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파이즈 카나파니, 윤희환역, 열림원, 2002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농부 아부 카이스, 요르단 암만에서 이라크 바그다드까지 밀입국을 하면서 이미 20디나르를 지불한 아사드, 생계로 인해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면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마완, 이들 셋은 쿠웨이트로 밀입국하기 위해 국경의 브로커가 제시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 해 망설인다. 이들에게 접근한 아불 카이주란은 쿠웨이트의 하즈리다 장군의 물탱크 트럭을 모든 트럭기사다.
아불 카이주란이 물탱크에 사람들을 싣고 국경을 넘겨주고 댓가를 받는 일은 그가 하즈 리다 장군 밑에서 일하며 챙기는 부수입이다. 악명 높은 브로커로부터 떨려나온 이들 셋을 긁어 모아 물탱크에 넣고 몇번의 검문소를 통과하는 사이 불과 몇분의 지체로 이들 셋은 탱크 안에서 질식사한다. 그들을 쓰레기 하치장에 버리고 돌아선 아불 카이주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비명같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왜, 물통 벽을 치지 못했니? 왜, 왜, 왜?
이건 마치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 같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눈을 뜨지 못하니? 왜?
-쿠웨이트에 왔는데 왜 눈을 뜨지 못하니? 왜? 왜? 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지배로 지금도 유효하게 살아 있다. 한국민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가만히 앉아서 보지 못하는 이유다.
나크바 때의 일인듯하다. 이스라엘의 갑작스런 영토 점령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고대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네들의 땅에서 쫒겨나야만 했던 그 때, 한 가정과 이웃집 가정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한 아이의 시선으로 서술된 이야기다. 팔레스타인 군대가 자신들의 빼앗긴 영토 오렌지밭을 회복시켜 줄 것으로 믿었던, 친구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억울, 분노, 폭사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강도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심정이 꼭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을사 을미 총독과 동척, 이 땅에 살 수 없던 민중들의 이주, 산개, 디아스포라… 지금의 강도는 누구인가!
혈흔 같은 반점을 가지고 태어난 명마, 이런 반점을 가지고 태어나면 자신과 가족을 해한다며 죽여야한다는 미신을 듣고 아버지는 그건 미신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결국 말은 어머니를 떨어트려 죽게 만들었다. 왜 일찍 그 말을 죽이지 못했는지 자챡을 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하고 심지어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안 의사인 아들, 아버지는 맹장 수술을 해야하는데 아들에게 수술을 받기를 거부한다.
이유를 알수 없었던 아들은 자신의 몸에도 혈흔반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제서야 아버지가 왜 그토록 자신을 두려워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 아버지를 수술하는 동료의사가 딴짓을 하다가 실수를 하게 되어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병원을 향해 달려간다.,
단지 미신과 얽힌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애착이 불러오게 될 비극을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변형이다.
나는 의대생으로 교보재로 사람의 해골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가난해서 해골을 살 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무덤을 파헤쳐 해골을 구하러간다. 친구 수하일과 함께 무덤을 파헤쳐 석관에 구멍을 내고 손을 집어넣어 햐골을 찾다가 수하일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변하며 저기 손가락이 시체의 눈을 찔렀다며 기겁을 하는 사건을 겪는다.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수하일은 의대를 그만 두었고, 나 역시 법대로 전과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자신들이 팠던 땅이 무덤이 아니라 누군가 곡식을 저장해 두고 사람들의 도둑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봉분을 쌓아 무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7년이나 지난 뒤 밝혀졌다.
죽은 자를 대하는 태도, 공포심이 주는 현실 감각의 왜곡 등을 보여준다.
움 사아드라는 사촌이 민병대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그 어머니, 처음엔 저기 아들을 사령관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민병대에 지원한 모든 청년은 어서 빨리 전투에 참가하기를 스스로 원하며 그것을 막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 준다.
사아드의 어머니는 사아드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둬 달라고 부탁한다. 사아드가 전쟁에 나가길 원하는데 사령관이 안 내보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단호하고 강인한 성격을 지닌 어머니의 말이다.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 보여준다.
어느 어머니가 자식을 전장에 나가 죽게 하고 싶으며,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버리고 전장에 나가 죽기를 원하겠는가. 사아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사아드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중동인들 사이엔 부족간에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바라크와 자단이라는 베두인족(사막 유목민)이 경비로 있는 신축건물에서 일할 때 화자인 나는 자단으로부터 같이 근무하고 있는 무바라크의 무개념한 일처리에 대해 감독인 나에게 규탄하며 건물주에게 진정을 해 줄 수 없냐고 묻는다. 얘기하다보니 자단의 영양사냥 얘길 듣게 되는데, 그의 사냥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사실, 자단은 자신의 사냥방식이 아니라, 나르라는 매의 사냥 방식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날아올라 몇번을 영양주변을 선회하면서 영양으로 하여금 자신을 스스로 따라오게 만드는 방식인 것이다.
이후 식음을 전폐한 매는 죽고, 영양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청준의 매잡이(1968)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다만 매와 영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현실 문화적 차원에서 알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다.
친구 무스타파에게 보내는 편지형식. 캘리포니아 공대에 입학허가를 받아준 친구에게 자신은 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쓴 편지다. 화자 역시 간절하게 가자지구를 벗어나 서방에서 쾌적한 삶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은 지식인이자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랬던 그가 가자자구 폭격으로 조카 나디아가 입원한 병실을 방문 했을 때 빨간색 바지를 사왔우니 빨리 털고 일어나라고 위로한다. 대답대신 나디아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가리켰고, 이불 속에는 정강이 아래로 잘려나간 다리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순간 화자는 깨닫는다. 마을입구에 쌓여있던 돌무더기의 의미와, 가자가 사파드(애도)에 이르는 먼 길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최서해의 탈출기(1925)를 연상시킨다. 친구에게 자신이 왜 이념에 앞선 극렬투쟁분자가 되었는지를 가족의 생활사를 통해 밝히는 내용이다. 어떤 이념 사상보다 생활이 앞선다는 것, 이것은 나디아를 통해 투쟁을 다짐하는 화자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념이 사람을 싸움터로 내몰지 않는다. 늘 생활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전쟁터보다 생활은 더 비참하기 때문이다.
민족감정이 우리와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만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핍박받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런 것인가.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일제강점기의 한국문학과 매우 흡사한 경향을 보이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