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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영화이론

한길사, 1988

by 별사탕

제3장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에이젠슈타인(1898-1948)

아이젠슈타인은 4개국어를 구사하고 방대한 독서가이기도 했다. 특히 나라를 달리하는 언어를 읽어낸 독서는 그가 역동적인 사고를 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 중에서 그의 영화이론은 현장에서 부딪치는 각종의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이론화시키기 위한 저작들을 많이 냈는데, 이 이론들의 특징이 어떻게 보면 두서없이 보이기도 하고 비논리적이기까지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론으로써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못했다는 평이 대세를 이룬다.


1. 영화의 소재(구성요소)

영화의 구성 요소들 중에서 쇼트가 관객에게 일정한 의미를 전달해 줄 수있는 영화만이 가지는 특수요소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외 조명, 색조, 소리 등과 쇼트가 조화를 이루면서 이들 구성요소들은 모두 균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것, 즉 중립화 이론을 내세웠다. 그럴 때에만 영화가 예술로서 독립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에이젠슈타인은 일본의 가부키연극의 표현방식에 큰 영감을 얻게 된다. 가부키는 배우들의 동작이 전체적으로 표준화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연극이나 영화에서 사용하는 모든 장치, 구성요소들이 주제나 중심 동작을 극대화하기 위해 작용해야한다는 기존의 통일성이론과 상반되는 것이다.

푸도프킨이 쇼트를 편집하여 영화가 자연현상처럼 관객에게 다가가게 하는 것이 영화제작자의 임무라고 본 데 반해, 아이젠슈타인은 쇼트의 상호충돌이 일어나게 하여 관객으로하여금 영화의 공동제작자가 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아이젠슈타인은 쇼트를 통해 감각을 체계화시킬 수 있어야하고,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 관계'까지도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이렇게 관객의 경험을 영화 속에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론은 혁신적이었다고 할 수있다.


2. 영화의 수단, 영화적 경험(몽타주)

쇼트의 충돌을 통해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며 그것은 한자의 조어법과 유사하다. 그런 면에서 하이쿠의 각행은 쇼트와 같은 기능을 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쇼트와 쇼트를 충돌시키는 것, 그것을 몽타주라고 한다.


다섯가지의 몽타주 기법(변증적 몽타주)

-쇼트 속에 들어 있는 운율(숏의 장단에 따른 충돌), 율동(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의 충돌), 음조(명암의 충돌), 배음(운율 율동 음조가 모두 섞여 충돌), 비유(지적, 은유 상징 숏들의 연) 몽타주 등의 상호작용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창출된다. 이것은 전함 포템킨을 통해 잘 구현되었다.

몽타주는 편집되지 않은 쇼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화적 기법이다. 특히 음향은 시각(화면)과 청각(대사)을 결합시킬 수있다고 주장한다. 흑백추구, 무성추구를 전제로 한 영화의 예술성을 주장한 당시의 분위기로 보면 획기적 주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에 색체를 활용한 것도 당연시되었고, 3D영화 개발에 대한 전망, 정사각의 스크린 형태 고수 등은 그가 영화의 표현수단에 대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 모든 기법과 장치들은 몽타주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구성주의미학, 심리학, 관념연합론자들에게서 복합적으로 영양을 받은 아이젠슈타인은 특히 아동심리학자 장 피아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자아중심주의-아동(2-7세)의 선행위적 사고에 따라 행위를 그들 자신과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론. 이와 같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전인식적 경험을 형상화한것이라고 관객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영화의 장면들을 자신의 행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펠트 심볼(제1감각상징)-대상과 자신의 상태를 일치시키는 행위.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나타난다. 상자를 열 때 동시에 입도 벌리는 행위와 같은 것.

몽타주적 사고-사물의 최종적인 형태(결과)를 기억할 뿐 그 과정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몽타주 역시 장면들의 조합으로 생긴 결과를 획득할 뿐 그것을 어떻게 조합했는지 과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과 같다. 그래서 아이젠슈타인은 롱테이크 기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다.

내면의 언어-아동들은 내면의 언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외부의 대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유아적 세계를 변화시키고 결국에는 내면과 외부를 일치시켜 나간다고 보았다. 이것은 영화에서 두서없는 시각정보들(몽타주화된 영화)을 인과관계, 시간 공간 등의 기준으로 재조립하여 끼워 맞춰 하나의 전체를 형성해내는 것과 같다.


3. 영화의 형식

아이젠슈타인 고민한 지점은, 영화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형식의 문제였다. 이는 구성주의 미학(art machine)의 영향에서 시작해서 유기적 형식(art organism)으로 가는 과정에 발생 모든 문제였다. 쇼트를 구성하는 자잘한 구성요소들 음향, 조명, 연기, 대사, 이 모든 것들을 충돌시켜 어떤 한방향으로 묶어내는 것을 몽타주라고 보았고, 이 몽타주의 이론적 근거를 피아제의 아동심리학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성요소들 간에 주요요소와 부수요소와 같이 층이 진다는 것, 애초에 모든 구성요소를 병치 대위 시킴으로해서 요소들간에 대소 중요도의 차이 등이 없이 만드는 것이 최선의 조합이라고 아이젠슈타인은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구성요소(견인요소)들이 한 데 합쳐져 통합 혼합 뒤섞여 나아가는 방향을 스토리라고 본 것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장한 구성요소간에 층위를 두는 것을 반대한 자신의 몽타주 실천 개념에 반대 되기 떄문이었다.

이후 로만 야콥슨의 지배적 요소 개념에 영향을 받은 아이젠슈타인은 영화의 구성에 지배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 지배적 구조가 다른 구성요소들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을 견지했다. 구성요소들의 균질한 조합, 그렇게 조합된 것들의 총체는 '완전한 경험'(total experience), '전체로써의 느낌'(the feeling of whole)으로 관객에게 넘어가야한다고 믿었다.


예술기계

예술을 기계로 본다는 것은 모든 구성요소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어서 최종 단계에는 그 기계의 원 기능을 원할히 수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은 이런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의 통합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최종적으로 관객은 중심문제를 인식하게 되거나 제작자가 제기하는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기계의 작동원리로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젠슈타인은 관객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태도는 브레히트의 연극론(낯설게 하기, 소외이론, 소격효과)에 닿아 있다.

결과적으로 아이젠슈타인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다면 예술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영화를 자립하는 것으로 본 영화유기체론에도 기울어 주장의 혼란을 엿볼 수 있다.


유기체적 유추

아이젠슈타인의 초기 기계론은 유기체론으로 발전한다. 기독교에서는 영혼, 헤겔은 이데아, 아이젠슈타인은 테마라고 부른 이것은, 유기체가 본질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말한다.

어떤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그대로 나열(사실주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진실(true)에 접근하기 위해 현상을 분석하고 해부한 후 '사실의 원칙'(reality principle)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해야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화란 제작자의 '완성품'이 아니라 관람이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이 지적 정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영화의 구성요소들과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며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사건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아이젠슈타인은 왜 그렇게 관객에 비중을 뒀을까하는 것은 그의 혁명사상에 있었다. 민중들의 참여가 없는 혁명은 있을 수없는 일이었고, 영화가 궁극적으로 가고자한 방향 역시 혁명에 있으니, 관객을 혁명의 대열로 데리고 와야 했던 것이다.


4. 영화의 궁극적 목적

초기 그의 논의는 예술적 논의라기 보다 수사학적 논의라고 볼 수 있었다. 수사학이 청중을 지배하는 논리적 구조를 논하는 학문이라고 했을 때, 영화 기계론은 거기에 부합했던 것이다. 수사자가 청중을 지배해야하는 것처럼, 영화제작자 역시 자신의 영화로 관객을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몽타주기법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영화이론에서 영화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보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예술은 존재이유가 없다. 그것의 본질과 조화를 이룰 뿐이다. 이 두가지 명제에 충실한 것이 낭만주의 예술론이었다. 이에 따른 아이젠슈타인은 테마에 입각한 전달 내용을 구성요소들의 복합체(몽타주화된 쇼트)로 표현한 결과물이 이미지라는 것이다. 즉, 이미지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몽타주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진다.

조각난 파편들을 끼워 맞추는 행위를 관객에게 맡김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참가시킨다. 이렇게 부분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만, 기계적인 조합의 결과물은 아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은 체워 완성하게 되는 결과물,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은 존재가 되는것, 즉 영화유기체론으로 아이젠슈타인의 영화이론은 발전한다.

6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에서 바쟁의 이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아이젠슈타인의 이론이 본격적으로 번역되면서 바쟁이 쇠퇴하고 아이젠슈타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의 모든 역동적 편집은 아이젠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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