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 속에서 철호로 나타났다가, 정혜로 나타났다가, 심지어 철호의 애인 혜연, 정혜의 애인 다니엘이 되기도 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나는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다.
모든 이야기에는 필연적으로 시점이 적용된다. 거리, 시점이 주는 거리감은 전달되는 이야기의 흥미, 멀고 가까운 사건 교감과 관련한 친밀감을 노려 일정한 효과를 얻는다. 하지만 개별 시점이 가지는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즉, 나는 작가이면서, 모든 등장인물 각자이기도 한데, 이것은 마치 인도네시아 문어가 바위에서 산호초로, 코코넛으로 외형을 바꾸며 살아남기 위해 의태를 하는 행위와 같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으로 변해 나타나든, 이 인도네시아 문어처럼 변치 않는 본질, 작가일 수밖에 없는 본질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이야기 속에서 가까웠다가 멀어졌다가 했던 친밀감들의 거리가 주는 효과를 나는 걷어가려고 한다. 그래야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손오공의 머리털이 만든 변신술, 둔갑술이 심어주는 수많은 분신들은 허상일 뿐이다. 허상은 문학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꿈은 꿈일 뿐, 그 무엇의 실체가 될 수 없다. 마치 인도네시아 문어가 코코넛으로 변했다고 해서 그것을 통해 코코넛 속의 시원한 자연수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일시적인 착각을 통해 바다 속에서 육지의 나무 열매를 보는 즐거움은 줄 수 있겠지만, 분신이 보여준 요술은 허상일 뿐이다.
철호와 정혜 부부가 이혼하게 되는 과정, 그들 각자의 오랜 외도 경험은 이들을 이혼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너무도 단순하게, 단 한번의 음성통화가 이들을 결별케 했다. 이혼 사유가 이 정도인 것은 정말 약소하다. 수 많은 이혼의 내막에는 철호와 정혜와 같이 불륜과 외도가 삶에 숨겨져 있고, 결별의 결정적인 계기는 폭력과 속임수를 동반한다. 그래서 외도와 이혼의 과정은 권력다툼이며 지극히 절친했던 남녀가 벌이는 전쟁이다.
내가 아는 어떤 K는 오랫동안 뒷조사한 아내의 외도남을 찾아가 모텔 방의 창문을 열어놓고 관계를 맺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의 정보가 지인들에게 노출될 것이며 그 이후에 당신이 책임질 일이 사회적으로 많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협박이었다. 모텔과 시간을 지정해 준 K는 자신이 쓰는 사무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외도남은 딱 한 번이라는 K의 말에 따라 부여받은 시간과 장소에서 창문을 열었고, K의 아내와 관계를 했다. K는 옥상에서 지긋이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은 무언의 무수한 말들은 K의 복잡한 감정에 포개지며 그들 셋의 관계는 지금도 온화하고 평화롭다.
한 사람의 침묵이 가져온 평화였다. 되찾은 안정은 아내와 외도남에 대한 K의 권력적 압도를 전제한다. 이들 셋이 누리는 평화는 진짜 평화이겠는가? 주인과 노예,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 안주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끼리의 관계가 사회라는 그물망 속에서 살아남아야하는 존재의식을 지배하고도 남는다. 그만큼 섹스는 생존을 의미하며 이것은 권력구조를 반영한 목숨을 건 한바탕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쾌락의 즐거움으로부터 불려나온 외도남이 느낀 불안은 또 다른 시점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K의 아내가 자신의 외도 사실이 K에게 발각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두번째 창문 개방에 대한 요구를 외도남측에서 먼저 제안해 왔고, 그것은 K가 단 한 번뿐일 거라는 약속을 외도남 쪽에서 먼저 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더욱이 창문을 연 사람이 K의 아내라는 사실에 K는 황급히 옥상의 벽 안쪽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의 괴이한 삼각관계는 세번째로 창문이 열렸을 때 외도남의 불안과 K의 들끓는 분노를 수면 아래로 잠잠히 가라앉게 만들어 주었다.
K는
그래서 철호와 정혜가 헤어지게 된 표면적 이유는 과히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래서 철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혜의 남자들을 유추해 낸다. 상상력이 발동된 것이다. 상상력은 급진적인 파괴력으로 철호를 폭발시킨다. 비록 소심한 시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여파는 분노를 품은 공격과 복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속임수든, 변태적 행위든, 여기에 불륜과 외도까지 묶어 사랑이라고 포장해도 관계없다. 하고 많은 사랑 중에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이 존재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모든 해프닝들을 모두 다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 두자. 최소한 외도의 당사자 그들에게만은 아름다울 것이라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내겐 사랑인 것이 타인에게는 죄악이 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진 관계의 불행이다. 일방의 소중한 가치가 타인에게 넘어가서는 쓸모없는 저급한 자기합리화의 소재로 전락하는 현실, 그러니 너무 나의 사랑을 강조할 일도 아니고, 남의 사랑을 탓할 일도 못 된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지켜야할 소중한 진실이라는 것, 그걸 인정하면 상처도 고통도 덜하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면, 나 역시 관계의 구속으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즉,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분노와 배신의 감정을 잠시 내려 놓고, 외도의 관계도를 보고 있자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관계에서는 누구 일방의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파고 들어가 보면, 철호 정혜 부부처럼 서로에게 알려지지 않은, 발각되지 않은 외도는 수년에 걸쳐 수차례에 이르고, 그 관계망을 또 잘 들여다보면 서로의 교집합에 들어가는 인물도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탄식이 터져 나올 것이다. 이런 관계도를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관계로 확장해 보면, 페이스북을 창시한 저커버거가 했던 말, ‘몇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들’이란 말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이 10년에 걸쳐 다섯 명과 섹스를 했다고 가정한다면, 그 다섯 명은 또 각자가 다섯 명씩 관계를 가질 것이고 그렇게 뻗어 나가면, 대한민국 전체 성인 인구가 모두 돌아가며 관계를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래서, 섹스, 관계란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것이라는 것, 나에게만 생기는 특별한 사람, 그런 관계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커플은 몇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종사, 일부일처가 귀하고 희소하니 아름답다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보기 드물다, 그래서 그것은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고 보는 것,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전통적, 봉건적 가치이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방식이 이제 더 이상 타인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행위로 나타나서는 안 되며,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서도 안 된다. 내가 지켜야할 사랑은 가꾸고 다듬어 아끼며 안고가야 할 공유의식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거기에 외도가 끼어든다면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져가야 할 몫이지 외도를 한 상대 배우자를 비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외도는 생물학적 본능이며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관계력이다. 어떻게 인간의 도덕률이 생물학적 본성에 앞설 수 있단 말인가. 무엇에 대하여 깨끗하다, 더럽다고 유치해 놓을 일도 이제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일반화의 오류일까? 천만에, 세상은 외도하는 인간과 외도를 하고 싶은 인간 두 종류밖에 없다. 그중에는 외도를 기다리는 인간까지 있으니, 감히 말하지만 인간은 외도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간통하는 인간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쯤되면, 인간을 호모 아둘테리움(adulterium)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혹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간통 중이거나 간통하는 인간(호모 아둘테리움)을 목격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배우자의 외도를 막기 위해 만반의 태세와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물을 막으면 그 물은 막힌 곳을 돌아 가거나, 시간을 두고 물은 차서 벽을 넘어 다시 흘러 내려갈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작가는 이런 생의 순간들이 가지는 가치의 허구를 쫓아간다. 손오공의 머리털이 만든 분신들을 쫒는 것이다. 그래서 분신이 머리털이었음을 종내 보여 줄 것이다. 여러 수십 수백개의 머리털을 찾아내고, 결국 손오공의 본신이 드러나는 순간, 작가가 하는 말은 증언이 되어 당신의 뇌리에 가서 박힐 것이다.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제 일막이 마무리된 것 같다. 이제 2막을 열 준비를 해야겠다. 2막은 철호의 소설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웹소설계에 등단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독자를 몰고 다니는 구독률 1위의 작가로 등극한 철호의 필명은 '별사탕'이다. 별사탕이 만든 소설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었다. 유치하고 적나라한 성묘사가 언급할 가치가 없도록 엽색적 도착적이라는 평과, 저급한 표현 속에 숨겨진 솔직함은 생의 진실에 가닿는 다고 말하는 평, 극과 극이었다. 극과 극의 중간에,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환급금들이 속속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가속도가 붙게 했다. 어느새 철호는 29금계의 인기 작가 '별사탕'이 되어 있었다.
별사탕은 아직도 배고프다. 정혜를 가차 없이 난도질하여 난장에 던져놓고 뭇시선들에 강간당하는 정혜를 쳐다보는 허기진 눈으로 새벽을 하얗게 새우는 밤들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은, 비록 소웹소설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를 더욱 과격한 존재로 만들어 나갔다.
인터미션
잠시, 쉬었다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