손을 놓아 주었다. 황교수는 내게서 사랑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남자들의 사랑이란 게 여러 유사형태로 모든 여자에게 다 해당된다는게 남자들의 딜레마였다. 그가 가야할 길이 있듯이 내가 가야할 길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결혼을 수십 번은 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현상을 빨리 알아차렸다고나 할까, 하여튼 나는 흘러가는 구름이 어느 곳에 정초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기와 헤어진 이후 나는 그런 속 사정을 가지고 죽 살아온 듯했으니까.

지금,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국화처럼 내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해 볼만한 사람들이 여럿 됐고, 나는 한국에서 돌아온 지금,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렇고, 최소한 다니엘에게만은 내가 그의 행복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면에 다른 것이 없어야 했다. 적어도 행복은 그런 것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나도, 행복이라는 모호한 열꽃을 안고 서있는 투명하면서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들 아빠가,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이야, 관계를 끊지 못하다니...?

"한국 문화가 좀 그런 게 있잖아, 법적인 것하곤 다르게 인간적인 것들이 남아 있는, 단칼에 관계가 정리가 안되는 거야. 여전히 애들 아빠이기도 한 것 같은 거..."

"아, 그런 거?"

"응, 그래서 여기선 당신이 남편이고, 한국에선 아직도 그 사람이 남편이고 싶은가 봐."


다니엘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동그랗게 쳐다보았다.


"이해 안 될 거야."

"좋게 지내는 건 괜찮지, 그런데 한국에서 남편? 그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한국에서 남편 역할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뭐야, 그럼 한국에서 그 사람하고 잠도 같이 자고 그러겠다는 거야?"

"그건 뭐, 동의 여부에 따라 다르겠지. 내가 동의하면 자는 거고, 안 하면 안 되는 거고..."

"그래서? 당신은?"

"대답 못했어, 그 사람 마음이 너무 슬펐어."

"여기 미국사람들은 이혼 후에도 친구처럼 잘 지내잖아, 그런 거라면 나도 반대는 안 해."

"역시 섹스 문제 때문에 꺼리는 거야?"

"그게 그렇잖아, 전남편 현남편이랑 다 같이 자면 결혼은 왜 하겠어? 이해가 돼?"

"당신은 섹스가 배우자와 배우자 아닌 사람과의 관계를 구분 짓는 요소라고 생각해?"

"그런 거 아냐?"

"이런, 당신 자신을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우리 일도. 내가 남편 있는데 당신하고 관계를 했지? 당신도 앤젤리나나, 캐서린 하고의 관계도 잘 생각해 봐. 우린 동시에 한 침대에서 안 잔다 뿐이지 이미 여럿과 동시에 관계를 맺어 오는 사람들이야, 그게 인간이란 말이지. 그걸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이건 분명한 팩트라고."

"오 마이 갓!"


다니엘은 와인을 들이켰다.


"헤이 허니, 지금 내가 다른 여자랑 자러 나간다고 하면 당신 마음이 나를 허락해 줄 수 있어?"

"다니엘 그건 거짓말이야. 그런 가짜 상황을 만들지 마."

"피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그게 용납이 돼? 응?"

"억지야, 그런 일은 없어."

"아니, 가정이라고 생각하고서라도 대답해 봐."


나 역시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역시 논리는 논리일 뿐 현실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인 듯했다.


"난 할 수 없다고 봐. 그건 당신의 의지니까."


"한 사람의 의지 때문에 함께 사는 가정이 깨진다면?"

"깨지지 않는다구, 그런 일로 깰 수는 없는 일이라구."

"상대 배우자에게 신뢰를 저버렸는데 두 사람의 가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그런 일로 신뢰를 저버리는 일 따윈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야. 난 당신이 다른 여자와 잔다면 받아들이겠어."


갑자기 나는 내 논리에 매몰되어 나도 모르게 강한 어조로 내 주장을 하고 말았다. 그건 주장일 뿐 내 감정과 이성은 아닐 수 있었다. 모든 생각은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일어났던 흥분이 경험 후 깨끗이 사라지는 걸 체험하고 나면, 이건 일종의 해소와도 같은 기제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몸속의 반응이 감정을 건드리면 감정은 그때 한쪽으로 쏠리면서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때 이성은 어두운 방에 감금되어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변한다는 사실, 그 후 이성이 어두운 독방에서 풀려나왔을 때 사방은 폐허처럼 변해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몸과 정신의 관계이자, 감정과 이성의 관계였다. 나는 그 두 개의 이율배반성을 이겨내고 싶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불안정, 불협화, 허무와 불행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판단했다. 인간이 놓인 조건이었다.


"당신이 한국 간 사이, 캐서린이 내게 돌아오고 싶다고 했어."


다니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벌써 잔 건 아니고?"

"당신처럼 전남편이랑 자고 오는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어느새 내 목소리도 다니엘의 목소리를 따라 살짝 톤이 올라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문은 순전한 거짓말일 수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긴 했으니까.


"당신은 그 가짜 남편, 상기라고 했었나? 그 사람과도 만나고 있었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대신에 원래 다니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본론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난 당신과 지내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너무 소중해, 행복하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내 마음 전부야. 이제 한국 갈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당신의 진짜 마음이 그런 것처럼, 내 마음도 똑같아. 누구와 자는 건, 우리에겐 너무나 사소한 일일 거야. 그런 일이 우리 둘을 갈라 놓을 일은 없을 거야. 당신도, 나도 그래. 우린 서로 똑같으니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이건 사실이야."



keyword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