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묵, 동연, 2023
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사건이 71년 9월 도시민빈 발전을 위한 수도권도시선교회를 발족시켰고, 73년 교수신문에 게재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통해 민중신학의 개념이 대두되었다. 이를 토대로 75년 2월 서남동의 '예수‧교회사‧한국교회', 75년 4월 안병무의 '민족‧민중‧교회'의 글에서 신학적으로 정리되었다.
즉, 한국사회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을 통해 민중경험을 함으로써 형성된 한국에서 생장한 조류라는 것이다.
봉건 체제와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에 뿌리를 둔 민중 개념은 6, 70년대의 산업화를 겪으며 또렷하게 드러난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민중의 저항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병무는 민중 예수 개념을 가져와, 예수는 민중을 대표하며 전태일 사건은 예수사건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메시아적 역할론에 있어서는 한걸음 물러나 사건의 지평에서의 동일시이며 존재론적 동일시는 아니라고 못박았다.
또한 안병무는 민중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사건 안에서 자기 초월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본것이다.(민중 사건론) 이는 성서의 오클로스 무리(병자, 배고픈 자들, 세리, 죄인, 창기=체제에서 배제된 무리)를 끌고 옴으로써 정당화 되었다.
성서에 대한 묵상,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 인간중심적인 자유주의적 신학의 단계를 겪은 후, 그 연장에서 서남동은 신학을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느냐를 반영하는 것에 이르렀다. 서남동의 해방신학 개념은 종교적 측면이 약하여 이후 정치적 해방신학이라는 개념으로 전치와 종교를 아우르려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이에 서남동은 민중 신학의 개념을 성서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민중을 동일시하고 이를 '합류'의 개념으로 토착화신학을 넘어 독창적신학관으로 발전한다.
이로써 서남동의 '합류모형'을 정리하면, 기존의 개신교 가톨릭이 가졌던 권위(성서와 교회) 외에 실천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한국민족의 시련속에 등장하는 민중이고 그것은 또하나의 전거(참고자료)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이러한 한민족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배자들의 사이비 보편성을 거부하고 당파적 실천이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하게된다는 마르크스 레닌의 당파성-계급론에 근거한다. 성서의 민중성과 한민족 역사에서의 민중성이 합류하는 것, 예수와 민중 이 두가지의 합류는 역사에 있어 상황(context)과 역사(text)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합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김용복은 '신학의 역사적 틀' 개념을 주장하여 민중신학의 방법론으로 삼았다. 이는 민중을 둘러싼 현실과 실천을 방법론으로 내세우는 민중신학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민중신학이 사회이론화될 수 없는 것은 현실문제에 대해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차원의 테두리 속에서 가능하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이다. 즉, 민중신학은 태생적으로 사회문제의 해결방식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합류라는 개념 자체가 성서(말씀)나 교회(전통적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실천으로 나가게 하는 공시적 입장에서의 성령으로 해석되는 하느님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신의 계시라는 기존의 영적 영역의 것도, 계시라는 성령은 몸(하부구조)을 통해 내려오며 그 몸중에 민중도 포함된다는 것. 그러니 신학은 몸을 분석해야만 계시를 알 수 있다는 역발상적 신학개념을 만들어낸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부구조로부터 유리된 상부구조는 유령이요 아편'이라며 기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계시의 영역을 비판했다.(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2018)
이는 신약에 나오는 성령사건을 연상시킨다.(갈릴리 사람들의 언어를 다른 부족들도 모두 알아듣게 되었다는 일) 의사소통이 바로 성령의 현존이라고 보는 것, 따라서 민중들의 이야기가 바로 성령이 나타나는 방식, 즉 계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사회학적 방법으로 민중을 탐구해야하고 그렇게 할 때 계시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나안과 갈릴리 민중들의 이야기가 성서에 등장하는 민중들의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가 곧 계시라는 것, 하느님의 영적 계시가 따로 있었던 것(지배의 신학)이라기 보다, 이들 민중들의 이야기로 계시가 실현된다고 본 것이다.
강원돈의 '물의 신학'(1986)이 등장하면서 민중신학은 2세대 민중신학의 시대를 맞게 된다. 성육신론을 개념화하여 본격적으로 실천적 유물론을 내세워 신학을 민중적 신천론으로 나아갔다.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하였다.
민주사회주의체제-> 천년왕국(메시아의 나라)-> 신국(신의 나라)으로 가는 모형을 꿈꾸는 신학의 미래는 과히 가상현실적이며 초현실적 SF물이 아닐 수 없다. 민중에 기반한 실천운동이 지금 당장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목표가 신의 나라로 입성하는 것이라면, 어떤 정신 나간 민중이 입교서를 쓰겠는가. 이런 흐름에 있는 교리들이 낳은 것이 소위 말해 이단 사이비 교단들이다. 자칭 신이라는 교주들을 양산해 내는 거름역할도 민중신학의 이념이 했을 것이다. 80년대 이후 민중신학이 어떤 지류로 뻗어 나가 민중을 착취하는 종교로 대규모화되는지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그 연계성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영을 차단하고 계시를 몸으로 본것, 거기에 원하지 않았던 해석이 들어갔던 것이다. 김용복이 말하는 정치적 메시아 개념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안병무가 발표한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1986)라는 글에서 창조의 질서를 말하는 민중신학의 개념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자연과 조화로운 땅(인간의 세계)은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의 창조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창조적 노동이 강제되고 착취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남성 중심의 타락한 현실은 양성(하늘과 땅)평등의 창조적 세계에 대한 이반이다. 애초의 세계로 회귀해야 한다.
셋째 금단의 열매(생산수단, 혹은 권력과 같은 것)는 사유화(마르크스시즘에서 말하는 생산수단의 사유화)할 수 없는 공의 영역이다. 자율적이라는 것은, 타자로 인해 자신의 행동과 정신이 제한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에 공公이라는 질서가 형성됨으로써 인간의 삶의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국가는 특정 집단 혹은 개인에게 땅의 사유화를 법으로 보장해 주었고, 독점화하도록 도구로 전락하였다고 보는 것이 공의公義 신학의 기본 개념이다.
사유화된 공公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 법과 제도가 민중을 죄인으로 만들어 인권유린을 자행한다. 공의 사유화 개념은 국가대 국민의 차원에서 국민대 비국민의 차원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공의 신학과 공공성의 신학이 대비되는데, 공적 영역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공의 신학(민중신학)이 민중성을 바탕에 두고 현재의 체제를 억압체제로 인식하면서 종말론을 바탕으로 하는 신 중심의 세계관을 중심에 둔 데 반해 공공성의 신학은 공공의 차원을 신의 영역으로 보면서 현실 너머에 있는 신의 공역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점을 근간으로 어떠한 충돌도 갈등도 원치않는다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한국의 민중신학이 교회와 신학에 대한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에 해당한다고 역사적 의의를 천명한 바 있다. 그 중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부분은 다소 이론의 여지가 있는 논쟁이 이어졌다. 민중이 세계를 구원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민중 메시아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민중 신학, 민중 메시아론은 오재식의 '어떤 예수의 죽음'을 시발로 하여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의 독재 상황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저항이 담긴 1973년 5월의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보여준 양심의 고백과도 같은 기독교인들의 시국선언는 모두 전태일에서 비롯된 예수와 민중의 인과관계를 체득하는 종교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민중 메시아론을 뒷받침하는 과정이었다. 이로써 서남동은 민중을 '하나님의 공의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구원을 성취'하는 사람들로 정의 내리게 된다.
우리 민족이 지닌 한의 정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개인과 민족이 받는 핍박과 같은 것이다. 억압하는 이는 죄인으로 단죄하고 억압받는 이는 한으로 승화한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 예수가 핍박받는 자, 민중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해석의 부분이다. 서양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현실에 적용할 때 그만큼의 은유와 상징으로 받아 들일 수없었던 것은 그만큼의 민중성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들은 민중 대신에 시민성으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근대를 이룬 서양의 정신이었던 반면, 한국에서의 시민은 자본의 측면에서도 요원했고 정치의 측면에서도 요원한 역사를 가졌던 것이다. 그 기간이 오래된 만큼 민중성의 깊이는 더해 갔을 것이고, 이것이 오늘의 촛불로도 연결되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중의 한은 승화되어 어긋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공의 개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예수와 민중을 동일시 할 수있는가'이다. 이것은 피조물과 창조자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안병무의 일치론에 반대한 임태수는 서남동이 주장한 이원론을 더 깊이 있게 다룬다. 즉, 메시아는 민중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중의 뜻이 메시아의 뜻이라는 데까지만 동의한 셈이다. 나머지 반은 여전히 전통적 신학의 개념에 기대고 있다.
권진관 박재순은, 민중과 예수의 연속성에 대해 이 둘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이것을 '변증적 동일화'라는 말을 써서 예수와 민중을 변증하고자 한다. 양비론의 변형으로 양시론이라 볼 수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어떻게 인간이 신의 뜻을 짐작해서 신을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이 두 개의 논리와 이를 변증적으로 변주하는 동일화는 '모두 다 그럴 수 있다'는 가설로 정당한 입지를 얻고자 한다. 무신론자들은 그를 무엇으로 부르든, 특정 신에 얽매이지 않으며, 만약에 존재한다면 신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계급이, 특정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식, 그것은 피조물인 모든 생명 중에 '인간은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래서 만약에 신이 있다면 범신론적 개념(김희헌의 생각과 일치, 안병무의 '사건'과 서남동의 '합류'에 대한 포괄적 고찰)이 보다 보편적으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이 내려온 곳, 예수가 임한 곳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라면 그 곳이 바로 신이 존재하는 곳이 되며, 그렇다고 여타의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신은 그곳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을 뿐, 함께 한 그들 전부를 두고 어찌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국에서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두고 민중신학은 필요 이상으로 더 나갔다. 더 나간 부분은 통렬한 자기 반성인 것이지, 전통적 신학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교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교리가 등장해서 기존의 판을 뒤집었다는 역사를 통해 교회는 이미 세속화되었고, 사유화 되었다는 통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인간의 '사건들'과, 혹은 이들과 연관성이 결여되었을 수도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도 있는 신의 세계가 보여주는 구원의 계시가 과연 연속적인 것인가 불연속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강령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누구를 믿을 것인가의 목적물을 정해야 믿을 수있는 일이긴 하다. 그 목적물이 과연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것일까, 의문이다.
그것을 누가 알 수 있고, 누가 결정하는가. 신학자들이? '사건'과 역사의 주체들이? 인간들의 토론이? 이런 토론과 논의가 신에 대한 접근으로 보이기 보다,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이는 것은 또 웬일인가. 그래서 나는 종교를 믿을 수 없다. 그렇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는 다르다. 신은 믿을 수 있지만 종교는 믿지 않는, 교회에 갈 수는 있지만 기도하러는 가지 않는, 사랑하지만 사랑은 믿지 않는 나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남동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적 상징과 히브리적 상징 두 가지 모두를 수용했는데, 그리스의 경우 세계를 초월계(이데아)와 현실계로 나누어 사람이 죽으면 몸(현실계)을 떠나 초월계에서 영원불멸한 존재로 부활한다는 것이고, 히브리의 경우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미래에 몸이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두 흐름은 히브리적 전통이 그리스적 전통에 흡수 통합되어 실체로서의 부활개념은 희석되었고, 억압받는 현실을 혁명적으로 전복하여 신국, 신의 왕국이 온다는 사회변혁적 이념 또한 교회 안에서 이단으로 취급되며 부활신앙의 혁명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마가복음 8절이 교회가 인정하는 최후의 절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갈릴리에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래서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바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핍박받는 민중들 숙에서 예수는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이 교회가 필요없다는 교회불가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가톨릭 농민교회, 도시산업선교회, 금요기도회, 목요기도회, 갈릴리 교회,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NCC 인권위원회, KSCF, 기독자교수협의회 등이 민중신학을 실천하는 교회라고 하였다. 이전 기존 교회를 딛고 일어선 제3의 교회를 주창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안병무는 예수가 이 세상에 교회를 원한 적은 없다고 말하면서 종말의식을 상실한 교회에 대해 반성 비판하였다. 종말의식을 지닌 교회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천지개벽을 준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는 언급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만들었고, 향린교회 한백교회 탄생을 주도했다.
80년대의 민중교회와 90년대의 대안적 교회가 민중신학의 맥을 잇는 교회로 성장 발전했다.
세대 구분론-1세대 70년대(반독재 민주화, 전태일 사건), 2세대 80년대(변혁적 민중운동, 광주 사건), 3세대 90년대(문화정치학적 인식으로 권력해체에 접근, 소련 붕괴 사건)
이들의 공통점을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탈신학, 반신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서구중심의 신학적 세계관을 한국현실에 맞추고, 이를 세계로 확장시켜나간 개념이라 볼 수 있겠다. 민중여성신학, 민중종교신학, 신학적 재구성, 훈고학적 민중신학, 민중신학 근본주의 등의 이름으로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민중신학의 4세대에 대한 전망을 어떤 형태로 그림 그릴 수 없는 이유는 특별한 이슈가 없는 데서 찾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서구 중심의 신학 흐름을 반성하고 재정립을 휘해 몸부림 친 흐름이라면, 이제 신학도 K-신학으로 퍼져나가야 한다. 그게 어떤 방향이고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 오로지 민중신학과 그것을 실천하는 민중신자들의 몫이다.
부자가 천국을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신자가 아니어도 기억하는 2000년전의 예수의 말이다. 신학은 신에 대한 탐구학이자, 삶에 대한 탐구학이다. 신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말씀을 섬기고, 교회를 세운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신의 뜻을 바로 세우고 생을 사는 모든 이를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띤다. 그 안에서 예수가 한 일은 부자의 반대편에 선 사람, 가난한 자를 위한 종교의 사명을 역설한 것이다.
나는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를 가진 사람을 불신하지 않는다. 예수가 한 저런 말 때문이다. 종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공평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공평하지 않다면, 불공평한 일이 합법적으로 저질러진다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진자의 힘은 막강하며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 자신이라기 보다, 거기에 빌붙어 기생하는 것들이 악의 근원일 수 있다. ‘지주보다 마름, 시에미보다 시누이’ 같은 심정으로 민중들은 살아간다. 민중들은 또 다른 힘에 노출되어 간사한 새끼 권능을 맛보기까지 하니, 인간이 있는 곳에 권력의 서열관계를 나누는 것은 어쩌면 병가지상사같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사는 세상에 희망은 언제나 있다. 모든 핍박은 안에서 당한다. 세계로 나가 K-신학의 신학다움을 떨쳐야 한다. 그 첫번째 ‘사건’의 장소로 팔레스타인을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