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 기독교사상, 1970.12
'어떤 예수의 죽음'은 1970년에 잡지 '기독교사상' 12월호에 실린 글이다.
글쓴이 오재식은 1933년생으로 추자도 출신이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1957) 후, 미국에 건너가 예일대 신학과를 졸업(1966)했다. 그가 이 글을 쓴 시기는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의 총무로 있을 때였다. 전태일이 분신(1970. 11.13.)한 후 한 달 만이었다. 12월호에 실린 것이니 글은 분신 후 지체 없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70년대부터 도시농촌선교회 간사, 통일원구원장, 참여연대 창립대표, 월드비전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교회일치 운동(에큐메이컬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아 통합 통일의 메신저이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중앙정보부의 기록에 그를 일컬어 조직력의 귀재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죽음이 잠자던 지식인을 깨웠고(실제로 고은은 노숙 중에 날아와 얼굴을 덮은 신문지면을 통해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기독교계에서는 오재식의 글에서 시발하여 성경을 재해석하고 낮은 데로 실천하는 연구자와 목회자들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것이 민중신학의 시작이 되었다.
'어떤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역사적 죽음이 갖는 의의와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 발생했다는 데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자 현실 비판이다. 특히, '예수. 내가 너의 나이를 아는 것은 설흔 세 살뿐. 남 같으면 장래의 포부로 부풀었을 때에 십자가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던 그 나이밖에는.'이라고 쓴 서두는 75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의 원형이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예수=너=전태일=민주주의, 이런 등식을 이루는 이 둘의 시대적 동질관계는 '타는 목마름'(예수의 유언, 내가 목이 마르다, 요한복음 19:28)에 이르면 기필코 이루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예수로 하여금 예비된 행동과 말을 하게 한다. 전태일 또한 전신화상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마지막 유언을 그 어머니에게 남긴다. 그것은 애통하게도 '배가 고프다.'였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예수이면서 전태일이기도 한 '너'는 타는 '목마름'과 '배고픈' 허기로 민주주의를 갈급하며 죽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다 이루었다'고 말한다.
전태일은 마지막 부탁을 어머니에게 한 후 절명한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다시 깨어나고 '다 이루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김지하가 혼성모방적 표현('내가 너를 어떻게 하는 것'으로 기술되는 문장구조의 변용)을 '타는 목마름'에서 허용한 것은 시대적 사명과 같은 일이었다. 예수의 죽음이, 전태일의 죽음이 가져올 변혁의 시작이었다.
예수. 너는 죽어서 많은 예수를 낳고 그 예수들이 다 같이 예루살렘 거리에 서는 날, 너는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를 가르칠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는 전태일로 부활한다. 그래서, 이 수미상관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글이 교회 안에서는 민중신학을 탄생시켰고, 뒤따라 온 수 많은 각성을 통해 사회에서는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 이렇게 한국에서, '다 이루는' 역사는, 모두 전태일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다.